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형의 작가 최인석 “사람 이상의 가치는 없다”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이어쓰기 가을하다 사람의 별 다시 소나기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 헤살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아버지의 방,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별을 가슴에 품고 평생 연필로 시를 쓰다 괜찮다 괜찮다! 가난한 청산도, 고난도, 절망도
가장 문학적인 인물, 여성 내 시의 세 가지 신비 숨은 집 비평과 독서
“격동기, 단절과 극복의 언어”를 남긴 8명의 문인 재조명
별을 가슴에 품고 평생 연필로 시를 쓰다
글 박동규 ㅣ 박목월의 장남, 평론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39년생
논문집 『한국현대소설의 비평적 분석』 『전후 대표작품 분석』, 산문집 『별을 밟고 오는 영혼』 『당신이 고독할 때』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 등
박목월 ㅣ 시인. 1915~1978년
시집 『산도화』 『난·기타』 『청담』 『경상도의 가랑잎』 『무순』 『사력질』, 동시집 『산새알 물새알』 『초록별』 『사랑집』,
수필집 『구름의 서정』 『토요일의 밤하늘』 『행복의 얼굴』 『보랏빛 소묘』, 산문집 『박목월 자선집』 등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37년이 되었다. 어쩌다 아버님과 살아오면서 겪었던 나의 이야기들을 글로써서 발표해 와서 기억의 창고가 한정적인 것이라 별로 새롭게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듯하다. 그래도 박목월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자식인 나에게 ‘아버지 박목월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청탁하여 거절할 수 없어서 마감시간을 연장 받아가며 아버님에 관한 기억들을 살려보았다.
1. 아버님의 등에 업혀서
내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였다. 나에게 그때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아버님은 어느 토요일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내일 불국사로 직장 사람들 모두 가족과 함께 야유회를 가게 되었다고 하셨다. 아버님은 야유회 갈 차비를 하라고 하시고 밖으로 나가버리셨지만 어머님은 난감하기만 했다.그 당시 우리 집은 왕릉 옆 조그마한 한옥이었다. 이 집은 직장에서 내어준 관사였다. 그리고 우리집 앞에는 텃밭이 있었다. 이 텃밭에 어머니가 강낭콩을 심어서 살림에 보태며 살았다.
아버님은 그때 직장에서 실수를 해서 월급에서 얼마를 변제하여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그런 생활 속이라 어머니는 내게 입혀줄 옷도 변변한 것이 없었고 신발조차 사줄 형편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장에 나가 광목 두 마를 끊어왔다. 그날 밤 늦게 내 모자와 신발을 재봉틀로 만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홑겹으로 된 광목 덧신을 신고 모자를 쓰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지금은 경주에서 불국사 가는 길이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지만 그때는 왕모래를 깔아놓은 비포장도로였다. 덧신을 신고 걸어가다 보니 발바닥이 아팠다. 굵은 모래를 밟을 때마다 발바닥이 쓰렸지만 데려가지 않을까봐 아프단 소리도 못했다. 그날 불국사에서 점심을 먹고 놀다가 석굴암도 올라갔다. 해가 질 무렵 모두 불국사 문 앞 잔디밭에 모였다. 나는 어머니 앞에 앉아 있었다. 아버님이 내 곁에 앉으시더니 “야 신발이 왜 이러니?” 하셨다. 내 신발이 붉은 신발이 되어 있었다. 아버님은 신발을 벗겼다. 그리고 발바닥을 보셨다. 발바닥은 갈래갈래 찢어져 피가 나오고 있었다. 광목 신발 탓이었다. 아버님은 “얼마나 아팠나” 하시면서 “아프다고 그러지” 하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사람들은 줄을 지어 모두 경주를 향해 떠나갔다. 아버님은 “조금 있다가 가자”고 하시면서 사람들이 다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곧 어두워졌다. 그제야 아버님은 나에게 아버님의 등에 업히라고 하셨다. 나를 등에 업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 양편에 하얀 벚꽃이 마치 흰 구름을 잡아다 걸어놓은 것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서 아버님의 등에 얼굴을 대어보니 땀이 나서 축축하였다. 나는 몇 번이나 걸어갈 수 있다고 했지만 아버님은 “괜찮다”하면서 등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밤은 깊어갔고 벚꽃나무 가지 사이로 달이 보였다. 아버님은 몇 번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쉬었다가 다시 업고서 밤이 깊어서야 겨우 집에 돌아왔다.
