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아우의 인상화 印像画

아바나, 영혼은 탈탈 털리고 심장은 도취하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의 만남 '진흙과 풀꽃'

대한민국, 2018년 늦가을

특집을 기획하며 동아시아문학 공동의 집 시간과 우리 작가와 작품, 독자와 현실의 틈새에 서서 ①주요 발제문 다시 읽기➍ 작품교류-전통 ①주요 발제문 다시 읽기➎ 작품교류-차이 ①주요 발제문 다시 읽기➏ 작품교류-미래 ①주요 발제문 다시 읽기➐ 작품교류-독자 ②한중일 동아시아문학포럼 참관기 ③한중일 대표 공동 기자간담회

“어둠 속에서 둘이서,어둠 속에서 나홀로”

차이(差異)의 매혹

강릉 유가(儒家)의 군자

쓰지 않아도 된다

길 위에서

검박한 스승, 굴산사 당간지주

동아시아와 세계, 우주에 대한 새로운 성찰

의약분업의 효시

내 글의 스승, 가스통 바슐라르

속간 《문예중앙》, 2010년 가을 통권 제123호로부터

숲은 아름답고 깊지만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네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네

①기차를 타고 밤 약속,월동준비 ②당분간 달콤,홀로그래피

①사람 사는 집 ②네가 웃어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잊히지 않는 일들

①최근 역사 영화의 한 경향에 대해 ②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③주인도 제목도 없는

①시대의 아픔 위에 놓인 애도의 문학 ②제26회 대산문학상 수상작리뷰

고민과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하기 위한 노력들

소설이 묻고, 영화가 답하다

인생 리셋을 위한 자기 계발의 과학

파라나 강물 위에는 그를 기리는 꽃잎이 흐른다

한국문학 번역, 어렵고 힘들지만 “계속해보겠습니다”

강 저편과 여기

기다림의 미학

대산세계문학총서149,150

대산창작기금, 한국문학 번역지원,외국문학 번역지원

대산문화재단 신창재 이사장 은관문화훈장 수훈 등

기획특집

작가와 작품, 독자와 현실의 틈새에 서서

글 히라노 게이치로 ㅣ 소설가, 동아시아문학포럼 일본조직위원장. 1975년 아이치현 출생. 교토대학교 법학부 졸업. 대학 재학 중 문예지 《신초》에 투고한 「日蝕(일식)」이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였다. 현대인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사랑, 죽음, 미학, 시간, 기억 등을 테마로 매 작품마다 작풍을 바꾸어 그려낸다. 음악과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폭넓은 장르의 비평도 집필 중이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 『一月物語(달)』 『葬送(장송)』 『顔のない裸体たち(얼굴없는 나체들)』, 수필 『モノローグ(모놀로그)』 『ショパンを嗜む(쇼팽을 즐기)』 등이 있다. 예술선장 문부과학대신상 신인상, 와타나베준이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에는 국립서양미술관의 게스트 큐레이터로 <비일상으로의 초대>를 개최했다. 같은 해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훈하였다.

작가와 작품, 독자와 현실의 틈새에 서서

 
4회째를 맞는 동아시아문학포럼에 일본의 한 작가로서, 그리고 일본 작가단의 단장으로서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이번 대회 개최를 위해 수고해 주신 한국, 중국 양국의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8년의 제1회 서울 대회, 2010년의 제2회 기타큐슈 대회, 그리고 2015년의 제3회 베이징 대회, 이 렇게 첫 번째 사이클의 포럼은 성공리에 마쳤습니다만, 사실 일본은 그 이후의 포럼 참가가 매우 어려 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 포럼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실행위원회도 한국, 중국과 전적으로 가 치관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주로 재정적인 사정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이클의 포럼 개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한중 양국은 항상 열정으로 가득 찬 따뜻 한 격려로 저희의 용기를 북돋아주어, 최종적으로는 한중 공동 주최라는 형태를 취하면서도 일본에 기존과 같은 참가 인원을 안배, 열 명의 작가를 여기 서울로 초대해 주었습니다.
양국의 조직위원회가 이 포럼에 있어서 일본 작가의 계속적인 참가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최대 한의 경의와 함께 열심히 설득해 주신 것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제4회 포럼의 테마는 ‘21세기 동아시아문학: 마음의 연대’입니다만, 이 포럼의 존재 자체가 그야말 로 그런 ‘마음의 연대’를 체현하고 있다는 점을 우선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강조해 두고자 합니다.

