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과 연초 출판가의 ‘핫 이슈’는 『덕혜옹주』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와 신경숙씨의 『엄마를 부탁해』등 기존 문학 작품들의 인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돌연 권비영 씨의 역사소설 『덕혜옹주』가 혜성처럼 등장해 단숨에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덕혜옹주』는 2월 첫 주부터 셋째 주까지 3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며 출간 석 달 만에 15만여 부가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대형 작가의 작품이 아닌 무명에 가까운 작가의 작품이 이처럼 뜨거운 인기를 끈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1995년 등단, 2005년 소설집 『그 겨울의 우화』 만을 펴냈던 권 씨는 『덕혜옹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랐다.
『덕혜옹주』의 인기는 적절한 시의성, 덕혜옹주라는 인물 자체가 가진 힘, 출판사의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 등 여러 요소가 잘 맞물려졌기 때문으로 분된다. 덕혜옹주는 고종 황제의 막내딸로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작가 권 씨에 따르면 “대한제국을 온몸으로 느끼고 겪은 상징적 인물”로 표현될 만큼 드라마틱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일본인과의 강제 결혼, 정신 이상, 딸의 자살, 쓸쓸한 죽음 등 덕혜옹주의 시대에 휩쓸린 비극적 삶이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고조된 민족사에 대한 관심과도 맞아 떨어졌고, 특히 여성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출판사는 『덕혜옹주』 독자의 70%가 여성이라고 밝혔다. 출판사가 벌인 적극적 사전 홍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 한몫했다. 출간 전부터 덕혜옹주의 커다란 사진이 찍힌 포스터 2만여 부를 배포하고 대형 서점가 옆에서 ‘침묵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티저 광고’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편 그동안 투병 중이어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작가들의 신작 출간이 잇따르면서 출판계에 기쁜 소식을 전했다. 1990년대 말부터 심각한 우울증 등 정신병 증세를 보이며 긴 침묵을 이어갔던 최승자 시인은 11년의 공백을 깨고 신작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을 펴냈다. 그동안 절망과 고통, 분열된 자의식 등 어두운 세계에 머물렀던 최승자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한결 초탈하고 홀가분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며 ‘내 시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임을 보여줬다. 그는 기존의 시간과 질서를 초월한 세계, 도가적 무위의 세계관을 선보이며 시에 대한 애정과 멈출 수 없는 시작에의 의지를 보여준다. 최 시인은 아직 포항의 한 의료원에서 요양 중이지만 이번 시집을 보면 그가 점차 폐쇄적이고 어두운 세계로부터 시라는 끈을 수단 삼아 빠져나오고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암 투병 중인 소설가 최인호 씨와 이해인 수녀도 나란히 신작 에세이집과 시집을 선보였다. 최인호 씨는 샘터에 35년 간 연재해오던 「가족」 집필을 중단해 주변의 걱정과 우려를 자아냈지만 에세이집 『인연』으로 독자들에게 그의 안부를 전해왔다. 최 씨는 에세이집에서 자신이 지금이 있기까지 함께 했던 소중한 인연들과의 추억을 회고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줬다. 이해인 수녀 역시 암 투병 기간 느낀 고통과 희망을 생생히 담아 낸 시집 『희망은 깨어있네』를 펴냈다. 솔직하고 투명한 언어 속에 담긴 이 수녀의 희망과 삶에 대한 의지가 읽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웹진과 인터넷 서점을 중심으로 인터넷 소설 연재가 더욱 확산되는 가운데 인터넷에 연재됐던 소설들의 단행본 출간이 이어져 출판계를 풍성하게 했다. 정이현의 『너는 모른다』, 전경린의 『풀밭 위의 식사』, 김선우의 『캔들 플라워』 등 인터넷 연재소설들이 줄줄이 출간되는 가운데 은희경 씨가 5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소년을 위로해줘」 연재를 시작했으며, 『촐라체』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인터넷 소설 연재 붐의 포문을 열었던 소설가 박범신 씨가 출판사나 인터넷 서점 등의 청탁과 관계없이 스스로 자신의 블로그에 신작 소설 「살인 당나귀」 연재를 시작해 눈길을 끌었다.
정이현의 『너는 모른다』는 20~30대 여성의 일과 사랑을 보여줬던 기존 작품 세계에서 벗어나 미스터리 형식으로 파편화된 현대인의 삶과 이민자 문제 등 사회적 문제를 다뤄냈으며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 ‘정이현 파워’를 실감케 했다. 전경린의 『풀밭 위의 식사』는 사랑과 연애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전 씨 특유의 필치 아래 성폭력로 인한 정신적 외상과 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김선우 시인의 두 번째소설인 『캔들 플라워』는 2008년 촛불집회를 최초로 소설로 형상화해낸 작품으로 여성 간의 연대, 새로운 생명 의식 등을 김 씨 특유의 감각적 문체 속에 담아냈다.
민중문학 작가인 김남일 씨가 15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은 기존 소설과는 다른 큰 스케일과 현대 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아내 눈길을 끌었다. 토끼 영장류라는 독특한 주인공을 내세워 독재와 폭력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인간 중심주의의 문제점 등을 재기발랄한 입담으로 풀어냈다. 차세대 젊은 작가로 주목받는 김사과 씨는 장편 『풀이 눕는다』를 통해 60년대 히피들을 연상케 하는 기존 체제에 저항적이며 자유분방한 젊은 예술가들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아냈다. 두 작품 다 현대 사회에 ‘전망 없음’을 말하는 듯한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추리 기법 등 장르소설적 요소를 본격 문학 작가들이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것도 하나의 추세로 자리잡았다. 권지예의 『4월의 물고기』, 이홍의 『성탄 피크닉』, 정이현의 『너는 모른다』가 그 작품들이다. 이홍은 『성탄 피크닉』에서 토막살인이라는 충격적 소재를 통해 강남 상류층의 세태와 계급 모순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문학동네가 세계문학전집 출간을 시작하고 민음사가 90년대 현대 세계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한 ‘모던클래식’ 시리즈를 새로 선보이며 세계문학전집 시장이 풍성해졌다. 창비 또한 영국, 미국, 중국, 폴란드 등 각 언어권의 주요 단편들을 묶은 ‘창비세계문학’ 선집을 선보였다.
출판계에서는 개념어·키워드 시리즈가 잇따라 선보이며 독자들이 좀 더 쉽고 간편하게 교양서를 접할 수 있도록 했다. 문학동네는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를 선보이며 1차분으로 세한도, 정조의 비밀편지, 왕세자의 입학식 등을 선보였다. 민음사 계열사인 민음인 역시 ‘민음 지식의 정원’ 시리즈를 출간, 1차분으로 철학편 6권을 선보였다. 이는 독자들이 인터넷식 지식검색 등의 영향으로 점점 키워드 중심의 선택적 지식 습득이 늘어난 것에 따른 대응인 것으로 분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