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신생 문학 계간지 <작가세계>(여름호)의 첫 신인으로 「저녁을 위하여」 외 7편의 시를 선보이며 문단에 등단했다. 89년도 신춘문예 최종심에, 90년도 신춘문예 본선에는 올랐지만, 등단을 해야 하는지 어째야 하는지 어떻게 정한 마음은 없었다.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떨어진 후 모교의 오규원 선생께서 시 원고를 몇 편 정리해 가져오라 하셔 갖다드렸다. 어디 문예지에 넣어 주시려나 하는 생각만 품고 묻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고 그런 언제쯤 선생은 다시 신춘문예 넣어보라 하셨다. 그 말에 다음해 90년 신춘문예에 넣었지만 본선까지만 오르고 떨어졌다. 되면 좋았지만 안 돼도 그만이었다. 그 무렵 내 내면의식은 이랬다.
- 생의 최선(최고 또는 광휘)은 사라졌다. 차선이 있을 뿐이다. 최선이 사라진 이상, 무엇이 와도 좋았고, 안 와도 좋았다. 어쨌든 목숨이 살아 있고, 나머지 길을 가야 하니, 가는 동안(숨 쉬는 동안) 무언가 행위를 짓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이 시 쓰기라는 것으로 나에게 일어났을 뿐이다. 내 인생에서 시만큼 착하고 우호적인 것은 없었다. 찾으면 언제나 옆에 있었다. 버리면 버려지고 다시 생각나 들면 들어졌다. 시 쓰기 하나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갔다 여겼는데 여직 떨어져 나가지 않는 이 시라는 것이 이상스러웠고, 안됐고, 예뻐 고맙기도 했다. 연민이 일었지만 혼자 끼적거리고 싶을 때 끼적거리다 가면 그만일 거였다. 등단이고 발표고 책으로 남기고 한다는 것이 이미 나머지, 여분, 덤의 길인 차선을 가는 생에겐 흑백 활동사진 같은 활동극일 뿐. 그때 나는 생에 대한 몰가치, 망각을 완성하는 중이었던 것도 같지만, 몸이 살아 있어 이런저런 일을 짓고 있었으니……
1990년 민음사라는 출판사에서 간신히 밥벌이 하는 중이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며. 말하자면 이 세계의 끝날을 기다리며 받아들이려는 몸태로. 89년 심사를 보았던 선생 중 한 분인 J 선생께 신춘문예 발표 후 얼마 있다 전화를 드린 적 있었는데, 문학과지성사에 내 말을 해놨다고 작품을 가져가 보았으면 하는 뜻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작품을 가져가지는 않았고(무슨 일을 빨리 할 줄을 배우지 못해) 그해가 졸업하던 해여서 강의 나오셨던 김병익 선생께 새해인사 드리러 문학과지성사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지난 마지막 강의 때 자유롭게 아무거나 얘기들을 하라 했을 때,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남학생들이 질문했고, 그 무렵 사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하던 남북교류에 대해서 선생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도 물으셨다. 난 끝날 때쯤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선생님이 창쪽을 보시더니 ‘남산 보고 살아요’ 그러셨다. 그 말에 창밖 남산을 바라보긴 했지만…… 그때 그 문답 선문답 같았을까. 마지막 강의 날의 일화를 기억하며 문학과지성사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었다.
민음사에 같이 계셨던 시인 최승호 주간으로부터 <작가세계>라는 문예지를 알게 됐다. 세계사 출판사에서 나오는 신생 문예지 <작가세계>가 첫 회 신인을 모집한다는 거였다. 나는 내가 밥 벌어 먹는 직장인 민음사에서 나오는 <세계의문학>에 투고하는 것은 싫었고 피하고 싶었다. 그 외 역사와 전통과 권위와 이름 있다는 문예지는 다 남의 것 같았다. 나는 홀로 가리라. 아무도 모르는 새 땅으로. 그런 점에서 신생 문예지의 첫 신인으로 나간다는 게 맘에 맞았다. 아무 기반도 울타리도 없는 신생 문예지로 등단한다는 것은 막힌것 없는 들판에 홀로 나선 것처럼 숨쉬기가 청량하였다. 이렇게 해서 1990년 <작가세계> 첫 신인으로 등단했다. 한국나이로 서른여섯, 늦깎이 시인이라고 불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