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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당신이 아Q다
- 『아Q정전』의 아Q와 나눈 대화
글 손홍규 ㅣ 소설가. 1975년생
소설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톰은 톰과 잤다』 『귀신의 시대』 『청년의사 장기려』『이슬람 정육점』 『서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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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의 아Q와 나눈 대화
잠에서 깨어났는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순간이 있듯이 소설을 읽다 보면 발밑이 아득해지는 순간이 있다. 익숙했던 현실세계가 붕괴되고 그 자리에 낯선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윽고 이 기이한 세계가 사실은 맨얼굴의 현실임을 깨닫게 된다. 루쉰의 『아Q정전』에묘사된 웨이장이라는 마을이 그러하고 무엇보다 아Q가 그러하다. 아Q는 본적과 본명뿐만 아니라 이전의 행적도 알려지지 않았다. 아Q는 따로 집이 없으며 마을의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에서 홀로 산다. 아Q를 직접 찾아가 만나기가 꺼려진 이유는 그가 퍽 자존심이 센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웨이장에서 가장 존경받는 자오 나으리와 첸 나으리를 그다지 존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가 촌뜨기라 비웃는 웨이장 사람들과 달리 도미를 기름에 튀길 때 길게 썬 파를 얹지 않고 잘게 썬 파를 얹는다는 이유로 성안 사람들마저 경멸한다. 이처럼 자존심이 센 사내와 만나는 일은 피곤할 게 분명하므로 자연히 마음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어이 만나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아Q정전』을 읽었던 당대의 중국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심장을 향해 비수가 날아오는 걸 보듯 전율했다고 말했듯이 나를 비롯해-아마 대다수 독자들도 마찬가지로 느꼈을 이 전율의 기원을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갑자기 체포되어 성안으로 연행되어 가기 직전, 그 밤에 그가 머물던 사당으로 찾아갔다. 그는 찾아주는 손님이 드물기도 하거니와 적적하기도 했는지 나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미리 일러두자면 그가 욕설과 비속어를 너무 많이 섞어 말한 탓에 심약한 독자를 놀라게 할 가능성이 있어 되도록 부드러운 말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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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그 유명한 정신승리법에 대해 설명해주시지요.
A 정신승리법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얼 뜻하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루쉰이라는 작자가 그렇게묘사한 모양인데 만일 그게 모욕을 당해도 저항할 줄 모르는 태도를 가리키는 거라면 나에 대해 잘못 알아도 크게 잘못 안 거라오. 내가 건달들에게 억울하게 두들겨 맞고 심지어 변발을 붙잡혀 벽에 머리통을 찧는 수모를 당했을 때 의기양양해서 멀어지는 그놈들의 등짝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 적은 있지요. ‘내가 자식놈에게 얻어맞은 걸로 치자. 요즘 세상은 정말 돼먹지 않았어.자식놈이 아비에게 손찌검을 하고 말야.’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풀렸지요. 이후에는 건달들 이 다시 손찌검을 하면 아예 나는 벌레다, 그러니까 놔 줘라, 하며 악을 썼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놈들이 고분고분 놔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놈들이 가고 난 뒤에는 스스로를 그처럼 낮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하며 자부심마저 생기더군요. 어느 해 마을 축제를 지내던 밤 관례대로 차려진 무대 주변에서 도박판이 벌어진 적이 있지요.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도박판에서 돈을 따 본 적이 없는데 그때는 웬일인지 따고 또 땄지요. 내 인생에서 그처럼 운수 좋은 날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떤 놈들이 싸움을 벌이는 통에 도박판마저 난리판이 되었고 산처럼 쌓였던 내 은전마저 죄다 흩어지고 말았지요. 억울하고 분해서 나 자신을 쥐어박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 뺨을 스스로 두 번이나 때렸던 겁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좀 풀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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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런 사례를 들어 실제로는 패배했으나 정신적으로만 승리했다는 뜻으로 정신승리법이라 일컫는 겁니다. 선생께서는 이 모순을 느끼지 못하셨나요.
