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친구 구보가 『베토벤의 가계부』라는 책을 선물했다.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음악가들의 경제관념과 생활에 대해 집중한 책인데, 구보 역시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책이었다. 극작가인 구보의 경제생활을 걱정하신 아버지가 『베토벤의 가계부』를 구보에게 전했고, 그 책을 읽기도 전에 구보는 또 한 권의 『베토벤의 가계부』를 사서 내게 전한 것이다. 우리는 『베토벤의 가계부』를 함께 읽기 시작했다. 같은 속도로, 그리고 같은 공감과 흥미로.

일주일 후, 우리가 내린 결론은 같았다. 몇 백 년이 흐른 지금,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유명해진 그들도 한때는 ― 혹은 평생을 ― 생계 걱정에 시달려야 했다는 것. 오케스트라를 생일선물로 받은 멘델스존은 예외였지만. 악보만 쓸 것 같던 베토벤도 가계부를 썼고, 그의 가계부 안에는 스승 하이든과 마신 커피 값이 아주 일상적인 느낌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오류가 자주 드러나는 베토벤의 산수 실력으로 인해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그의 가계부는 한 예술가가 자신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에 감동적이었다. 돈은 단지 예술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의존의 대가를 작품으로 치르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이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가계부를 쓰지는 않지만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까지 빠짐없이 기록하는 카드청구서가 있으니 몇 세기 후쯤, 21세기 작가들의 살림살이를 담은 책도 등장한다면 거기에 한 몫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내게로 날아오는 우편물들의 수신지가 바뀌었다. 예전부터 해왔던 생각, 그러니까 어떤 공간에 대한 열망으로 서른이 되던 해에 독립된 창작공간을 만들었다. 공간은 물론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도 들어가 있다. 책상 위에 ‘프로 윤고은’이라는 다섯 글자를 써 붙였다.

작업실의 첫 달이 지나고, 전기세 고지서가 날아왔다. 나는 깨알 같은 활자들 사이에서 불필요한 항목을 발견했다. TV 수신료가 들어 있었는데, 작업실에는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걸어 나는 텔레비전이 없노라고 이야기하자, 그들은 어떤 이유로 텔레비전을 놓지 않는지에 대해 살짝 물어본 후 금방 새 고지서를 보내주었다. TV 수신료가 들어있지 않은 고지서였다. 야무지게 첫 테이프를 끊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첫 테이프의 야무진 기쁨은 잠시, 곧 무차별 폭격이라도 하듯이 뭔가가 연달아 날아들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고지서 위에 찍힌 금액이 많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고, 예상했던 만큼이지만 그래도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있었다.

가스요금 고지서가 날아들었다가 구겨졌고, 관리비 고지서가 날아들었다가 구겨졌다. 그리고 마침내 훌쩍 인상된 건강보험금 고지서가 날아왔을 때, 나는 전화를 걸어 내가 왜 이렇게 많은 건강보험금을 내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 물론 내가 통화한 상대방은 한 명이었지만, 이상하게 복수형처럼 느껴진다 ―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합당한 결과임을 알려주었다. 나는 당분간 아프지 않을 것이며 ― 이건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 아프더라도 그때 가서 생각해보겠으니 다달이 이만큼의 돈을 낼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 말들 대신 튀어나온 말은 이거였다.

“만약에 이거 안 내면, 못 내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들은 말했다.
“재산 압류 들어갑니다.”
전화를 끊기 전에 그들은 올해 나의 수입이 줄어든다면 내년에는 보험료가 내릴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게 위안의 말인가. 전화를 끊고 또 무언가 억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시선이 닿는 곳에 하필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 꽂혀 있었다. 점점 작아지던 고리오 영감의 방이 떠올랐다. 아주 잠깐 사이에, 내가 머무는 공간이 조금 더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독립된 창작공간은 어느새 내 어깨 위에 올라와 있었다. 버티고 가야 할 짐의 온전한 실체랄까. 문득 파고든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높이가 조금 낮아진 것
도 같았다. 천장도, 책상도, 의자도, 그렇게 가끔은 불안해지고 주눅이 들기도 한다.

“소설가는 연봉이 얼마쯤 되나요?”
대학생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물었다. 연봉이라니, 물어볼 만한 질문이긴 한데 어쩐지 생소한 단어였다. 통계에 따르면 200만원이라든가, 300만원이라든가. 물론 연봉에 대해, 그러니까 내 수입에 대해 무심한 것은 아니다. 독립된 공간까지 어깨에 올려져 있는 상황에 수입에 대해 무심할 수가 있겠는가. 가난하거나, 그렇지 않거나의 이분법 혹은 삼분법 정도로 나눠도, 어쩌면 사분법으로 나눈다고 해도 나는 아마 가난한 쪽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해서 보폭이 좁아지지는 않는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가끔 굳이 갈 필요가 없는 곳을 향해 들어가는 차비를 아끼지 않는다.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엉덩이 힘 못지않은 넓은 보폭이다.

넓은 보폭을 중시하는 또 한 명의 동료, 구보는 며칠 전, 앙코르와트로 여행을 떠났다. 인도 여행을 다녀온 지 1년 만에 다시 떠나는 해외여행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구보에게 사람들은 자주 묻곤 한다.

