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형의 작가 최인석 “사람 이상의 가치는 없다”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이어쓰기 가을하다 사람의 별 다시 소나기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 헤살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아버지의 방,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별을 가슴에 품고 평생 연필로 시를 쓰다 괜찮다 괜찮다! 가난한 청산도, 고난도, 절망도
가장 문학적인 인물, 여성 내 시의 세 가지 신비 숨은 집 비평과 독서
“격동기, 단절과 극복의 언어”를 남긴 8명의 문인 재조명
나의 삶, 나의 문학
1.
오월이었을까? 남새밭에서 어머니는 상추를 뽑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 가까이서 흰 나비를 쫓고 있었다. 쫓는다지만, 잡으려고 가까이 가면 나비는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곤 했다. 푸른 하늘에는 엷은 구름들이 조금씩 무리지어 떠 있었다. 남새 밭은 온갖 식물들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식구들한테 반찬거리를 제공해주는 곳이어서 더 없이 소중한 땅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내가 뛰어다니다 이제 막 눈을 뜨는 어린 싹들을 밟을까봐 주의를 주시곤 했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 곁에서 여러 종류의 식물들을 바라보며 노는 것이 늘 좋았다. 그래도 배고픈 것만은 어쩔 수 없는 긴긴 봄날이었다.
2.
나는 중농의 가정에서 1946년 4남4녀의 자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학을 하셔서 가끔 시를 지으시는 분이었고 어머니는 한글 해독이 겨우 가능할 정도였지만 성품이 한없이 따뜻한 분이셨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부터어머니의 부탁으로 형님들의 국어책에 있는 고시조를 붓글씨로 써서 드렸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칭찬하시고 신문지나 비료포대 종이에 모양 없이 쓰인 그 시조들을 신주 단지처럼 모아 두었다가 틈나는 대로 외우셨다. 형님들 말씀에 의하면 어머니께서 무언가 외우시기 시작한 지는 1944년, 아버지께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신 뒤부터라고 했다. 나와 여동생은 해방 후에 세 살터울로 태어났다. 그러니 아버지가 일본에 가실 때 우리는 모두 6남매였다. 남편 없는 집에서 십여 마지기 전답을 가꾸어 아이들을 굶기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젊은 여인에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시면 회심곡이나 불경, 혹은 가사나 시조를 외우시곤 했던 모양이다. 소리 내어 이런 글들을 외우면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고, 어떤 때는 오히려 힘이 났다고 어머니는 훗날 말씀해 주셨다. 그러니 어머니께 가사나 시조는 자신의 처지를 위로해 주는 한편, 그 고난을 딛고 다시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3.
어머니의 간곡한 기도로 아버지는 돌아오셨다. 농사를 잘 짓지 못하시는 아버지는 가산을 늘리는 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래도 형님들이 어머니와 같이 농사를 짓고 근검절약해서 우리 집은 조금씩 나아져 갔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는 식량 걱정이 없었고, 가끔 교과서 외의책을 사 볼 수도 있었다. 내가 헌책 장사에게 사온 책은 모윤숙의 『렌의 애가』, 노천명의 『사슴』,김춘수 편의 『세계현대시 감상』, 한하운의 『보리피리』, 김소월의 『소월시집』 등이었다. 이런 책들을 읽다보니 나도 가끔 시를 쓰게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그 길이 바람직한 길이 아니라고 걱정하셨다. 그래서 한밤중, 나는 식구들이 다 잠이 들고 나서야 책을 읽고 글을 써 보곤 했다. 내가 아버지 몰래 책을 읽는 걸 아신 어머니께서는 내가 아버지를 미워하게 될까봐 걱정스러우셨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네가 더 큰 사람이 되길 바라신다”, “아버지는 너를 정말 사랑하신다”, “세상에는 재미있고 유익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네 적성에 맞는 것을 고를 기회가 자꾸 생긴다”, “우선 공부를 해야지”, “아버지는 세상을 넓게 살펴본 분이다” 등등 아버지에 대해 좋은 말씀을 해주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싫진 않았을 뿐더러, 글을 써서 살아갈 생각도 자신도 없었다. 내가 보기에 글 쓰는 일은 가난한 가족을 돕는 데 너무나 무력한 길이었다. 나는 결국 사회교육과를 선택해서 진학했다.
4.
