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온 후 그 느낌이 보다 또렷해졌다. 그것은 감각의 기묘함인데 이를테면 공간에 대한 것이 그러하다. 결혼한 이후 지금의 주거지가 다섯 번째인데 그 주거지들에 대한 감각, 심리적 거리가 거의 같다. 순서상의 전후는 말할 것도 없고 분명 집의 위치와 크기, 분위기가 모두 다르고, 더군다나 아이들이 터울을 두고 둘이나 태어나면서 각 집에 소장되어 있는 애환이 크게 편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집들에 대한 기억의 명암이나 농도가 많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손잡이의 느낌, 거실 바닥의 무늬, 낡은 문지방들, 창으로 흘러 들어오던 무거운 바람들이 비슷한 기억의 감도로 떠오른다. 재미있는 것은 세 번째 집에서 6년을 살았고, 네 번째 집에서 한 달밖에 살지 않았는데, 두 집의 구체성, 그 안에서의 일상의 느낌이, 지금 눈앞에 떠오르는 선명도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공간의 차이뿐 아니라 시간의 길이라는 것도 기억에는 별 역할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시간이라는 것도 애매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어제는 아주 먼 과거와 동일하게 아득하다. 조금도 지금에 가깝지 않다. 어제를 꺼내려면 까마득한 심연이라도 뒤져야 한다. 그리고 이런 무차별성이 급기야 지금 이 순간까지 집어삼키고 있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그렇지 않고서야 현재라는 것이 이렇게 아득할까. 현재 역시 오래된 과거처럼 멀고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현재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상기와 호명을 통해서만 감각의 지평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며 기억의 팽창과 수축은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은밀한 작동을 하리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신비하게 여기는 것은 기억의 이러한 특수성이 아니다. 기억을 포함하여 공간과 시간의 차이들을 지워 나가는 알 수 없는 어떤 힘, 균형이 문제인 것이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상이한 경험들이 부지런히도 흩어지는 모래알들이 되어 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지배력 말이다. 무엇일까. 무엇이 있기에, 혹은 없기에, 모두 평등해지는 것일까.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어떤 소실점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혹은 소실점 그 자체인 걸까.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균형에 저항한다는 것은 어떤 사소한 장난일까.
글을 쓰는 일이 날마다 하나의 단순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차이들마저 실은, 차이들로 인해 잠깐 가볍거나 무거워지다가 다시 균형을 회복하게 되는 시소의 운동 같은 것 속으로 통째로 곤두박질치고 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오늘 내가 만난 사람, 억누른 감정, 예기치 않은 비약, 지속되는 꿈같은 것들이 모두 균형이라는 거대한 시소를 위해 비슷비슷하게 기능했듯이 말이다. 시소에 저항하는 듯이 보이는 것도 시소에 공헌하는 것이 되는 운명에서, 글도 예외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도 결국 시소 위에 앉는 것이라면?
시소는 무엇도 지향하지 않는 균형 바로 그것이다. 물론 질서가 아니다. 질서에는, 그것이 비록 신의 질서라 할지라도 혼돈을 제압하는 피로와 불가항력 같은 것이 들어 있다. 그보다는 시소는 기계적인, 단순한 균형이요, 균형을 위한 힘이다. 그것은 파괴이자 구원이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구원이자 파괴이다. 나는 한 편의 시가 태어나자마자,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가혹한 몰락의 길을 걷는 것을 이제는 보다 확연히 느낀다. 그의 출현은 선언이지만, 출현 자체는 이토록 스스로를 완화하는 것이다. 그는 출현을 통해 비슷해졌다. 우세한 시라는 것은 없다. 다만, 아주 잠시, 그 시가 꿈꾸었을 차이가 떠도는 것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