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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와 기사의 애절한 궁정식 사랑
-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죄수마차를 탄 기사』
글 유희수 ㅣ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1952년생
저서 『사제와 광대』 『서양 중세사 강의』(공저) 『서양의 가족과 성』(공저), 역서 『매너의 역사: 문명화 과정』『중세의 소외 집단: 섹스.일탈.저주』(공역) 『몽타이유: 중세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 『서양 중세 문명』 등
죄수마차를 탄 기사는 마치 사랑의 나라에 아무런 방어가 되지 않은 무기력한 상태로 끌려온 포로처럼 깊은 명상에 빠져듭니다. 깊은 생각 속에서 몰아의 경지에 이릅니다. 그는 자기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이름도 더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자신이 무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그의 기억에서 다 지워집니다. 그것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다 잊어도 되는 한 가지만 빼고는 말입니다. 그는 그 유일한 대상만을 골똘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심심풀이로 읽은 『죄수마차를 탄 기사』는 50줄에 들어선 나를 두근거리고 설레게 했다. 남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훔쳐보며 애달파하고 가슴 졸였으니 시들어가던 감수성이 되살아났던 것일까. 원탁의 기사 랜슬롯이 연인 왕비를 생각하며 무아지경의 엑스터시에 빠지는 장면을 묘사한 이 구절은 처음부터 나를 잡아끌며 유혹했다.
12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크레티앵 드 트루아가 쓴 이 로망은 아서왕의 전설을 소재로 봉건적 궁정 사회에 이뤄진 기사와 주군의 부인 사이의 사랑을 다룬 ‘궁정식 사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아서 왕국 인근에 있는 고르 왕국의 왕자 멜리어건트에게 인질로 끌려가는 아서왕의 부인 귀네비어를 그녀의 정인 랜슬롯이 왕 몰래 추격하며 구출하는 모험담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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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슬롯은 추격 도중 고르 왕국의 기사들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말을 잃어 혼자 걸어간다. 그때 난쟁이가 모는 죄수마차를 만난다. 죄인을 공시하는 기능과 죄수를 처형장으로 수송하는 기능을 하는 이 죄수마차에 타는 사람은 그의 재산과 권리, 명예를 상실하는 큰 치욕을 감수해야 한다. 랜슬롯은 왕비 일행이 간 노정을 알아내어 빨리 그녀를 구할 일념으로 난쟁이의 요구대로 죄수마차에 타는 치욕을 감수한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위험과 모험을 겪은다음, 고르 왕국의 궁정에서 랜슬롯과 멜리아건트사이에 결투가 벌어진다. 숱한 군중이 운집하고 고르 왕국의 왕 배드마구와 연인 귀네비어가 탑 꼭대기에서 이를 참관한다. 지옥 같은 칼 다리를 건너느라 중상을 입은 랜슬롯은 탑 위에 있는 귀네비어를 발견하고 이에 용기를 얻어 멜리아건트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는다. 배드마구는 귀네비어에게 자기 아들을 살려줄 것을 요청한다. 왕비도 이에 동의한다. 이에 랜슬롯은 공격을 중지한다. 1년 후 아서왕의 궁정에서 재대결한다는 조건으로 랜슬롯에게 왕비를 잠정적으로 돌려보낸다.
그 뒤 멜리아건트는 랜슬롯을 꾀어 외딴 감옥에 감금시킨다. 1년 뒤 멜리아건트는 아서 왕궁에서 무적의 기사 랜슬롯을 피해 그의 대리인과 대결을 할 셈이었다. 그러나 랜슬롯이 어딘가에 감금된 것을 알아차린 멜리아건트 여동생의 도움으로 랜슬롯은 풀려난다. 결국 아서 왕궁에서 열린 재대결에서 랜슬롯은 배신자 멜리아건트의 목을 베어버린다. 이리하여 랜슬롯은 사랑도 얻고 명예도 회복하게 된다.
간통을 엄하게 처벌하던 12세기 봉건적 기독교 사회에서 기사와 귀부인의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사랑의 모험을 다룬 이 로망은 자체의 고유한 아름다움뿐 아니라 작가의 유고작『그라알 이야기』에 버금하는 명성과 영향력으로 크게 주목받는 중세 기사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 『죄수마차를 탄 기사』는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번역되어 <대산세계문학총서>로 출판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