내가 이 불국사 야유회를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아버님의 등에서 배어 나온 땀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시를 쓰시면서 현실의 삶을 더러 잊어버려 어머님을 힘들게 하신적이 수도 없이 많지만 결코 우리 가족을 잊은 적은 없었다. 어머니의 말처럼 시가 떠오르지 않을 때면 며칠씩 ‘미친 사람처럼’ 고향 산하를 헤매고 다녀도 아버님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인간다움의 아름다움을 자연과 바꾸지 않고 사셨던 것이 아닌가 기억한다.
2.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내가 자라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전쟁이 나서 한 겨울에 대구로 피난을 갔다. 그 다음 해 나는 아버님이 다니시던 계성중학에 들어갔다. ‘피난연합중학’이 있었는데 이 학교의 교사가 천막교실이었다. 눈이 많이 내려 교실이 무너져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버님은 나를 계성학교로 가게 하셨다. 그때 계성중학 역시 육군 병원이 본관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학년 때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가 담장 옆 가교사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이학년이 되고나자 운동장 끝에 지어진 천막교실로 옮겨 공부를 했다. 이학년이 된 어느 날 저녁이었다. 온 가족이 밥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내가 천막교실로 옮겨갔다고 하자 “내가 다닐 때는 본관 앞 계단에 앉아 있으면 먼 고향집이 다 보였는데”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아버님은 나를 통해서 당신의 소년시절을 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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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사연을 듣고 아버님을 데리고 식물을 키우고 있던 온실에 데리고 가 거기서 겨울 한 철을 보내게 해 주었다고 한다. 밤이면 온실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이부자리를 펴고 잠을 잤는데 유리창 너머 하늘을 보면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고 했다. 그 별들은 때로는 친구가 되고 때로는 이불이 되었다고 했다. 그 별들이 가슴에 들어와 이야기하는 것을 글로 쓰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밤에 밖으로 나와 나무에 손칼로 시인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리고 중학교 삼학년 때 개벽사에서 발행한 《어린이》에 「통딱딱 통딱딱」을 발표하고 《신가정》에 「제비맞이」를 발표하게 된 것이다. 「송아지」도 그 무렵에 발표한 동시이다. 내가 아버님에게 들은 이 이야기의 결말은 “내가 별을 가슴에 품었기에 시를 쓰게 되었지, 딴 생각을 했으면 다른 사람이 되었겠지”라는 말이다. 아버님의 별과의 인연은 「맑은 노루에 비친 구름」이란 시로 승화된 듯 하다.
아버님은 구름이 내려와 얹힐 수 있는 마음의 세계를 시의 첫 출발로 삼지 않았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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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에 어린 날 가장 무서웠던 소리는 아버님이 밥상에 앉아 부러진 면도날 한쪽을 잡고 연필심 깎는 소리였다.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나면 아버님은 “상 닦아줘요”하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시곤 했다. 이 말은 바로 아버님이 시를 쓰시고 싶다는 뜻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가 되어서야 밥상이 아닌 앉은뱅이 책상으로서의 상이 아버님을 위해서 마련되었다. 나는 이미 중학생 때 아버님이 동네 목공을 불러다 앉은뱅이 책상을 마련해 주셨다. 그런데 정작 아버님은 내가 고등학교에 가서야 옻칠을 해 윤이 반짝 나는 밥상을 시를 쓰는 책상 대신해 밥상이 아닌 책상으로 쓰게 되었다. 이 상이 방에 놓이면 나는 얼른 내 방에 가 있어야 했다. 숨소리조차 조심하게 되었다.
아버님은 평생을 연필로 시를 쓰셨다. 아버님의 창작버릇이었다. 이 연필 깎는 소리는 어떤 소리보다 우리 아이들을 가슴 조이게 했다. 어머니는 집에서 나는 어떤 소리도 용납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이 생겨나 안방에 온 가족이 모여 재미있는 프로를 보다가도 아버님이 아버님 방으로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는 뿔뿔이 제 방으로 가서 숨을 죽여야 했다. 왜 아버님은 고집스럽게 연필을 깎아 시를 쓰셨을까하는 생각을 지금도 해보곤 한다. 이는 아버님의 시를 대하는 마음과 정신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변하지 않는 연필심의 영원한 흔적처럼 시가 그런 생명체로 살아있기를 기원하고 연필심을 다듬으면서 심령의 세계를 예리한 상상의 창끝으로 혼을 불러오게 하는 제의(祭儀)적 투신(投身)이 이런 소리를 우리가 듣고 자라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벌써 37년이나 지나갔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나 자신에게서이기 때문에 아버님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지만 못난 자식도 자식이기에 감히 이 이야기를 글로 옮겼음을 밝혀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