A 실제로는 패배하고 정신적으로만 승리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더 할 말이 없습니다만, 대체 패배가 무엇이고 승리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아까 당신은 내가 취한 태도를 가리켜 모욕을 당 해도 저항할 줄 모르는 태도라고 했는데 이것도 사실과는 다릅니다. 나는 계속해서 나를 놀려대는 건달들에게 맞서 싸웠습니다. 저항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저항했으나 물리력에 굴복했을 뿐이지요. 마찬가지로 건달들이 계속해서 내게 손찌검을 할 때 스스로를 벌레라고 낮췄던 건 그렇게 함으로써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간주함으로써 헛된 분노가 솟는 걸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내 뺨을 스스로 때린 이유도 마찬가지라오. 눈치 챘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때까지는 화가 난다고 해서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려 하지 않았지요. 적어도 나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애썼던 겁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승리니 패배니 식의 생각은 가당치도 않아요. 나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눈앞에 다가온 폭력을 피하기 위해, 그 폭력에 의해 완전히 부서지는 걸 막아내기 위해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 뿐이지요. ……내가 겪은 모욕을 내가 정말로 망각했으리라 믿는 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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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뜻으로 하는 이야기인지 이해가 갈 듯 말 듯 합니다. 굴욕적인 태도로만 여겨졌던 정신승리법을 하나의 소극적인 저항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선생께서 왕털보를 깔보아 싸움을 걸었던 건 방금 하신 이야기와는 다른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왕털보만이 아닙니다. 선생은 화풀이라도 하듯 정수암의 젊은 비구니를 희롱했고 선생보다 몸도 작고 힘도 없으며 말라깽이인 샤오디에게싸움을 걸지 않았습니까.
A 물론 그랬지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 의도적으로 내 행적 가운데 일부를 누락시켰고 그런 행동의 의미를 왜곡했습니다. 당신이 누락시킨 것 가운데 하나는 내가 첸 나으리의 큰아들인 ‘가짜 양놈’ 앞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는 바람에 그놈의 지팡이에 얻어맞은 사건이지요. 우리 마을 사람들은 첸 나으리를 존경하지만 양놈 행세를 하는 그 댁의 큰아들은 존경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무도 그 앞에서 까까머리니 당나귀니 하는 식으로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어요. 나는 그렇게 비겁하지 않습니다. 비록 마을의 존경받는 유지의 자식이라 해도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람이라면 난열 번이라도 면전에 대고 욕해줄 수 있어요. 그리고 내 비록 왕털보를 깔보았으나 그리한 이유는 놈의 볼을 뒤덮은 수염이야말로 꼴불견이기 때문이었지 다른 이유는 없었지요.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내가 성안에 가서 돈을 벌어 돌아왔을 때 내 무용담을 가장 진지하게 경청한 자가 왕털보였다는 걸 아실 겁니다. 비구니의 경우로 말하자면 어디 나만 그랬겠습니까? 내가 사는 시대에 비구니는 하찮은 존재이고 함부로 해도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나는 특별히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마지막으로 샤오디의 경우도 복잡합니다. 나는 그때 자오 나으리 댁 하녀인 우어멈에게 함께 자고 싶다는 말을 했다가 곤경에 처해 있었어요. 웨이장의 여인네라면 열한 살짜리 계집부터 쉬어터진 늙은이까지 모두 나를 피했고 술집은 외상을 안 주려 했고 그보다 더 심각한 건 누구도 내게 일거리를 주지 않았단 거요. 나는 배가 고팠고 살기가 막막했지요. 그러다 내 일거리를 낚아채 간 게 샤오디라는 걸 알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녀석에게 분노가 생겼지요. 첸나으리 댁 담 앞에서 녀석과 마주쳤을 때 나는 그냥 욕이나 몇 마디 퍼붓고 끝내려 했어요.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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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A 아니오. 괜찮습니다. 내가 정말로 화가 났던 이유는 내가 샤오디에게 ‘개새끼’라고 욕을 했을때 샤오디가 보인 태도 때문이었지요. 샤오디는 내게 맞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녀석은 외려 겸손하게도 “나는 벌레야. 그럼 됐지?” 하고 꼬리를 사렸지요. 그 순간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형태의 분노가 치솟았지요. 정말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분노였어요. 루쉰이라는 작자는 이 사건을 아주 간단하게 묘사하고 지나갔지요. 우리가 삼십 분 가까이 서로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대결했던 걸 두고 ‘용과 호랑이의 싸움’ 운운하며 비웃었지만, 아마도 그 작자는 삼십 분 동안 나와샤오디의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솟았다 꺼지기를 반복했는지를 몰랐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체 했을 거요. 나는 그때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어요. 당신이 정신승리법이라 일컫는 태도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요. 그때의 기분은 참 더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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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그 말씀이 사실이라 해도 우리로서는 소설의 감춰진 이야기 특히 그 인물의 내밀한 심리를 작가가 의도한 대로 읽어낼 수는 없으며 그게 독자의 의무도 아닙니다. 결국 소설에 드러난 이야기를 통해 유추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독자는 무시해도 상관이 없다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방금 말씀하신 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A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훨씬 뒤에 묘사된 일화를 생각해 보세요. 혁명당이 성안으로들어온 뒤에 웨이장에서 맨 먼저 변발을 정수리로 둘둘 말아 올린 자는 자오 나으리 댁의 수재선생이었고 그 다음이 자오쓰천과 자오바이엔이었으며 그 다음이 바로 나였지요. 그런데 길거리에서 변발을 정수리 위로 둘둘 틀어 올리고 대나무 젓가락까지 꽂은 샤오디를 만난 게 아니겠소.
