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시의 메아리를 걷다

현재 진행형의 작가 최인석 “사람 이상의 가치는 없다”

일생의 근심을 끌어올리는 시간

아는 진실과 모르는 진실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이어쓰기 가을하다 사람의 별 다시 소나기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 헤살

투명 언론인의 정체

바로 당신이 아Q다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우연’과 ‘무심함’을 담는 기억의 방부제

여승

소설가, 평론가, 아동문학가, 편집자 김이구

미호 강변에 꽃피운 서원교육에 관한 보고서

바다와 디아스포라의 도시, 부산 광복로

아버지의 방,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별을 가슴에 품고 평생 연필로 시를 쓰다 괜찮다 괜찮다! 가난한 청산도, 고난도, 절망도

가장 문학적인 인물, 여성 내 시의 세 가지 신비 숨은 집 비평과 독서

“격동기, 단절과 극복의 언어”를 남긴 8명의 문인 재조명

활력 사라진 문단, 해외거장 작품과 외국 대중소설이 메워

‘돈’에 대한 내숭에 던진 돌직구

살아가야 할 자와 죽어가는 자 사이의그 아득한 거리

방물장수와 보부상을 몰아낸 신문·잡지의 광고

《현대문학》 창간 전후

무장해제의 기억들

비를 맞는 개구리 눈빛

세기적 추녀의 연애담에 오버랩된 30년전 한국사회

시대의 갈등과 비극의 붉은 얼룩을 옮기다

왕비와 기사의 애절한 궁정식 사랑

NEW BOOKS

재단소식

나의데뷔작

그때 내가 싼 똥은

글 천운영 ㅣ 소설가, 1972년생
소설 『바늘』『명랑』『그녀의 눈물사용법』『엄마도 아시다시피』『잘 가라 서커스』『생강』 등

▲ 천운영 © 운영자

똥 꿈을 꾸었다. 방 안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아 똥 을 쌌다. 싼 똥을 손으로 만졌다. 만지는 느낌이 참 좋았다. 개운하고도 기분 좋은 꿈이었다. 반가운 소식이 들려올 것 같았다. 당선을 예감했다고 할까. 예감의 근거라는 게 투고작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고작 꿈에 나온 똥이라니 싶겠지만, 사실 그만한 꿈이 없었다. 돼지든 용이든 뭐든, 길몽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그 모든 것들이 총출동했더라도 예감 따윈 없었을 것이다. 소설은 똥이니까. 똥을 써서 응모한 사람에게 똥 싼 꿈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그래, 소설은 똥이지. 내가 먹은 것들이 내 몸 속에서 부서지고 분해되고 소화된 다음 몸 밖으로 나오게 된, 내 몸에서 나왔지만 순전히 내 것은 아닌, 냄새를 풍기는 새로운 무엇. 그것은 물음의 내용물로 들어와서 물음표의 형태로 나간다. 똥줄이 타는 질문들의 연속, 질문들의 변이, 그리고 나온 최종의 물음. 데뷔작은 그동안 뭘 먹어왔기에 이런 독한 냄새를 풍기나 싶은, 묵고 묵은 똥일 터. 그때 내가 먹었던 수많은 물음들.

녹즙이 있었다. 어쩌면 바늘인지도 모르겠다. 짤막한 기사였다. 남편을 죽일 목적으로 1년간 녹즙에 바늘을 갈아 넣은 아내가 살인미수죄로 기소되었다는 것. 건강을 위한 녹즙과 살해를 위한 바늘. 정성을 들이는 마음과 죽이고 싶은 마음. 이것이 공존할 수 있을까. 날것의 질문들을 받아먹었다. 내가 먹는 것이 녹즙인지 바늘조각인지 모른 채 여자의 남편처럼 꿀꺽꿀꺽. 아주 위험한 섭취는 아닌듯 했다.

