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형의 작가 최인석 “사람 이상의 가치는 없다”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이어쓰기 가을하다 사람의 별 다시 소나기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 헤살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아버지의 방,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별을 가슴에 품고 평생 연필로 시를 쓰다 괜찮다 괜찮다! 가난한 청산도, 고난도, 절망도
가장 문학적인 인물, 여성 내 시의 세 가지 신비 숨은 집 비평과 독서
“격동기, 단절과 극복의 언어”를 남긴 8명의 문인 재조명
바다와 디아스포라의 도시, 부산 광복로
글 손택수 ㅣ 시인, 1970년생
시집 『호랑이 발자국』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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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를 이 도시로 이끈 것은 담양의 대나무였다. 플라스틱 제품이 아직 일반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 대바구니나 소쿠리 같은 제품들은 어딜 가나 환영을 받았다. 할머니 손을 잡고 내가 그 먼 길을 따라나선 것은 주먹만한 눈깔사탕이 한 몫 했을 것이다. 한나절 내내 입에 물고 있어도 다 녹지 않던 사탕 맛에 홀려 나는 물집이 잡히는 고통도 마다 않고 기꺼이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사탕만으로 어찌 낯선 도시의 이물스러움을 다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인가.
시골 아이를 강력하게 흡입한 것은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건축물들과 질리는 속도감에 있었다. 그때 내겐 공간이동이 시간이동과 같아서 전근대의 농경문화가 순식간에 근대로 전환되는 경이로 다가왔을 것이다. 거기엔 일종의 시차와 균열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리적 이동의 결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의 시차가 도시 내부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산복도로에서 바다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싱싱한 공포감을 잊을 수가 없다. 당장에 엎질러져 삼켜버릴 듯이 넘실거리는 바다 앞에서 하마터면 나는 주저앉을 뻔하였다. 그 바다로부터 끝없이 바람이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은 내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체취와 뭐라 단정할 수 없는 미묘한 기운들로 술렁이고 있었다. 도시의 신화적 차원이랄까, 보도블록을 뜯어내면 보일 것 같은 바다의 들숨 날숨을 골목골목 깊숙이 호흡하며 사람들은 여느 도시와는 전혀 다른 호흡 속에 생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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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다와 근대 도시를 한 장소에서 경험한 것은 광복로 부근이다. 기획된 근대도시가 대체로그렇듯이 속도와 스펙터클의 거리는 공간에 대한 신체적 지각을 어렵게 한다.
공간 소외를 망각케 하는 화려한 이미지들의 범람과 소음, 쉴 틈을 주지 않고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들이 이미 그곳의 새로운 지신(地神)으로 등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테크놀로지에 의해서도 복제될 수 없는 장소감은 어느 도시에나 있기 마련. 이 도시가 나의 근육과 살갗과 뼈에 각인된 것은 유랑을 통해서였다.
광복로에서 나는 신문배달을 하는 아이였다. 산복도로 마을들과 그 아래 헌책방이 있던 보수동과 부평시장 국제시장을 통과하여 지금의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남포동 거리를 지나 건너편의 자갈치와 충무동, 완월동까지를 아우르는 넓은 지대가 나의 관할 구역이었다. “부두를 뒤에두고 서편으로 곱들어서 전찻길 난 대로만 큰길로 걸어갔으나, 좌우편에 모두 이층집이 쭉 늘어섰을 뿐이요, 조선집 같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눈에 뜨이는 것이 없다”(염상섭, 「만세전」)고 한 이곳은 식민지 근대가 고스란히 실험된 공간이었으며 “LST에서 걸어 나온 피난민은 헛되이 바다 앞에 섰네. 이 무지한 바다 앞에. 백치와 같은 짐승 앞에. 그리고 이 바다에서 LST를 내린 한 식구들이 종적 없이 사라진 실종의 책임자가 누군지 모르는 채로 말일세”(최인훈, 『하늘의 다리』)처럼 전쟁의 상흔을 벽화로 아로새긴 곳이었다. 그 길에서 나는 헌책방을 순례하는 재미에 빠졌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작사인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를 추억하듯 즐비한 영화관의 아늑한 어둠에 중독되어 있었다. 늘 다른 곳으로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 채 선원수첩을 구하기 위해 부둣가를 떠돌던 그 시절 광복로는 나의 자전축이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이곳은 우리 문학의 뜨거운 현장이었다. 아마도 부두 노역을 했을 김종삼은 음악다방을 전전했을 것이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김수영이 아내 김현경의 종적을 수소문하다가 만취한 술집도 이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작곡가 윤용하가 가곡 <보리밭>을 만든 비원다방과 이중섭이 은지화를 그리던 금강다방, 김동리의 「밀다원시대」의 배경이 된 밀다원다방은 비록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으나 그들이 거기에 존재했다는 기억은 이야기와 노래로 남아 지속하고 있었다.
