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도 대산창작지원금 시 부문에 접수된 시인은 169명이었다. 세 심사위원들은 각각
3등분하여 배정된 작품을 읽고 1차로 2~3편씩을 선정한 후, 2차로 그 작품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그 결과 박장호, 진은영 두 시인이 창작지원 대상 시인으로 선정되었다.
>이번에 접수된 작품은 응모자 1인당 시집 한 권에 해당되는 분량(50편 이상)이어서 한 시인의 작품 세계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고 생각된다. 20~30편 정도도 충분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으나, 50편이라는
작품의 양은 한 시인이 태작 없이 끝까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는 데 유용하게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고 본다.
응모작을 일별해볼 때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전반적으로 지원자들의 작품을 빚는 솜씨가 매우 세련되고 뛰어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 젊은 시에 대한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좀 더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이미지의 구사나 시의 구성, 언어를 빚는 방법, 즉 시를 만들어 내는 구조나 사유가 이상할 정도로
비슷하다는 사정도 발견된다. 그만큼 뚜렷한 자기 세계관을 드러낸 목소리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즉 ‘장인’은
많지만 ‘시인’은 많지 않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점은 현실의 결핍에 대한 전복적인 욕구와
같이 내적인 필연성에서 오는 강렬한 에너지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분히 교육이나 지식에
의존한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갖게 한다.
이번에 박장호(「11월의 비」외 51편)와 진은영(「연애의 법칙」외 50편)의 시가 창작 지원대상작으로
선정된 이유는 전체적인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신뢰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개의 시가 비슷한 메타포에
동화되는 흐름 속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목소리와 세계관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 작품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박장호 시는 현대적인 삶의 경험을 동물이나 사물, 자연 등의 감각이나 정서로 변형시켜 드러내는 데에서
그 특징이 잘 나타난다. 정보나 통신, 자본의 흐름과 같은 현대성의 양상을 자연의 순환으로 변형시킨 「코시코스의
우편마차」나 생각을 물고기의 날렵하고 투명한 생김새나 유연한 헤엄, 말 없음 등의 특성으로 변형시킨 「나는
맛있다」의 경우가 그 예인데, 이들 시는 활달한 상상력이 속도감 있는 이미지를 얻으면서 생생한 활력을 얻거나,
사유를 싱싱하고 질서 있는 생태계로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시에 말이 너무 많거나 산문적일 때에는 이런
특성이 약화되기도 하였다.
진은영의 시는 이미지나 언어의 느닷없고 당돌한 조합에서 나오는 강렬한 에너지가 다른 시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목소리를 갖게 한다. 그의 시는 이미지나 리듬, 어조 등이 죽음이나 삶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낼 때에도 밝고
활달하고 경쾌하며 미적이라는 것도 눈여겨볼만하다. 그것이 시에 묘한 매력과 생기를 발산시킨다. 그러나 시가
철학적 담론을 구현하려 할 때나 표현의 구체성 속으로 들어가지 못할 때에는 대체로 이런 특성이 약화된다.
거의 명사의 나열로 시가 빚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명사들만의 부딪침으로 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위의 두 시인 외에도 선자들은 함께 논의한 작품들로부터 한 시인을 더하여 세 시인을 지원 대상으로 선정하려
하였으나 「풀꽃 향기」외 49편은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적이라는 점이 신뢰도를 떨어뜨렸고, 「앵무새
죽이기」외 69편은 비교적 깊이 있고 안정적임에도 불구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태작이 많이 눈에 띈다는 점이,
「오리의 강」외 49편은 자기 목소리가 너무 약하다는 점이, 「거인」외 49편은 시가 거의 산문에 가깝다는
점이 각각 치명적인 단점으로 지적되어 아쉽게도 지원 대상작에 포함시킬 수 없었다. 또한 선자들의 손에서
놓기 아까운 다른 작품도 있었으나, 이미 다른 지원금 수혜가 확정된 작품집은 선정하지 않기로 한 지원 규정에
따라 불가피하게 제외시켰음을 밝힌다.
한 사람당 단편 7,8편씩, 혹은 장편소설 한편씩을 응모했잖아요. 모두 68명. 그걸 읽느라 엄청 힘들었습니다.
한 달이 꼬박 걸렸어요. 하지만 즐겁고 보람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모두 등단을 한 작가들이어서, 응모 작품들에서
배운 바도 많았습니다. 나 보다 잘 쓰잖아, 이런 생각도 했고요.