10년에 걸친 이 포럼에 저는 처음부터 전부 참가하는 행운을 얻어 추억들을 풀어 놓자면 끝이 없습 니다만, 인상에 강렬히 남아 있는 에피소드 하나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1회 서울 대회 후에 우리는 춘천으로 이동해, 그곳에서도 몇 가지의 문학 이벤트를 개최했습니다. 그중 하나로 춘천과 연고가 있는 작가 김유정을 기념하는 ‘김유정 문학의 밤’이라는 야외 행사에 참가 했습니다. 10월 3일의 일이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노래와 춤 공연이 펼쳐지고, 드넓은 공원 안에서는 바비큐도 제공되어 매우 즐거운 하 루였습니다만,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은 엄청나게 추웠다는 것으로, 작품 낭독을 할 예정이었던 저는 무 대 위에서 계속 떨고 있었고, 들으러 와주신 다른 작가와 현지에 계시던 분들 역시 꽁꽁 얼어 있는 듯했습니다.
제 옆에는 모옌 씨가 앉아 있었습니다. 각자의 작품을 순서대로 낭독해 가는 기획이었기에, 우리는 그 사이에 한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습니다만, 끝나고 제가 저도 모르게 영어로 ‘춥네요’라고 말을 걸자, 그는 정말로 그렇다는 식으로 웃으면서 제 팔뚝 부근을 몇 번이나 싹싹 문질러 주었습니다.
모옌 씨의 작품은 이전부터 『붉은 수수밭』과 『술의 나라』를 읽었으며, 그때는 마침 일본어로 번역 출 판된 『전생몽현(轉生夢現)』에서 소로 살다가 죽은 주인공이 염라대왕에게 당나귀로 환생하게 된 것에 대해 불평을 토로하는 부분을 읽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모옌 씨는 일본에서도 매우 평가가 높으며 그 존재는 거의 신비화되어 있어, 저는 이런 폭발적인 상 상력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고 경외심을 품고 있었기에 그런 사 람이 팔을 문질러 준 것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제2회 기타큐슈 대회 때는 모옌 씨가 제 모교인 도치쿠 고등학교를 방문하여, 재학생을 대 상으로 저와 공개대담을 했습니다. 모옌 씨는 이 고등학교가 사실은 일본 배우 다카쿠라 겐의 모교라 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다카쿠라 겐이 주연한 <그대여 분노의 강을 건 너라>라는 영화를 보고 흥분한 세대로, 당시에는 모두 다카쿠라 겐에게 빠져 있었지만, 자신은 오히려 씩씩하게 말을 타고서 주인공을 구하는 나카노 요시코에게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전혀 문학적이지도 않은 사소한 에피소드입니다만, 동아시아문학포럼은 무려 10년에 걸쳐서 각국의 작가들이 서로 교류하는 특별한 프로젝트였기에, 제 마음 속에는 이런 식으로 각국의 작가들의 예기 치 못한 성품과 접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그들의 소설을 읽을 때면 그런 추억들 이 뇌리를 스치곤 했습니다.
제가 소설가가 되었을 무렵에는 아직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론(la théorie du texte)이라는 것이 유 행하고 있어서, 소설 작품은 일단 완성이 되면 자율적이며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독해의 목적 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자주 거론되곤 했습니다.
이 이론이 소설의 독해에 가져다준 개방감은 엄청났지만, 반면에 독선적인 해석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 폐단도 있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양이 해체된 시대에는 굳이 텍스트론 같은 걸 거론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문학의 ‘감상’으로서는 그런 독해에 어떤 문제가 있지는 않지만, 종교적인 광신도나 과격파의 불전이 나 성서, 코란의 해독에는 종종 그 해석의 역사적인 축적과는 전혀 무관한 텍스트의 독해가 있으며, 그것이 사람들을 생각지도 않은 행동으로 내모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 자신도 『결괴』라는 소설 속에서 그런 식으로 자기류의 성서 해독으로 망상적인 세계관을 갖게 된 악마적인 인물을 등장시킨 적이 있습 니다. 그러면서 저는 그의 주장에서 언뜻 재미있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점과 수상쩍은 점을 모두 적절 히 묘사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일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전후의 일본국 헌법에 대한 독해로, 이것 역시 ‘저자의 의도’를 둘러 싸고 복잡한 정치적인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설로 이야기를 되돌리면, 저자가 모든 것을 완전히 의식해서 단어를 나열한다는 것은 아마도 거짓 말일 겁니다. 독자의 말을 듣고서 나중에 스스로 그런 의도를 발견하는 것은 많은 작가가 경험하는 일일 겁니다.
그러나 의도도 하지 않았는데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처럼 제멋대로 문장이 써지는 것이 아니라, 저자란 거시적으로도 미시적으로도 나름의 의도를 갖고 당연히 창작에 임하기 마련입니다―물론 그 의도 자체가 언어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입니다만……. 그래서 저는 ‘저자의 의도’라는 것을 일체 무시 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시도하기보다는 그가 이제까지 어떤 작품을 써왔으며, 어떤 작가에게 영향을 받 아왔는지, 그리고 소설 이외의 장소에서 어떤 언동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자기 나름의 해석을 시도하는 편이 솔직히 말해서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저자의 죽 음’ 운운하며 큰소리를 쳐본들 어떤 작품을 어느 한 사람이 썼다고 하는 사실 자체는 절대로 은폐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 사실을 절대로 의식하지 않겠다는 태도에는 너무나도 관념적이며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이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간간이 찾아볼 수 있게 되어―실제로 인공지능이 쓴 『해리포터』 시리즈의 속편이라는 것도 이미 등장했습니다―, 그런 생각지도 않은 이유 때문에 인간이 소설을 쓴다는 것의 의미가 다시금 새롭게 의식되는 것 아닐까요?