대학에 들어간 뒤 아버지와 식구들은 무척 기뻐했다. 나는 이제 무슨 책을 읽어도 간섭받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다만 내가 진학하는 바람에 여동생은 고등학교를 가지 못했고 식구들은 일 년 농사를 지어 내 등록금을 만들어야만 했다. 때문에 나는 고위직 공무원이 되거나 판,검사가 되어서 식구들의 희생에 보답해야 한다고 늘 다짐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내 걸음은 자꾸 엉뚱한 데로 가곤 했다. ‘현대문학연구회’에 가입했고 『고시계』를 사면서 문예지도 한 권씩 사와서 틈틈이 읽곤 했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제대파 복학생인 농과대 친구가 와서 내게 수필을 읽어주며 사는 방법에 대해 한참 떠들다 간 적이 있었다. “너는 네 인생을 살지 않는다. 불행해질 것이다. 식구들도 그런 너를 원치 않을 것이다”라는 그 친구의 말이 망치로 내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전에 사온 《현대시조》라는 책을 읽었다. 불현듯 시조를 써보고 싶었다. 「엽서」, 「코고무신」. 그 두 편을 써서 학보사 투고함에 넣고는 누가 볼까봐 뛰어서 집으로 왔다. 두 주일이 지난 뒤였다. 같은 과 후배들이 야단이었다. 내 시조가 학보에 실려 있다는 거였다. 나도 신기했다. 아무도 안 쓰는 시조라는 것을 쓰고, 거기다 학보에 발표까지 하다니…….
5.
1973년 이영도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시조는 물론이려니와, 가끔 월평이나 시조에 관한 평론을 쓰고 세미나 주제 발표를 하면서 살아온 지 어언 42년이 되었다. 그동안 20여 권의 저서를 냈다. 시조 단체의 대표가 된 적도 있고, 가르친 사람들 가운데 간혹 등단자를 내기도 하는 중진이다. 그렇다면 내가 쓰는 글들의 근원은 어디일까? 나는 어느 수원지에서 내 글의 생명수를 끌어오고 있는 것일까? 내 시론은 누구에게 배운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머리맡에서 떠나지 않을 때면 제일 먼저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내게 모국어를 가르쳐 주셨고, 꽃을 꺾으려고 뛰어다닐 때 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잎도 열매도 다 아름답다는 소박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다. “모든 노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정직한 데서 나온다”고도 하셨다. 결국 내가 시인이 되었을 때, “네게 그 길이 행복한 길이라면 네 인생의 길이니 뒤돌아보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달려가라”고 격려하신 분이 나의 어머니다.
아직도 내 사랑의
주거래 은행이다.
목마르면 대출받고 정신 들면 갚으려 하고
갚다가
대출받다가
대출받다가
갚다가……
- 「어머니」 전문
2011년 《문학사상》 6월호에 나는 이 작품을 발표했다. 그래서 아직도 내 어머니가 살아계신 줄 아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23년 전에 타계하셨다. 나는 지금도 사물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진솔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문학인생을 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내 글은 어머니의 영혼이 불러주시는 노래다. 가끔 어머니가 보고 싶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세상을 본다. 좀 더 간절한 작품을 쓰고 싶다.
어머니 시론(詩論)
글 이우걸 ㅣ 시인, 1946년생
시조집 『맹인』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 『네 사람의 노래』『주민등록증』 『이우걸시조전집』 등
|
1.
오월이었을까? 남새밭에서 어머니는 상추를 뽑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 가까이서 흰 나비를 쫓고 있었다. 쫓는다지만, 잡으려고 가까이 가면 나비는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곤 했다. 푸른 하늘에는 엷은 구름들이 조금씩 무리지어 떠 있었다. 남새 밭은 온갖 식물들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식구들한테 반찬거리를 제공해주는 곳이어서 더 없이 소중한 땅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내가 뛰어다니다 이제 막 눈을 뜨는 어린 싹들을 밟을까봐 주의를 주시곤 했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 곁에서 여러 종류의 식물들을 바라보며 노는 것이 늘 좋았다. 그래도 배고픈 것만은 어쩔 수 없는 긴긴 봄날이었다.
2.
나는 중농의 가정에서 1946년 4남4녀의 자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학을 하셔서 가끔 시를 지으시는 분이었고 어머니는 한글 해독이 겨우 가능할 정도였지만 성품이 한없이 따뜻한 분이셨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부터어머니의 부탁으로 형님들의 국어책에 있는 고시조를 붓글씨로 써서 드렸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칭찬하시고 신문지나 비료포대 종이에 모양 없이 쓰인 그 시조들을 신주 단지처럼 모아 두었다가 틈나는 대로 외우셨다. 형님들 말씀에 의하면 어머니께서 무언가 외우시기 시작한 지는 1944년, 아버지께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신 뒤부터라고 했다. 나와 여동생은 해방 후에 세 살터울로 태어났다. 그러니 아버지가 일본에 가실 때 우리는 모두 6남매였다. 남편 없는 집에서 십여 마지기 전답을 가꾸어 아이들을 굶기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젊은 여인에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시면 회심곡이나 불경, 혹은 가사나 시조를 외우시곤 했던 모양이다. 소리 내어 이런 글들을 외우면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고, 어떤 때는 오히려 힘이 났다고 어머니는 훗날 말씀해 주셨다. 그러니 어머니께 가사나 시조는 자신의 처지를 위로해 주는 한편, 그 고난을 딛고 다시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3.