최종 심사 대상이 되었던 작품은 7편이었습니다. 표제작 <흰 눈>, <날라리 온 더 핑크>,
<천사의 몫>, <어느 예술가의 죽음>, <누군가>, <스윙바이>,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가 그것들입니다.
<흰 눈>(外라는 말은 이하 생략합니다)은 탄탄한 구성에 전통의 서정이 잘 녹아 있다는 점에서,
<날라리 온 더 핑크>는 최종 심사에 오른 유일한 장편이었는데 10대들의 세계를 재치있고 거침없는
입담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천사의 몫>은 관계의 히스테릭하면서도 풍부한 감성을, 실을 잣듯
올올이 길어 올렸다는 점에서, <어느 예술가의 죽음>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에 남다른 패기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누군가>는 미묘한 감성과 관계, 그리고 상황들 사이로 내비치는 삶과 존재의
편린적 비의들을 섬세한 문장으로 낚아채고 있다는 점에서, <스윙바이>는 거시적 관점에서 인간존재의
유한함과 비루함, 혹은 사회적 존재의 아이러니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는
하나의 사건이나 상황을 가독성 있는 문체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다가 통쾌한 반전으로 독자의 정화욕구를 인식의
전환으로 유도하는 솜씨가 돋보였다는 점에서 모두 후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모두 잘 쓴 작품들이라 고르는 데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러나 선정할 작가의 수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진 맘으로 다시 고를 수밖에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쪽 테이블로 하나씩 제외되는
작품들을 보면서 정말 맘이 아팠습니다. 심사장을 나서면서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이미 선정된 작품들이니까 한 마디씩만 하겠습니다. <날라리 온더 핑크>는 정말 위험하고 불온할
정도로 재밌더군요. 정황과 심리를 관통하는 10대들의 날렵하고 파괴적인 언어들이 기성세대의 안일한 감성을
기분 좋게 마구 흔들어댑니다만, 결말 부분의 몇 마디 어설픈 계몽적 멘트는, 그 부분을 쓰면서 작가 자신도
분명 어색하고 민망했을 거란 느낌이 팍 들게 하더군요.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는 일단 첫 문장을 읽으면 끝까지 단숨에 읽게 만듭니다. 독자의
호기심을 자유자재로 관리하면서 충격적이고도 문제적인 결말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런데 형식이 다소 반복적이랄까,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져갈 위험이 보이더군요. 반전을 즐기는 것도, 다소 소재주의적인 것도 그렇고요.
<스윙바이>는 요즘 소설들이 결핍하고 있는 진지함과 엄숙함, 숙연함을 소중하게 다루고 있군요.
아마추어리즘의 긍정적 측면으로 평가했습니다만, 그런 것들은 또 그만큼의 미학적 위험성을 동시에 내포한다는
사실을 경계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압축 생략 비약의 극적언어에 대한 탐구를......
진부한 역사극과 발칙한 일상극이 응모작의 주류를 이루었다.
무엇보다 희곡은 구성이기 이전에 말이며, 작가의 독창적인 화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응모작들의 수준은
범속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상당수 작품이 창작활성화 지원 기금 응모작과 중복된다는 것도 지적되었다.
이중 지원작에 대한 제한은 없지만, 동일 작품을 여러 곳에 응모한다는 것이 좋은 인상으로 비쳐지지는 않는
것이다.
<이 세상의 마지막 계절>을 쓴 작가와 <남은 집>을 쓴 작가의 작품이 최종 심사대상에서
논의되었다.
발칙한 일상극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 세상의 마지막 계절>은 치밀하게 잘 짜여진 극 구조가
매력적이었다. 유미리와 박근형의 글쓰기 사이에 놓여있는 이 불온한 극은 전망 부재의 세상을 살아가는 21세기적
지형도란 점에서 시사적이다. 그러나 이런 발칙하고 불온한 극이 근래 젊은 극작가들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독창적이고 새롭지는 않게 보였다. 오히려 유행적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이 세상의 마지막
계절>외의 두 작품이 제대로 된 극으로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남은 집>은 재개발로 주변이 다 없어진 섬 같은 집에서 일어나는 고립의 정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런 황량한 상황 속에서 빚어내는 검은 유머가 따뜻한 시각과 시적 정서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갈등의
축이 모호하고 극 언어 자체가 새롭지 않은 진부한 언어로 구축되었다. <남은 집>외 두 작품은
지난해 대산 창작기금에 제출된 작품이고 서울연극제에서 공연된 작품이다. 그런데 분명한 수정 보완의 과정이
보이지 않아서 실망스러웠다.