저는 작품과 저자라고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좀 더 부연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문학이 완성된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라고 한다면, 작가들끼리 일부러 이런 장소에 서 교류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설가로 데뷔했을 무렵에는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작품에 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며, 그 이상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고. 그러나 그 후 약 20년 사이에 저는 가령 오에 겐자부로 씨처럼 경애하는 작가의 말씀을 접하며 소설의 언어와는 다른 소설가의 언어, 혹 은 시의 언어와는 다른 시인의 언어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은 작가가 되기 이전 평범한 독자 시절부터 그들의 에세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육성을 접하고, 그 순간적인 표정을 엿봄으로써 보다 더 강렬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로서의 저는 항상 작품과 작가의 틈새에 있습니다. 작품은 어떤 한 명의 작가가 쓴 것이 분명하며, 그리고 작가는 어떤 한 작품을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지금 들어온 예처럼 반드시 아름다운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요즘 미투 운동에 의해 다양한 표현 분야에서 여성들이 이제까지 당해온 성차별, 성폭력을 고발하 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데, 그 경우에도 과연 성추행을 하는 사람의 작품은 부정되어야 하는 것인 지, 혹은 작품은 작품으로서 별도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가령 카라바조는 사람을 죽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그 성스러운 작품을 미술관에서 전시하면 안 되는 걸까요? 문학의 경우 예전에는 프랑수아 비용이 역시 살인을 범했고, 그 사실을 시에도 적었 습니다. 2020년에 사망 50주년을 맞는 미시마 유키오는 여전히 그의 문학과 정치행동과의 관계로 인 해 독자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런 사례들을 보면 저자를 은폐하고 작품의 ‘순수감상’이라고 부를 만한 입장을 관철하는 것은 역시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와 작품과의 ‘무관계’에 가까울 정도의 거리라고 하는 발상은 미디어의 발전에 의해 생긴 현상 중의 하나일 겁니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예술가, 문인의 작품은 감상할 가치가 없다고 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그들이 표현활동의 기회를 갖는 것은 피해자의 감정에서 보면 용서하기 힘든 이야기겠죠. 피해자가 직접 그 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경우에는 강제적인 조치도 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작품과 저자 그 어느 쪽도 은폐하지 않고, 그 어느 쪽에도 ‘죽음’을 선고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인간이 라고 하는 이 불가사의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이 성대한 포럼의 개회에 저자와 작품과의 관계에 대해 조금 불길한 이야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찌 되었든 작품과 저자는 함께 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작품을 읽으며, 이런 식으로 실제로 대면한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시점을 바꿔보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소설 속에서 절대로 저자의 투영만은 아닌, 각종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봅니다. 호감 가 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불쾌한 인간도 있고, 또한 그 호감 가는 인물에게도 싫은 부분이 있고, 그리고 악인 중에 아름다운 일면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작품이 있고 작가가 있듯이, 중국의 작가, 한국의 작가가 쓰는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 현실의 중국인과 한국인이 존재한다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역시 작품세계와 현실세계의 그 틈새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작가로서의 입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제가 어떤 소설을 썼다는 사실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소설 은 본래 다성적(多聲的)이고 허구이며, 그 전체가 저라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제가 소설에 쓴 어떤 특수한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는 일본사회를, 혹은 인간 세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하는 셈이지만, 거기에 적힌 일본사회로부터, 혹은 인간 세계로부터 제 표현에 대한 공감만이 아니라 당연히 반발의 목소리도 이따금 나옵니다. 그건 아니지 않나 하고.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대지진은 일본 작가에게 ‘당사자성(當事者性)’이라고 하는 커다란 문제를 다시금 던져주었습니다. 쓰나미나 원자력발전소 사고의 피해를 직접 입은 사람들과 간접적으로 입은 사람들, 아무 관계도 없었던 사람들, 친족이나 지인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입지 않은 사람들, 그 지역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그런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이 긴 일본열도 속에 함 께 살고 있어, 거기에는 일종의 분단이 발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감’이라는 단어 하에 국민 전 체의 일체감이 강조되었지만, 그런 식으로 개인보다도 공공성을 중시하는 사고의 부정적인 측면도 간 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방관자가 당사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작가가 항상 직면하는 문제이지만, 대지진 때는 그것이 극도로 첨예화되었습니다. 