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제가의 필적. 글씨를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성격만큼이나 곧고 반듯하며 날카롭다.     © 운영자

                           꽃 좋으니 뼈 속 깊은 가난인들 상관하랴 花好何妨徹骨貧

                           살얼음에 잔설 남는 계절이 찾아오면 想到薄氷殘雪候숲 

                           아래 물가 사람 반드시 그리리라 定思林下水邊人

시 다음에는 “차수(次修, 박제가의 자) 검서관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으니 이 소폭 그림으로 전송하여 이별하는 뜻을 나타낸다. 次修檢書 將歸朝鮮 作此小幅 以當折柳之意”고 적어 그림을 그려주는 뜻을 설명했다.

▲ 나빙의 초상. 그림을 그림에 있어 외양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귀취도(鬼趣圖)가 유명하다.     © 운영자

나빙은 눈 속에서 피는 매화를 그려, 아무리 빈한해도 풍류와 운치가 넘쳤던 박제가를 담아낸 것이다. 3, 4구에서는 얼음이 얇아지고 쌓인 눈이 점차 녹아 잔설만 남아있는 겨울 끝 무렵, 즉 매화 피는 계절이 찾아오면 멀리 그대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빙은 매화로도 자신의 깊은 정을 다 표현하지 못하자, 박제가의 전신상을 그리고 또 거기에 두수의 시를 적었다.

삼천 리 밖 조선 사람 이렇게 마주하니 相對三千里外人

좋은 선비 만남 기뻐 그 모습 그렸다오 欣逢佳士寫來眞

사랑스런 그대 운치 어디에다 견줄거나 愛君韻將何比

매화의 화신임을 분명히 알겠구나 知是梅花化作身

어인 일로 그대와는 보자마자 친해졌나 何事逢君便與親

떠난단 말 홀연 듣고 삶의 쓴맛 말했다오 忽聞別我話酸辛

이젠 좋은 선비라도 담박하게 대하리라 從今淡漠看佳士

이별의 아픈 마음 가장 슬픈 일이거니 唯有離情最愴神 

말도 통하지 않고 나이도 자식뻘쯤 되는 조선 선비 박제가를, 나빙은 매화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이때 나빙은 58세, 박제가는 41세였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친해졌고, 그래서 헤어지는 아픔이 더욱 심했다. 한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삶에서 합일은 이렇게 섬광처럼 왔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나빙은 떠난다는 말에 인생의 괴로움을 이야기했고, 아무리 아름다운 선비를 만나도 다시는 정을 주지 않으리라 다짐까지 한다.박제가와 헤어진 뒤, 나빙은 그리운 마음을 담아 시를 보냈다. 
 
                         

겨우 두 번 그대와 만났었는데 兩度與君逢

생각해도 이제 그댄 떠나고 없네 思之今已去

우리 사이 길 멂을 한하지 않고 不恨道路長

그대 홀연 떠나감을 한탄한다오 恨君別我遽

풋 잠결에 그대를 만났었는데 假寐忽見君

서두르며 몇 마디 이야기했소 蒼茫與君語

모르겠네 그대도 꿈을 꾸면서 未知君夢中

혹시 나를 만나지 않았던가요 遇我還未遇

겨우 두 번을 만났지만, 꿈속에서 만나 대화를 나눌 정도로 나빙은 박제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빙은 묻는다. “나는 꿈속에서 그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대도 혹시 꿈속에서 나를 만나지 않았소?” 그 마음이 마치 어린아이 같다. 그는 맑고 여린 마음을 지닌 예술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빙을 대한 박제가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 나빙이 그려준 박제가 전신도. 작지만 단단한 체구,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온몸으로 감당했던 지식인의 정신가지를 잘 그려냈다. 근대 일본의 역사학자인 후지스카 지카시(1879~1948)가 소장하던 작품으로 원본은 2차세계대전 당시 재가 되어 사라졌다.      © 운영자

 
 
 
 
 
 
 
 
 
 
 
 
 

  
우정이란 쌍방 간 교호인지라 한쪽을 보면 다른 쪽은 절로 드러나니 다 들춰볼 건 없다.
 