한참 문학적 치기로 달떠 있던 소년 시절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 쭈그려 앉아 듣던 야사들은 철부지 소년문사를 턱없는 흥분으로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가령, “1936년 청마 유치환 선생이초량에 사시면서 사진관 기사로 있을 때 일 거라. 한번은 이상이 청마 선생을 보러 왔는데 술자리에 같이 동인들도 불러내었거든. 박영포 염주용 장하보 등이 그들이지. 그때 이상이 취했는지부산 시인들을 좀 비하했다카네. 얼마 전에 동인지를 받아 보았는데 청마 형 거 빼곤 종이 값이아깝다고 말이야. 그 순간 박영포(朴永浦)가 이상의 멱살을 잡고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이가. 자슥이 좀 잘 나간다고 여가 어딘데 거드름을 피우고 지랄이고!” “진짜요? 참말입니꺼?” 전설 같은 실화 앞에서 그때 나는 얼마나 통쾌해했던가. 전쟁의 한복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시인 전봉래의 비장한 이야기는 또 얼마나 가슴을 후벼 파는 통증으로 다가왔는지 모른다. ‘원고용지 따위에 쓰는 그러한 유의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고귀하고 가장 최후의 유작이라고 일컬을 만한 죽음이라는 작품을 쓴-동란 이후 최초의 시인이자 최후의 시인’(김종삼, 「피란 때年度 전봉래」)에 관한 회고는 시간의 퇴적층에서 발굴된 케케묵은 에피소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하중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록이었으며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서 겉멋에 흠뻑 취해있던 애송이 문학소년의 정신을 후려치는 하나의 죽비였다.
광복로는 지금 ‘문화특구’답게 매끈해진 피부 깊숙이 마멸된 기억들을 호출하는 데 뒤늦은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망각의 먼지를 털고 전시해 놓은 사진과 관광 안내 책자 따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안내문들이 기념비의 형식으로 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전혀 주변의 경관과 교감하지 않는 형식들이 갖는 생뚱맞음에 한숨이 나오기도 하나 자신의 공간을 기억하고자 하는 노고를 마냥 힐난할 수 없다. ‘김동리 밀다원시대 문학제’나 ‘조선통신사 축제’ 같은 공간 스토리텔링이 보다 더 풍요로워질 때 치매에 걸린 장소는 마침내 몸을 통해서 읽히는 시적 거주의 텍스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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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 시경(詩經)
광복동 맞은편 영도다리로 간다. 공식적인 이름은 ‘영도대교’. 이 나라 사람들은 버젓이 있는 호적상의 이름을 두고 굳이 ‘영도다리’라는 애칭으로 부르길 좋아하였다.
대교라는 으리으리한 한자어 대신 돌다리 징검다리처럼 정겨운 말로 바꾸어 부를 때 장소는 사물성을 벗어나서 어떤 근원적인 친밀감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민중들은 식민지시기 근대공학과 과학기술의 요란한 선전물로서 다리 상판을 로봇처럼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제국의 위용에 대한 감탄과 거부를 일상의 영역 속에서 그렇게 순치시켜 받아들였던 것이 아닐까.
‘대교’가 아닌 ‘다리’로서 영도다리는 이 땅의 근대를 온몸으로 기록한 필경사다. “벌렸다 다물고 다물었다 벌리는 / 강철 도개교 입발 새에 / 낡은 포구(浦口)의 이야기와 꿈은 / 이미 깨어진 지 오래”(임화, 「상륙」)라고 증언하던 비탄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끝내 헛되이 숨져갈 목숨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김남조 「목숨」)에 대한 실존을 벼리는 곳이었다. 시인 김남조는 1953년 정월에 첫 시집 『목숨』을 들고 이 다리를 찾았다고 한다.
십여 년 전 시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목숨이 목숨일 수 없는 처참한 전란 시절이었지요. 다리 아래 무섭게 일렁이는 검은 물굽이에 휩쓸려 어느 순간 소멸돼버리고 싶다는 충돌이 일었습니다. 일종의 극지 체험이 아니었나 싶어요. 뭐랄까, 그 기막힌 현실 속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시인의 어떤 불구성을 느꼈다고나 할까,세상과 시를, 서로 맞지 않는 다리 삼아 걸어가야 하는 숙명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시인처럼 숱한 사람들이 영도다리를 오고 갔다. 그리고 시인처럼 도저한 절망 끝에 무슨 말인가를 수줍게 긁적거리기도 하였다. 철제 난간과 교각에는 그런 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고백, 누군가의 생일과 합격을 축하하는 말, 우정의 맹세, 몇 년 뒤 여기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 무엇인가에 대한 기원의 말들. 저자에 떠도는 백성들의 민요를 채록해 놓은 경전(經典)이 시경(詩經)이라면 영도다리야말로 삶과 시를 가장 근접케 한 경전일 것이다. 논란 끝에 다행히 보존이 결정된 다리 곁에서 철거를 부추겼던 롯데백화점이 못마땅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도다리는 오늘도 노구를 마다않고 기꺼이 다리 한쪽을 들어 올리고 있다. 추억의 힘은 이렇게 유전할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도시
어떤 공간은 명사이면서 동시에 형용사다. 명사가 지닌 뜻 넓이를 훌쩍 뛰어넘는 고유의 체취와 분위기 그리고 다채롭게 분광하는 소리의 뉘앙스로서 확고부동한 기하학적 중심을 진동시킨다. 엘리아데의 이야기를 따르자면 체험된 장소의 이미지는 개념이 다룰 수 없는 모든 잔여를 향해 열려있다. 내게 부산은, 광복동은, 뭐라 개념화할 수 없는 형용사를 특산품으로 늘 진동하는 곳이다. 이 도시는 무엇보다 간단없는 운동감을 그 리듬으로 하고 있다. 리듬은 형식화된 제도들을 경계하면서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변경들을 새로운 중심들로 명명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타자들과 이질적인 것들을 옹호하고 응원하는 항구의 윤리학이 탄생하는 자리가 이곳이다.
내국 디아스포라로서 내가 서른 해를 보낸 이곳, 부산(釜山)은 가마솥(釜) 형국이다. 멀리서 보면 산과 산 사이에 수평선이 걸려 있어서 마치 바닷물을 퍼 담고 소금을 굽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여기서 한 점 소금 결정이 되고 싶었다. 대나무로부터 왔으니 기왕이면 죽염이어도 좋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