워낙에 피해지역으 로부터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시시각각으로 인터넷상에 공개되었으며, 피해를 입지 않은 자는 관여하거 나 접근하기가 어려워, 피해지역을 소설로 허구화하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어딘지 모르게 경솔한 행동 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피해자의 심경은 피해자만이 알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주저에 더해서, 현 실의 너무나도 복잡한 상황을 개편함으로써 뭔가를 잃게 되고, 뭔가를 덧붙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염 려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지진에서 조금 벗어난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조금 전에 언급한 『결괴』라고 하는, 살인을 주제로 한 소설에서 어린아이를 살해당한 부모의 심경을 상세히 썼습니다. 당시에 독신이었던 저는 과연 자신의 그 표현에 리얼리티가 있을까 하고 자문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저에게는 지금 어린 자녀가 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 해당 부분을 다시 읽어봤는데 저는 이것이 거짓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실제로 어린 자녀가 둘 있는 지금의 나라면 도저히 이런 식으로는 쓸 수 없 을 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상상만으로도 너무나도 괴로워서 아마 정신적으로 못 견뎠을 거라는 느낌 이 든 겁니다.
물론 어떤 경우의 당사자에게는 절대적인 현실이 있겠지요. 그러나 본인이 그 사건의 의미를 생각하 고 표현할 수 있을지 어떨지, 표현하고 싶을지 어떨지, 그리고 표현해야 할지 어떨지는 별개의 문제입니 다. 거기에는 역시 타자가 애써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표현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해야만 극복할 수 있는 당사자와 비-당사자 간의 분단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자가 반드시 그 인물의 투명한 매개자는 아닐 겁니다. 그가 도대체 어떤 역사적, 구조적인 배경에 놓인 존재인지를 분석해, 보다 폭넓은 시점에서 그를 변호하는 역할도 종종 떠맡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독자로서의 제 문학체험의 근간에는 항상 그것이 있었습니다. 즉 어떻게 이 저자는 자 신의 이런 심정을 이 정도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과 감동입니다. 그때 저자가 비슷한 체험 의 당사자였다면 그건 그걸로 하나의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 고, 자신이 지금 처해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곤경에 처한 작가가 눈길을 주어, 때로는 아름답게, 그 리고 때로는 강력한 언어로 대변해 준다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공감이 되었습니다. 물론 거듭 말하지 만, 거기에는 항상 그건 틀렸다고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는 김연수 씨나 은희경 씨와 같이 비교적 연령이 비슷한 한국 작가들이 쓰는 소설의 팬입니다. 이 두 사람 역시 동아시아문학포럼에서 친교를 쌓고 우정을 키워온 작가들입니다.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있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와 같은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들에 대한 경애의 마음이 강해지고, 어떻게 한국의 작가들은 인간에 대해 이토록 깊고 섬세 한 통찰이 깃든 표현이 가능할까 하고, 제 작업을 되돌아보며 다소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한국의 작 가’라는 것은 너무나도 엉성한 표현으로, 실제로는 그들이 특별한 건지도 모르지만, 제가 그렇게 느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한 가지는 일본의 문단을 훑어보고 그들과 비견할 만한 비슷한 세대의 작가로 누가 있을까 하 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제 마음이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 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묘사하는 ‘현대인’은 결국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똑같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일본과 한국만이 아니라, 글로벌화된 오늘날 세계의 도시 지역에서는 특히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는 매우 비슷 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표현의 완성도가 더 욱 부각되어 느껴지게 마련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김연수 씨가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국풍 81’의 무대에 선 코미디언의 몰락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애절하게 묘사하는 것을 읽고 있을 때, 저는 한국인이 일본인과는 얼마나 다른 배경에서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상은 그들과의 실제 교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다름이라는 의미에서는, 톄닝 씨의 『목욕하는 여인들』이나 쑤퉁 씨의 『강기슭』에서 묘사되는 문화대 혁명은 일본 독자에게 너무나도 먼 현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접근 방법이 다른 두 작품에 공 통적으로 나타나는 저자의 약자에 대한 시선에서, 저는 역시 저와 매우 가까운, 매우 유사한 감정과 사고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경우에도 역시 이 포럼의 뒤풀이에서 술잔을 기울이면서 접한 그들의 표정이 어른거리곤 합니다.

