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형의 작가 최인석 “사람 이상의 가치는 없다”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이어쓰기 가을하다 사람의 별 다시 소나기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 헤살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아버지의 방,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별을 가슴에 품고 평생 연필로 시를 쓰다 괜찮다 괜찮다! 가난한 청산도, 고난도, 절망도
가장 문학적인 인물, 여성 내 시의 세 가지 신비 숨은 집 비평과 독서
“격동기, 단절과 극복의 언어”를 남긴 8명의 문인 재조명
시2
이성미 ㅣ 시인, 1967년생
시집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칠 일이 지나고 오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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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지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것 같다. 그사실을 잊을 때가 많은데, 먼지라는 단어는 참으로
먼지스럽게도 강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런 먼지라는 단어를 빛나고 단단한 것으로 새롭게
불러보고자 이 시를 쓴 것이 아니다. 이 시는 내가 좋아하는 먼지라는 단어로 먼지놀이를 한 것이다. 먼지는 늘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무언가를 환기하고, 나는 먼지를 볼 때마다 ‘earth to earth, ashes to ashes, dust to dust'라는 장례기도를 떠올리지만, 그뿐. 너무도 먼지스럽게 먼지는 잊혀 진다. 이 시 역시 먼지처럼 환기하고 먼지처럼 잊혀 지면 좋을 것이다.
접힌 하루
하루가 접혀 있었다. 금요일에서 일요일로 걸었던 것이다. 토요일은
접힌 종이 속에 있었다.
땅 밑에 녹색 어둠이. 어둡고 기름진 흙에서 검은 식물들이 자랐
다. 종이 사이에. 하루가 있었다.
금요일 아침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금요일 아침을 탁자 위
에 둔 채 탁자 앞을 떠났다. 걸었다. 딴 생각을 했을 것이고. 딴 곳을
걸었을 것이다.
일요일 오후의 희미한 공기들이 나를 둘러쌌다. 나무에는 일요일
오후의 잎들이. 잎들에는 일요일 오후의 햇빛이. 일요일 오후의 바람
이 잎들을 흔들었다. 일요일의 뿌연 빛 속에서 내일의 조그만 전구들
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
나는 일요일 오후를 통과하고. 일요일 오후의 속도로.
앞으로 걸었다. 딱딱해지는 저녁 공기. 저곳은 월요일의 검은 우산
을 파는 곳. 도착하면 우산을 검게 펴야지.
밤이 되었고. 나는 탁자 앞으로 돌아왔다. 월요일이 오기 오 분
전이었을 것이다. 탁자 위에
금요일 밤이 놓여 있는 걸 보았다. 접힌 종이가 펴지면서.
네 번째 꽃잎과 여섯 번째 꽃잎 사이에 다섯 번째 꽃잎이.
어디로 숨었다가 나타났나.
일요일 오후의 증거들이 풍선처럼 터져버렸다. 토요일 0시를 알
리는 괘종시계가 울렸다.
토요일이 빠닥빠닥한 파란 깔개를 폈고. 그 위에 토요일의 증거
들을 소풍 도시락처럼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먼지의 도리
자고 일어나면 어제 먼지를 치운 자리에 먼지가 또 있다.
내가 매일 먼지를 물고기 알처럼 낳고 있나.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조금씩 내 몸이 먼지로 변하고 있나.
어제가 부스러져 먼지가 되었나.
그렇게 오늘도 먼지로 부스러지겠지. 오늘이 끝나면
오늘의 나도 먼지로 부스러지겠지. 나는 하루만큼
먼지였고.
먼지이다가.
아주 먼지가 되겠지, 너처럼.
죽음 위에도 먼지가 쌓이겠지.
고요 위에도 먼지가 내려앉겠지.
그릇을 닦고 먼지를 버린다. 먼지가 먼지를 치우는 일은 먼지답고.
먼지답게 하루를 보내는 건 먼지의 도리.
어제의 먼지와 오늘의 먼지를 구별할 수 있다면. 먼지를 셀 수 있
다면.
나는 먼지를 헤어봅니다. 먼지 하나에 어제와, 먼지 둘에 그저께
와, 먼지 셋에 그끄저께와, 국민학교 친구 이름을 붙이며 먼지를 헤
어봅니다.*
먼지에 오늘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일부를 내일의 먼지에게 넘겨준다. 이를테면 먼지의 씨앗을.
먼지의 씨앗은 물론 먼지이고.
이토록 먼지스러운 일을 하는 것 또한 먼지의 도리.
하루가 부스러지는 틈틈이 나는 먼지. 먼지. 되뇌었다. 먼지가 먼
지가 아닌 것으로 들릴 때까지. 먼지의 색과 냄새가 사라지고, 먼지
와 발음이 같은 무엇이 생겨날 때. 새로운 먼지에게 물어야지.
시간 밖으로 밀려나면 기분이 어때.
*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의 시구를 변용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