두 작가의 작품 모두 장점과 단점을 갖추고 있어서 어떤 작가를 선택해야 할지에 대한 토론이 꽤 긴 시간
계속되었다. 해당작 없음이란 결론도 논의 되었다. 그러나 희곡문학에 대한 출판 지원이 열악한 상황에서 결함과
미숙함 보다 장점과 가능성을 더 높이 사야 한다는 심사위원들의 판단이 지원 대상작을 내기로 합의를 보았고,
발칙한 유행 언어 보다 진부함 속의 극적 진실을 선택하기로 했다.
<남은 집>을 지원 대상작으로 전한다.
압축 생략 비약의 극적 언어에 대한 탐구가 좀 더 뒤따랐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인다. 희곡집 출간 전에
자신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재수정 보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란다.
이번 대산창작기금 비평 부문에는 열 네 사람의 신진비평가가 응모작을 보내왔다. 심사위원들은 그 중 네 사람의
성과에 주목했다. 오창은의 <다른 미래의 상상>, 이경수의 <그림자의 존재증명>, 이수형의
<‘나’·타자·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정여울의 <기억의 연금술>이 그것이다.
80년대 비평이 지닌 강력한 ‘입법성’과 ‘정치성’이 90년대적 조건 속에서 급격하게 해체되고 나서
전개된 90년대 이후 비평의 흐름은 개인과 일상의 발견이라는 문학적 추세에 발맞추어 전반적으로 텍스트 해석을
중심으로 미시화하는 경로를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민족, 민중, 계급, 역사 등 근대적 거대담론들의 성긴
그물로 포착될 수 없었던 수많은 타자들과 욕망들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일은 창작의 일이었으며 동시에 비평의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90년대 이후의 비평들은 문학 텍스트들과 일종의 협업관계를 형성했고 그것이 지난 십
수 년 동안 한국 문학비평의 기본적 위상으로 자리해 왔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경험이고 자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와 함께 파생된 문제들도 적지
않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비판의 실종현상이다. 해석과 비판이 비평의 두
축이라고 한다면 90년대 이후의 비평에 해석의 과잉과 비판의 과소라는 불구성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텍스트를
포괄하는 컨텍스트에 대한 의도적, 비의도적 맹목에서 주로 비롯되는데 이는 동시대 현실 속에서 문학의 주변화를
자초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텍스트주의의 범람 속에서 오히려 미적 집적물로서의 텍스트가 실종되는 현상이다.
이는 80년대에 마르크스주의가 문학비평에 드리웠던 그림자를 이젠 푸코, 들뢰즈, 라캉, 지젝 등의 포스트모던
담론들이 그대로 이어받은 형국으로 ‘작품’은 이들 담론들을 번안하는 재료로 전락하는 전도현상이 현저하게
진행되어 왔다.
우리가 일차 심사들 통해 주목한 네 명의 신진비평가들에게서 90년대 이후의 한국 비평이 지닌 이상과 같은
장단점을 체현하면서 극복하는 양상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창은과 이경수의
비평작업에서는 동시대의 중심 컨텍스트에 대한 확고한 비판적 인식과 그에 기초한 폭넓은 텍스트 해석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이수형과 정여울의 비평작업에서는 담론번안의 폐해를 넘어선 독창적 텍스트 읽기의 능력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그러한데, 이들 네 명의 신진들에게서 우리는 80년대 비평과 90년대 비평의 문제를 슬기롭게 넘어서서
새로운 비평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이들 중에서 한 명을 대산창작기금 수혜자로 선정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고 그만큼 많은 논의가 오고
갔다. 패기와 개성을 높이 살 것인가, 아니면 비평가적 소양의 충실성을 높이 살 것인가를 두고 적지 않은
논란 끝에 최종 수혜자로 이수형을 선택했다. 그의 비평은 폭넓은 인문적 교양과 텍스트의 질감과 굴곡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감식안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텍스트들의 배후에 드리운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의식
또한 모자람이 없어서 비평가로서의 기본 덕목을 가장 균형 있게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감식안과 판단력을 좀 더 확고한 윤리의식과 비판의지로 수렴해 내는 힘, 즉 선명한 자기 목소리로
대상 작가와 텍스트에 날카로운 비정을 가하는 좋은 의미의 비평가적 욕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고 이는 그가 빨리 극복해 내야 할 단점이라는 사실을 말해 두지 않을 수 없다.