야나기상도 있었다. 류씨 성을 가져서 야나기상. 그는 일본에서 정화조 청소일을 하며 살았는데, 한국에 와서도 류뭐기시가 아니라 야나기상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는 정화조 청소로 모은 돈 거의 전부를 들고 최고의 문신기술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용 한 마리를 감았다. 원래 팔뚝에 새겨진 버들 ‘류’는 자연스럽게 용의 비늘이 되었다. 가슴팍에 있는 ‘ㅂ’에 더 큰 용을 감기 위해서는 정화조 청소일을 1년 더 해야만 했다. ‘ㅂ’자는 그가 열네 살 때 바늘로 직접 새긴 첫 번째 문신이었다. 그 시절 그의 인생 최대 목표가 부산대표였다고 한다. 부산대표는 영원히 미완성일 터였다. 그의 몸에는 ‘ㅂ’자 외에도 감아야할 글자와 그림들이 더 있었다. ‘노력’이나 ‘왕’ 같은 낙서도 있음직했다. 확인은 못했다. 용은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도 과거의 허접한 잔재들은 보여주지 않아서였다. 용을 보여줄 때의 표정은 부산대표가 아니라 야쿠자보스의 표정이었다. 보스의 용은 아름다웠다. 한 마리 용이 그에게 준 것. 아름다운 용 뒤에 숨은 허접한 버들류. 수많은 질문들이 혀끝에 와 박혔다. 불을 머금은 것 같았다.

그해 여름 나는 부산 금정산에 있는 작은 암자에 머물렀다. 공양보살을 도와 공양 준비를 하는 것이 미리 듣고 간 내 업무였다. 나머지 시간은 글을 쓰며 편히 지내라고 지인이 연결해 주었다. 미륵암에는 노스님 하나, 행자 하나, 공양보살 하나 그리고 스무 마리 남짓의 고양이들이 살았다. 그놈에 고양이들. 하루 세 번 고양이밥을 챙겨주고, 법당 구석구석 고양이오줌을 치우고, 오줌 냄새 진동하는 좌대를 빨아 널고. 산사의 향기가 아니라 고양이오줌 냄새가 온몸에 들러붙었다. 얘기한 바와 다르잖아, 어디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금정산 기슭에 앉아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괜히 훌쩍이는 밤들이 이어졌다. 도시의 삶이 그리워서? 아니, 고기가 먹고 싶어서, 미치도록 고기가 그리워서, 안 되면 계란후라이라도 하나.

결국 약속한 석 달의 기간을 채우지 못했다. 고양이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고양이들을 질투했다. 우아하고 한가로운 몸짓으로 주인행세를 하는 것까지는 그럭저럭 참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주말에 신도들이 가져온 생선이나 고기 따위를 맛있게 먹는 소리는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것들이 먹는 생선을 빼앗아 연못에 던져버리는 정도로 보복을 하긴 했다. 터무니없이 허기지고 결핍감이 느껴지는 날들. 그래서 다른 것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을 것이다. 복숭아빛 피부의 노스님과, 좌대에 수를 놓고 앉은 공양보살을, 그 둘이 한 방에 앉아 있을 때의 기묘한 공기를 마셨다. 예전에 한복집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공양보살의 과거와, 엄마를 내놓으라며 산사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딸의 악다구니를 집어삼켰다. 딸이 다녀간 날 노스님과 차를 마셨다. 공양보살이 말없이 찻잔에 차를 채웠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깨고 노스님이 말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꼭 가족 같구나.” 슬프고도 무서운 말이었다.

며칠 후 산을 내려왔다. 야나기의 친구들을 불러 돼지국밥과 산곰장어를 먹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똥을 쌌다. 소설에서 나는 노스님에게 바늘을 잘라 먹였다. 마산대표가 되고 싶었던 한 남자에게 호랑이를 그려주었다. 새끼고양이를 화장실에 빠뜨려 죽였다. 아름다워서라고 탓을 돌렸다. 강해지고 싶다는 이웃집 남자에게는 바늘 하나를 그려주었다.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은 바늘을.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를.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 들어가기를 바랐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이것이 그때 내가 먹고 싼 최종의 물음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