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시의 메아리를 걷다

현재 진행형의 작가 최인석 “사람 이상의 가치는 없다”

일생의 근심을 끌어올리는 시간

아는 진실과 모르는 진실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이어쓰기 가을하다 사람의 별 다시 소나기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 헤살

투명 언론인의 정체

바로 당신이 아Q다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우연’과 ‘무심함’을 담는 기억의 방부제

여승

소설가, 평론가, 아동문학가, 편집자 김이구

미호 강변에 꽃피운 서원교육에 관한 보고서

바다와 디아스포라의 도시, 부산 광복로

아버지의 방,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별을 가슴에 품고 평생 연필로 시를 쓰다 괜찮다 괜찮다! 가난한 청산도, 고난도, 절망도

가장 문학적인 인물, 여성 내 시의 세 가지 신비 숨은 집 비평과 독서

“격동기, 단절과 극복의 언어”를 남긴 8명의 문인 재조명

활력 사라진 문단, 해외거장 작품과 외국 대중소설이 메워

‘돈’에 대한 내숭에 던진 돌직구

살아가야 할 자와 죽어가는 자 사이의그 아득한 거리

방물장수와 보부상을 몰아낸 신문·잡지의 광고

《현대문학》 창간 전후

무장해제의 기억들

비를 맞는 개구리 눈빛

세기적 추녀의 연애담에 오버랩된 30년전 한국사회

시대의 갈등과 비극의 붉은 얼룩을 옮기다

왕비와 기사의 애절한 궁정식 사랑

NEW BOOKS

재단소식

단편소설

그늘과 그림자

글 김미월 ㅣ 소설가, 1977년생
소설 『서울 동굴 가이드』『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여덟 번째 방』 등

▲ 김미월 ©

선두에서 달리던 1호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2호 차도 따라 멈추고 신이 타고 있는 3호 차도 곧 섰다. 신은 앞서 종종 그랬듯 앞차의 누군가 용변이 급했나보군 하고 짐작했으나 기다려 봐도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없었다. 3호 차 운전사인 바트촐롱이 무전기를 켜고 앞차 운전사와 무어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차 안에 난무하는 ㅋ, ㅌ, ㅊ, 몽골어 특유의 거센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신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앞에 한 시간 전과 똑같은, 아니, 두 시간 전이나 세 시간 전과도 똑같은,앞이나 뒤나 옆이나 똑같은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흘째 보아온 풍경이었다.

꼬박 사흘을 달렸다. 그러나 체감하기에는 지구를 반 바퀴쯤 돈 것 같은데 실제로 그들이 주행한 거리는 대략 90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로 왕복 다섯 시간이면 끝날 여정을 사륜구동 랜드 크루저로 내리 2박3일 달려온 셈이었다. 평균 속력이 시간당 겨우 40킬로미터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바트촐롱이 이르기를 눈으로 보기에는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초원이라 해도 실상은 순 자갈밭 비포장길이라 속력을 내는 게 불가능하다던가. 과연 신이 사흘 동안 운전석 너머로 줄곧 지켜본 바 계기판 속도계의 바늘이 숫자 60을 넘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 멈춘 거지? 여기가 어디요?”
그 와중에 잠에서 깬 조수석의 오 작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은 저도 차가 멈춘 것을 이제막 깨달았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 후 덩달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옆자리에앉아 있던 몽골어 통역사 터그스가 재빨리 나섰다.
“앞차가 길을 잘못 든 것 같아요.”
터그스가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바트촐롱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1호 차 기사와 2호차 기사도 그새 밖으로 나와 있었다. 세 사람은 1호 차 보닛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팔을 들어 이 방향 저 방향을 가리키기도 하며 대화에 열을 올렸다. 신은 새삼 창밖으로 목을 빼고 자신들 일행이 방금 달려온 평원을 돌아보았다. 길을 잘못 들다니, 어떻게? 도로는커녕 이정표도 하나 없이 오직 지평선만 보고 달려야 하는 이 광막한 초원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길을 제대로 찾아간다는 것도 신기한 노릇이지만 길을 잘못 든다는 것 또한 신통하기 이를 데 없는 일 아닌가.
“몽골 운전사들은 머릿속에 구글 맵이 들었나 봐. 안 그래요, 신 선생?”
오 작가도 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내 구글 맵은 아예 먹통인데 말이야.”
그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흔들어 보였다. 몽골로 출국할 때 인천공항에서 큰마음 먹고 무제한 데이터 로밍을 신청해온 보람도 없이 이곳에서는 LTE고 4G고 뭐고 데이터 연결 자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스마트폰 화면에 수시로 ‘통화권 이탈’ 경고 메시지가 뜨는 판국이니 데이터는 언감생심, 어쩌다 통화라도 되면 감지덕지였다.
“먹통? 먹통이 뭐예요?”
아니나 다를까, 터그스가 눈을 빛냈다. 올해 스무 살이 되었다는 그녀는 호기심이 많고 학구열도 높아 한국 사람과 대화하다가 잘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하든 요령껏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확인하든 좌우지간 반드시 짚고 넘어갔다. 오 작가가 원체 말하기 좋아하고 남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데 재주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요 사흘 동안만 해도 신비롭다, 감칠맛, 근사하다, 시시콜콜 등 많은 단어들이 그의 입을 거쳐 한결 말랑말랑해진 상태로 터그스에게 가지 않았던가.
“먹통, 작동을 하지 않아 아무 반응이 없는 기계, 먹통.”
터그스는 음식물을 꼭꼭 씹어 삼키듯 방금 배운 새 단어를 야무진 말투로 되뇌었다. 그때 누군가 신이 앉은 쪽의 차창을 두드렸다.
“자자, 다들 내립시다!”
1호 차의 황 교수였다. 마침 근처에 개울도 있겠다, 기왕 정차한 김에 이른 저녁을 먹고 좀 쉬었다 다시 출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오후 다섯 시였다. 남자들이 차량 뒤편의 짐칸에서 휴대용 가스버너와 코펠과 햇반과 부식 상자 들을 끄집어 내렸다. 신은 바닥이 편평한 쪽을 골라 돗자리를 펴면서 오늘도 밤 열 시나 되어야 숙소에 도착하겠구나 생각했다. 답사 일정표에는 매일 밤 아홉 시에 취침하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그것이 지켜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항상 예정보다 조금 늦거나 많이 늦었다. 누군가 불평이라도 하면 다른 누군가 얼른 대꾸했다. 뭘 기대해요? 여긴 몽골이라니까요.
여기는 몽골이었다. 신이 지금껏 한 번도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고 갈 일이 생기리라고는더더욱 생각해본 적 없는 나라.(중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5년 여름호 지면을 통해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