탈락한 세 명에 대해 느끼는 아쉬움과 선정된 한 사람에게 보내는 질정은 등가에 가깝다. 이 네 명의 신진비평가
모두에게 우리가 동등하게 큰 기대를 걸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심사의 변을 마친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 동화보다 동시의 응모 편수가 월등히 많았다. 추측컨대 동화는, 가히 공모제도의 전성시대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각 출판사들이 앞 다투어 새로운 작품들을 뽑고 있으므로 도전과 출간의 기회가 열려있는 것에
비해 동시는 여전히 소외를 당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기쁜 것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동시인들이 열정을 잃지 않고 열심히 작품 세계를 갈고 닦고 있음을 안정되고 고른 동시의 수준에서 엿볼 수 있었던
점이다.
그에 비해 동화는, 응모 편수도 적었지만 문학적 완성도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특히 작품 속의
대화는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살려주고, 사건을 전개시키며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중요한 요소인데, 생생한
입말이 아닌 문어체에 담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점이 응모작의 전반적인 문제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제재나
주제가 예전에 비해 다양하고 폭넓어져 동화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균형적으로 발전하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해주었다.
최종심에 오른 동시로는, <도깨비 뿔을 단 감자>,<바리공주는 어디 갔나요?>,<택배로
오신 할머니>,<지금쯤>등 4 편으로 동시의 기본 요건을 갖춘 작품들이다.
돌아가신 아빠를 주제로 한 <바리공주는 어디 갔나요?>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애절하나
아빠와 관련된 일상의 삽화에 그친 감이 있다. 아빠의 죽음이라는 화자의 체험을 보편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것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과 함께 응모된 야생화나 자연을 제재로 한 단시들도 재치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
<택배로 오신 할머니>는 소재의 다양성 면에서는 높이 평가됐으나 산문적으로 시적 형상화가
덜 됐으며 교훈적이 내용이 많은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작가만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도 앞으로 작가가 극복해야할 과제일 것이다.
아이들의 일상을 다룬 생활동시들과 달리 자연을 소재로 한 <지금쯤>은 운율을 잘 살려 시의
맛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발상이 참신하지 않으며 막연한 관념과 분명하지 않은 이미지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당선작인 <도깨비 뿔을 단 감자>는 아이들의 눈높이와 동심이 잘 담긴 작품으로 무엇보다 전체
작품의 수준이 고르다. 입말을 잘 살려 어린이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감은 물론이며, ‘도깨비 뿔을 단
감자’, ‘엄마의 등’, ‘바람아 어쩌다’, ‘아빠의 자전거’ 등의 작품에서 보여준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신선한 발상이 동시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동화의 최종심 후보작은 <황금빛 순록>,<단청에 비추는 햇살> 등 2편이었다.
<단청에 비추는 햇살>은 단청을 제재로 해서 평생 단청을 그려온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하는
6학년 소년 환희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로 단청에 대한 철저한 자료 조사와 우리 것에 대한 애정과 주제의식은
인정할만하나 이야기의 전개가 대부분 사건보다는 진술에 의존하고 있어 지루하다. 전통과 새로운 것, 육체와
영혼 등 이분법적인 사고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점도 식상하며 주인공의 사유의 기반이 되는 책 목록 등이
초등학생인 주인공과 걸맞지 않는다.
당선작 <황금빛 순록>은 시베리아 대평원을 무대로 순록들이 먹이를 찾아다니면서 만든 이끼길(스텝로드)을
처음 낸 순록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순록들이 자기 의지로 짝짓기를 거부하는 등, 생태의 오류와 떠남과 귀환이
반복돼 자칫 긴장감이 떨어지는 장면 등이 단점으로 거론되기는 했으나 큰 스케일과, 개성이 잘 살아있으며
입체적인 캐릭터, 삶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력과 주제의식 등이 고루 갖춰진 수작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었다.
동물을 의인화한 작품이면서도 초등학교 고학년에서부터 청소년까지 두루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국내창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때에 환영할만한 일이다. 두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더 발전한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