어머니의 간곡한 기도로 아버지는 돌아오셨다. 농사를 잘 짓지 못하시는 아버지는 가산을 늘리는 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래도 형님들이 어머니와 같이 농사를 짓고 근검절약해서 우리 집은 조금씩 나아져 갔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는 식량 걱정이 없었고, 가끔 교과서 외의책을 사 볼 수도 있었다. 내가 헌책 장사에게 사온 책은 모윤숙의 『렌의 애가』, 노천명의 『사슴』,김춘수 편의 『세계현대시 감상』, 한하운의 『보리피리』, 김소월의 『소월시집』 등이었다. 이런 책들을 읽다보니 나도 가끔 시를 쓰게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그 길이 바람직한 길이 아니라고 걱정하셨다. 그래서 한밤중, 나는 식구들이 다 잠이 들고 나서야 책을 읽고 글을 써 보곤 했다. 내가 아버지 몰래 책을 읽는 걸 아신 어머니께서는 내가 아버지를 미워하게 될까봐 걱정스러우셨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네가 더 큰 사람이 되길 바라신다”, “아버지는 너를 정말 사랑하신다”, “세상에는 재미있고 유익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네 적성에 맞는 것을 고를 기회가 자꾸 생긴다”, “우선 공부를 해야지”, “아버지는 세상을 넓게 살펴본 분이다” 등등 아버지에 대해 좋은 말씀을 해주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싫진 않았을 뿐더러, 글을 써서 살아갈 생각도 자신도 없었다. 내가 보기에 글 쓰는 일은 가난한 가족을 돕는 데 너무나 무력한 길이었다. 나는 결국 사회교육과를 선택해서 진학했다.
|
대학에 들어간 뒤 아버지와 식구들은 무척 기뻐했다. 나는 이제 무슨 책을 읽어도 간섭받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다만 내가 진학하는 바람에 여동생은 고등학교를 가지 못했고 식구들은 일 년 농사를 지어 내 등록금을 만들어야만 했다. 때문에 나는 고위직 공무원이 되거나 판,검사가 되어서 식구들의 희생에 보답해야 한다고 늘 다짐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내 걸음은 자꾸 엉뚱한 데로 가곤 했다. ‘현대문학연구회’에 가입했고 『고시계』를 사면서 문예지도 한 권씩 사와서 틈틈이 읽곤 했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제대파 복학생인 농과대 친구가 와서 내게 수필을 읽어주며 사는 방법에 대해 한참 떠들다 간 적이 있었다. “너는 네 인생을 살지 않는다. 불행해질 것이다. 식구들도 그런 너를 원치 않을 것이다”라는 그 친구의 말이 망치로 내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전에 사온 《현대시조》라는 책을 읽었다. 불현듯 시조를 써보고 싶었다. 「엽서」, 「코고무신」. 그 두 편을 써서 학보사 투고함에 넣고는 누가 볼까봐 뛰어서 집으로 왔다. 두 주일이 지난 뒤였다. 같은 과 후배들이 야단이었다. 내 시조가 학보에 실려 있다는 거였다. 나도 신기했다. 아무도 안 쓰는 시조라는 것을 쓰고, 거기다 학보에 발표까지 하다니…….
5.
1973년 이영도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시조는 물론이려니와, 가끔 월평이나 시조에 관한 평론을 쓰고 세미나 주제 발표를 하면서 살아온 지 어언 42년이 되었다. 그동안 20여 권의 저서를 냈다. 시조 단체의 대표가 된 적도 있고, 가르친 사람들 가운데 간혹 등단자를 내기도 하는 중진이다. 그렇다면 내가 쓰는 글들의 근원은 어디일까? 나는 어느 수원지에서 내 글의 생명수를 끌어오고 있는 것일까? 내 시론은 누구에게 배운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머리맡에서 떠나지 않을 때면 제일 먼저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내게 모국어를 가르쳐 주셨고, 꽃을 꺾으려고 뛰어다닐 때 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잎도 열매도 다 아름답다는 소박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다. “모든 노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정직한 데서 나온다”고도 하셨다. 결국 내가 시인이 되었을 때, “네게 그 길이 행복한 길이라면 네 인생의 길이니 뒤돌아보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달려가라”고 격려하신 분이 나의 어머니다.
아직도 내 사랑의
주거래 은행이다.
목마르면 대출받고 정신 들면 갚으려 하고
갚다가
대출받다가
대출받다가
갚다가……
- 「어머니」 전문
2011년 《문학사상》 6월호에 나는 이 작품을 발표했다. 그래서 아직도 내 어머니가 살아계신 줄 아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23년 전에 타계하셨다. 나는 지금도 사물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진솔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문학인생을 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내 글은 어머니의 영혼이 불러주시는 노래다. 가끔 어머니가 보고 싶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세상을 본다. 좀 더 간절한 작품을 쓰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