나는 당장에라도 샤오디를 거머잡고 그 대나무 젓가락을 분질러 버리고 녀석의 변발을 풀어헤치고 싶었지요. 더불어 귀싸대기도 몇 대 갈겨주고 분수도 잊은 채 감히 혁명당이 되려고 한 죄를다스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결국 용서해주기로 했습니다. 그저 성난 눈으로 노려보면서 퉤하고 침을 뱉기만 했지요. 내 기분이 왜 분노에서 용서로 급격하게 변했는지 아십니까? 아마 루쉰은 이 장면에서도 나와 샤오디의 내면을 묘사하지는 않았을 테지요. 다르게 말하자면 내면을묘사하되 핵심은 말하지 않았을 테지요. 가장 중요한 건 왜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는가일텐데, 왜 작가가 그걸 말해주지 않았는지 당신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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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제가 놓친 게 있는 것 같군요. 반드시 묘사되어야 할 부분을 소설의 화자가 모른 척 건너뛰었을 때 과연 화자가 말하지 않은 게 무엇인지에 독자는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할 테니까요. 추측컨대, 아마도 이 장면을 통해 작가는 선생과 샤오디 사이에 존재하는 모종의 동질감을 독자가 읽어내길 바랐던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샤오디는 선생의 거울이었던 거지요.
A 거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판단은 당신 몫이니 저는 그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당신이 좀 더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의미에서 최근의 사건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나는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다 사당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갑자기 폭죽 소리는 아닌 게 분명한 펑! 하는 소리를 들었지요. 나는 곧장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매우 어두웠기 때문에 맞은편에서 도망쳐 오는 사람을 보기는 했으나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지요. 나는 불안했기 때문에 도망치는 사람을 따라 갔습니다. 이윽고 도망치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었고 그제야 샤오디임을 알아보았지요. 어둠 속에서 누구인지도 모른 채 뒤따라 도망쳤는데 그 작자가 샤오디라니! 샤오디는 숨을 헐떡이면서 자오 나으리 댁이 당했다고 말했지요. 샤오디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나도 도망가려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살금살금 자오 나으리 댁 쪽으로 다가갔지요. 흰 투구와 흰 갑옷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옷 상자와 가구들을 들어내고 있더군요. 그걸 보니까 더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발이 떨어지질 않았으니까요. 사당에 돌아온 뒤로 생각해보니 화가 치밀었습니다. 나에게는 반란을 허락하지 않고 자기들끼만 챙겨먹다니. 저는 그때 저를 혁명당으로 받아주길 거부했던 가짜 양놈에게 분노가 치솟았고 혁명당이고 뭐고 반란을 일으킨 놈들 목이 죄다 잘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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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어려운 이야기군요. 그럼 이쯤에서 잠시 다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루쉰의 소설「쿵이지」 에 등장하는 쿵이지는 띵거인 댁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잡혀서 얻어맞아 정강이가 부러졌지요. 한참 뒤에 술집에 다시 나타난 쿵이지는 왜 다리가 부러졌냐는 질문에 넘어져서 부러졌다고 대답하며 마치 그동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전처럼 술을 한 잔 사 마신 뒤 돌아갑니다. 그리고 선생 이야기를다룬 이 소설을 읽고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가리가 크게 감동받았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로맹 가리의 소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아Q정전』의 변주라 해도 좋을 정도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이 소설에는 나치가 몰락한 줄 모르는 한 사내와 그 사내를 여전히 지배하는 한 나치가 등장합니다. 나치가 몰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그 사내는 여전히 자신을 지배하는 나치에게 복종합니다. 나치는 언제든 부활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아예 저항 자체를 포기한 것이지요. 외람된 질문이지만 이 두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선생 자신을 비교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A 쿵이지라는 작자는 좀 압니다. 그 자는 글을 읽은 선비였지만 몰락해서 가난해진 자죠. 쿵이지는 품행이 나보다는 반듯했지요. 한 번도 외상을 미룬 적이 없었고 조무래기들이 달려들어 회향두를 달라고 하면 선뜻 내주었으니까요. 비록 도둑질을 하다 들켜서 앉은뱅이가 되었다 해도넘어져서 부러진 거라고 우길 만큼 자존심도 센 사내였지요. 나는 쿵이지가 왜 아무 일 없었다는듯이 태연하게 행동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쿵이지 혹은 나 아Q, 우리로서는 다른 태도를 선택할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희박합니다. 쿵이지가 사사로이 형을 가한 띵거인을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고소한들 승소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쿵이지가 고소를 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지요. 그럴 경우 쿵이지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마치 지금까지 모욕을 받은 일이 없다는 듯이 구는 것 말고는 별로 없었을 겁니다. 로맹 가리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내는잘 모르겠으나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내는 용기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비겁해서도 아니고 다만 운이 나쁘게 너무나 어마어마한 적과 대결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내는 나치라는 구체적인적과 대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절대악이라는 추상적인 적과 대면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이 질문을 당신께 되돌려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나 혹은 쿵이지와 같은 처지라면 나치의 망령에 굴복한 그 사내의 처지라면 어떤 태도를 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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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이 저를 향해 되돌아오는 순간이 있을 거라 짐작은 했습니다만 막상 질문을 받고 보니 뭐라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선생의 이야기를 읽은 중국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심장을 겨냥해 날아오는 비수 운운했던 것 같습니다.