박제가는 나빙과 헤어지고 나서 몇 편의 시를 부쳤다. 다음은 그 중 두 수이다. 

천년에 짧은 이별 술은 갓 깨어나고 千年小別酒初醒

사해에 벗 논하니 마음 온통 환했다오 四海論交眼盡靑

내 보물은 모두 다 산 것이 아니어니 我貨都非銀子買

허름한 시낭 화축 간간히 웃음 짓네 詩囊畵軸笑零星

누런 주렴 선방의 글 읽는 소리 떠올리니 簾禪室憶書聲

꿈결에도 매화는 눈에 환히 비치누나 夢裡梅花照眼明

수레 오른 오늘 마음 시원치 아니함은 今日登車心不快

보내주신 시구에 이별의 정 울려서라 薄氷殘雪動離情

가난했던 박제가는 책이든 서화든 변변하게 사지 못했다. 대신 그의 시주머니에는 나빙을 비롯한 북경의 문사들에게서 받은 시가 들어있었고, 화축에는 나빙이 그려준 몇 폭의 그림이 말려 있었다. 그건 모두 마음을 주고받은 우정의 증거였다. 숙소에 돌아온 박제가의 귓전에는 선방에서 글 읽는 나빙의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고, 잠을 잘 때에도 나빙이 그려준 매화가 눈부셨다. 이 말은 “혹시 꿈에 나를 만나지 않았소?”라는 나빙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았던 두 사람은 해도 바뀌기 전에 다시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귀국길에 올랐던 박제가가 도착하자마자 정조의 특명을 받고 동지사 행단에 끼어 북경에 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고, 다시 헤어지는 슬픔도 맛보았다. 1791년 박제가가 귀국한 뒤에 두 사람은 인편을 통해 편지와 선물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나갔다. 박제가가 청심환과 일본산 먹 등을 보내주면, 나빙은 고대 청동기에 새겨진 글씨를 탁본하여 보내주었다. 나빙은 박제가의 생일이면 시를 써 먼 친구를 기렸고, 박제가도 간혹 서쪽 하늘을 보며 나빙을 그리곤 했다.
1801년 박제가가 네번째로 북경에 갔을 때 나빙은 이미 죽고 없었다. 박제가는 나빙이 있던 곳을 찾아 위패를 놓고 제사를 지내며 곡을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를 보고 놀렸다.

“당신은 동국에서도 돈을 없애가며 벗의 제사를 지내주었소?” 박제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을 알아주는 벗(知己)이니, 돈을 쓰고 안 쓰고는 따질 바가 아니오.”
일찍이 사마천은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었을 때 그 사귐의 정을 알 수 있다. 一生一死, 交情可知”고 했으니, 이 말이야말로 박제가와 나빙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한 이천 년 전의 증언인 셈이다.
여행의 즐거움을 물으면 사람마다 대답이 다를 것이다. 각기 기이한 산천의 형세를 보는 즐거움, 낯선 풍속을 관찰하는 즐거움, 역사의 현장에 서거나 문화유적을 음미하는 즐거움, 산해진미를 상 가득 차려놓고 배 불리 먹고 크게 취하는 즐거움을 말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떤 것보다도 여행자의 마음을 가장 깊이 그리고 오래도록 울리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기약 없이 만나 마음을 나누고, 재회의 기약이 없는 이별 앞에서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때로 서산에 지는 해를 보며 천만 리 멀리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여행지에서 사람을 만나고, 그러한 사연이 그득한 여행기를 찾는다. 휴식, 공부, 무역, 외교, 순례, 답사 등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사람을 얻지못한 여행은 공허하다.(박제가와 나빙이 만난 사연은 그의 시문집과, 그의 사후 아들이 편한 『호저집(縞紵集)』에 흩어져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