우리는 서로 타자라는 것은 분명하며, 게다가 공존하고 있는 타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셈이지만, 동시에 절대로 상대를 전부 이해한다는 식의 오만에 빠져서 도 안 됩니다. 결국에는 아무래도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상대의 마음속에는 있다,―그런 겸허 함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단지 타자를 편리한 자기 자신의 투영물처럼 취급하게 될 따름입니다. 특히 작가에 대해서 충분히 반론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 혹은 더 이상 절대로 반론이 불가능한 망자와 같 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시도는 결정적으로 실패할 게 틀림없습니다.
오랜 세월 소설을 쓰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독자의 감상을 접할 기회가 있습니다. 제가 언제나 놀라 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그들이 이따금 작자인 저보다도 제 소설 속 등장인물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한 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실제로 몇 번인가 “히라노 씨는 그 주인공의 심정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저를 매우 당혹스럽게 하는 말이지만, 그러나 소설가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기도 합 니다. 왜냐하면 소설을 쓰면서 등장인물이 살아 있는 존재로 느껴지는 것은 저 자신이 완전히 파악 못 한 뭔가를 제가 창작한 인물들이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이니까요. 그런 반론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저 입을 꽉 다문 침묵 속에서 기척만으로 전해져 오는 경우도 있습 니다.

인간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지금은 무척 평판이 나쁜 표현으로, 저도 그것을 강변할 생각은 없습니 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작가이자 독자이며, 동서고금의 문학이 오랜 세월에 걸쳐 사색하고 표현해온 인간관과 세계관에 의해 우리의 정신이 함양된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한국이나 중국 작가의 작품에 서 자신과 똑같은 인간을 발견하는 것은 그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이 바로 작가와 작품과 의 관계, 그리고 작품과 현실과의 관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문학 같은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날마다 우리 귀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 우 기묘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시장원리주의자든 시장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그 상품이 도움이 되느냐 여부가 아니라, 단적으로 말해서 ‘가치’가 있느냐의 여부이니까요. 도움이 된다는 것은 기껏해 야 가치 중의 한 요소에 불과합니다.
저는 사실상 문학도 실제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문 학에 가치가 있다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서울이라는 이 현실의 장소에 작품과 작가가 모이고, 독자가 모이고, 나아가서는 독자가 아닌 사람 들의 광대한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그 틈새에서 가 능한 것이 아닐까요?
두 번째 사이클로 접어든 이 동아시아문학포럼이 의미 있는 교류의 장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번역 : 김옥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