A 지식인들이요? 그거야말로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신해혁명이 무엇인지도잘 모르고 전제정치가 왜 무너져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혁명당에 관한 소문이 웨이장에까지파다하게 퍼졌을 때 자오 나으리 댁 남자들이 저를 보고 이렇게 말했지요. “아큐 형, 우리 같은가난뱅이 동무들은 괜찮겠지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난뱅이 동무라고? 당신은 나보다는 부자야.”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언제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뿐이지요. 지식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그 문제의 해결방법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옳은 말입니다. 자오 수재와 가짜 양놈은 성안에 혁명당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서로 의기투합을 했고 정수암으로 달려가 황제만세! 만만세! 라고 쓰인 용패를 박살내지요. 그들은 기민하게 어떤 쪽에 붙어야 살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지식인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비수 운운했다면 이들은 자오 수재나 가짜 양놈과 같은 지식인들과 자신들은 여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셈입니다. 저는 그들이 모두 한통속임을 잘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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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에 대한 선생의 증오와 적개심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렇게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실은 그들과 저를 분리하는 시도로 여겨질 수 있음도 이해합니다. 그러기에 선생의 삶을 다룬 이 소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제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면, 자오 나으리 댁이 혁명당에게 약탈당한 뒤 웨이장 사람들은 통쾌해 하면서도 두려워했고 선생 역시 매우 통쾌해 하면서도 두려워했습니다. 이 상반된 감정을 한꺼번에 느낀 이유를 설명해주시지요.
A 거기에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통쾌해 한 이유는 자오 나으리와 같은 자들이 어떤 식으로 이 가난한 마을에서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며 우리가 두려워한 이유는 그처럼 무자비한 방식으로 이뤄진 약탈이 어떤 세상이 도래할 것인지를 암시하는지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혁명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어떤 변화를 목격하고 있으며 우리가 근본적으로 이중적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건 그 변화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필연적으로 우리가 하지 않은 일에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순간이 오리라는 걸 느끼기 때문이지요. 혁명은 언젠가 반드시 일어나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혁명은 느낄 수 없을 만큼 고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달도 없는 어둠 속에서가 아니라 밝은 대낮에 그 일을 이룰 테니까요. 당신에게 저도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루쉰이라는 작자가 이 소설을 쓴 이유가 지식인들을 일깨우고 무지몽매한 중국인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해도 정말 제가 살아온 이야기가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제가 바로 당신이라는 걸 당신은 느끼지 못하십니까?
독자 여러분도 알다시피 얼마 뒤 한 무리의 병사, 한 무리의 경비단, 한 무리의 경찰 그리고 또 다섯 명의 탐정까지 몰래 웨이장에 들어와 어둠을 틈타 사당을 포위하고 문 맞은편에 기관총을 걸어놓았다. 이윽고 아Q는 그들에게 붙잡혀 성안으로 끌려갔고 자오 나으리 댁을 약탈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총살을 당했다. 결국 아Q는 시대에 학살당했다. 아Q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으나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은 ‘사람 살려’였고 비명과도 같은 이 외침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내 귓가를 맴도는 이유는 ‘사람’ 과 사람을 ‘살리는 일’의 엄중함을 되새겨야 할 만큼 우리 시대가 여전히 학살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아Q가 총살을 당하던 순간 무엇을 깨달았을지보다 얼마나 이 세계를 저주했을지를 고려해달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