“대체 무슨 돈으로 여행을 떠나는 거야? 일단 떠나면 최소 백만 원은 족히 깨질 텐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구보는 이렇게 대꾸한다.
“여행을 어떻게 가냐고? 대출 받아 가는 거지. 나는 누구에게나 만날 때마다 조언해. 대출 받아 여행을 떠나라고. 일단 돈을 당겨 쓰고, 갔다 와서 갚으란 말이야. 어차피 우리에게 여유는 오지 않아. 여유 자금 생기면 어쩌겠다는 생각을 버려.”

구보의 통장은 자주 앞당겨 쓰고 뒤늦게 갚은 흔적들이 조급한 발자국처럼 찍혀 있다. 그러나 그 통장 덕분에 구보의 삶은 늘 긴장감이 맴돈다. 구보는 여행을 다녀온 후 앞당겨 쓴 통장의 숫자들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기 위해 본업인 극작 외에 다른 일거리들도 해야 한다. 물론 여행이 아니었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글쓰기만으로 먹고 살기는 불안하다. 나 역시 구보와 비슷하게 산다. 앞당겨 쓰고 뒤에 가서 갚는 식의 여행은 하지 않지만, 반대로 뒤에 가서 갚을 것까지 먼저 해놓고 홀라당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순서의 문제일 뿐이다.

“우린 지금 뭔가를 포기했기 때문에 누리고 있는 거야.”
우리가 포기한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나도, 구보도 모른다. 구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여러 가지 예를 들고 있지만 내가 볼 때 그것들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굳이 우리가 포기한 그것들에 대해 둔한 손길로나마 더듬다보면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분명 나를 보다 더 달콤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었음
은 분명하다. 아마도 울타리 같은 것. 우리는 울타리 밖에 있을 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내 선택의 기준은 늘 시간이었다. 파티션은 사무실 책상 사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도 무수히 많은 파티션이 등장하는데, 일터에 매여 있다면 오로지 나만의 파티션으로 내 시간을 등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다음은 선택의 문제였다. 나는 분명 가난이 아니라 현재를 선택했다. 현재 내가 누릴 수 있는 시간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선택은 분명 가난함 쪽에 가까운 것이었다. 적어도 당장은 그렇다.

선택의 결과로 몇 년간, 지갑 속에 다섯 개 정도의 명함을 갖고 다녔다. 종일 한 군데에 매일 수는 없었다.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면서 지역신문이나 사보에 글을 썼고, 학습동화를 쓰기도 했고, 국어 과외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전혀 색다른 기술을 배워서 다른 돈벌이를 또 하나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다. 사보기자로 일하면서 과외교사 명함을 꺼내거나, 그 반대로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명함이 종류별로 많다고 해서 수입이 많은 것은 아니다. 명함의 개수와 수입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단지 나를 설명할 말들이 많은 것뿐이고, 그 중에 하나로 통합할 만한 말은 없었던 것뿐이다. 나중에는 그것들을 통합해 내 이름 석 자와 연락처만 넣은 나만의 명함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마저도, 첫 책이 나오기 1년 전에 모두 중단해버렸다. 또 하나의 선택을 한 셈인데, 이번에도 가난이 아니라 현재를 선택한 것이지만, 그 선택은 분명 가난함 쪽에 가까운 것이었다. 적어도 당장은 그렇다.

울타리 밖에서 살아가는 것은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한다. 작업공간을 만들었지만 이것 역시 울타리는 아니다. 오히려 통통 튀어 오르는 트램블린에 더 가까울 것이다. 트램블린의 바닥처럼, 내 생활은 유동적이다. 내가 얼마만큼 뛰어오를 수 있는지도 얼마나 오래 서 있을 수 있는지도 알 수는 없다. 고정적인 파티션은 어디에도 없다. 6개월 후를 모른다. 아니, 막상 다음 달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다. 불안하다. 그러나 그 불안감조차도 가끔은 재산처럼 느껴진다. 트램블린은 불안정하지만, 높이 솟구치면 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방방 뛰어오르거나, 때로는 뒹구르르 구르거나, 트램블린 위에서 요동치다보면 같은 고민을 했을 사람들의 이름이 이정표처럼 저만치에서 빛나기도 한다. 살아있을 때 단 두 점의 작품밖에 팔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를이라는 도시 전체를 가진 고흐, 그 도시가 그를 기억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프라하의 주인이 된 카프카. 그 외에도 많은 지명들이 예술가들의 이름을 덮어쓰려고 한다. 예술은 정치보다 수명이 길다. 몇 세기를 건너뛸 수 있는 힘은 예술에서 시작된다. 곳곳에서, 심지어는 지구 반대쪽에서까지 건너오는 사람들의 발길 속에 예술가들은 날마다 부활한다. 그 사실이 나를 가끔 겁 없게 만든다.여러 음식들이 눈앞에 있을 때 먹고 싶은 것부터 먹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마지막으로 아껴두는 사람이 있다. 나는 당장 하고 싶은 것, 당장 가장 좋아하는 것부터 해치우는 인간형일 뿐이다. 물론 그건 선택의 결과다. 나는 자주 불안해지고, 더럭 겁이 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안하지 않을 때 정말 불안해지기도 한다. 불안감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불안감이 나를 덜 불안하게 돕기도 한다. 기이한 구조의 문장이지만, 나는 분명 그 문장 속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