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아우의 인상화 印像画

아바나, 영혼은 탈탈 털리고 심장은 도취하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의 만남 '진흙과 풀꽃'

대한민국, 2018년 늦가을

특집을 기획하며 동아시아문학 공동의 집 시간과 우리 작가와 작품, 독자와 현실의 틈새에 서서 ①주요 발제문 다시 읽기➍ 작품교류-전통 ①주요 발제문 다시 읽기➎ 작품교류-차이 ①주요 발제문 다시 읽기➏ 작품교류-미래 ①주요 발제문 다시 읽기➐ 작품교류-독자 ②한중일 동아시아문학포럼 참관기 ③한중일 대표 공동 기자간담회

“어둠 속에서 둘이서,어둠 속에서 나홀로”

차이(差異)의 매혹

강릉 유가(儒家)의 군자

쓰지 않아도 된다

길 위에서

검박한 스승, 굴산사 당간지주

동아시아와 세계, 우주에 대한 새로운 성찰

의약분업의 효시

내 글의 스승, 가스통 바슐라르

속간 《문예중앙》, 2010년 가을 통권 제123호로부터

숲은 아름답고 깊지만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네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네

①기차를 타고 밤 약속,월동준비 ②당분간 달콤,홀로그래피

①사람 사는 집 ②네가 웃어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잊히지 않는 일들

①최근 역사 영화의 한 경향에 대해 ②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③주인도 제목도 없는

①시대의 아픔 위에 놓인 애도의 문학 ②제26회 대산문학상 수상작리뷰

고민과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하기 위한 노력들

소설이 묻고, 영화가 답하다

인생 리셋을 위한 자기 계발의 과학

파라나 강물 위에는 그를 기리는 꽃잎이 흐른다

한국문학 번역, 어렵고 힘들지만 “계속해보겠습니다”

강 저편과 여기

기다림의 미학

대산세계문학총서149,150

대산창작기금, 한국문학 번역지원,외국문학 번역지원

대산문화재단 신창재 이사장 은관문화훈장 수훈 등

다시 읽는 우리 문집

동아시아와 세계, 우주에 대한 새로운 성찰

- 홍대용의 『담헌집』

글·사진제공 조운찬 ㅣ 경향신문 논설위원. 1963년생


■ 북학파, 담헌 홍대용의 계승자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어가다 보면 여러 곳에서 담헌 홍대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담헌의 말을 직 접 인용하는가 하면, 담헌과의 추억을 되새긴다. 그런가 하면 담헌이 북경에서 만난 중국인 친구의 행적을 찾기도 한다.
압록강을 건넌 지 나흘째 되던 날, 연암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라고 할 책문(柵門)에 이르러 제 대로 된 중국의 민가와 도로를 만난다. 하늘로 솟은 집의 등마루, 정제된 대문과 창문, 벽돌 담장, 길을 누 비는 수레와 마차. 그는 불현듯 친구 홍대용이 했던 “그 규모는 크고, 기술은 세밀하다”는 말을 떠올리며 처음 목도한 중국의 문명에 기가 꺾인다.
심양의 골동품 가게 ‘예속재’에 들러 선비들과 얘기하던 연암은 그 가운데 한 명의 고향이 강남의 항주라 는 말을 듣고 “육비, 엄성, 반정균을 아느냐?”고 묻는다. 항주 사람인 이들 세 사람은 담헌이 북경에서 만 나 평생토록 우정을 나눈 중국인들이다. 이뿐 아니다. 열하의 태학관에서 달을 보면서 서울에서 함께 달 구경 했던 홍대용을 생각하고, 중국 학자들과 우주론을 펼칠 때에는 홍대용의 지전설을 들려준다. 김태준 교수에 따르면 『열하일기』에는 홍대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25곳이나 된다고 한다. 중국 문명, 연행과 관련 해 이른바 북학파로 불리는 학자들은 홍대용으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홍대용이 쓴 연행록 『연 기(燕記)』를 돌려가며 읽고, 청나라를 새롭게 보게 됐으며, 연경(북경)에 갈 꿈을 갖게 됐다. 박지원이 『열하 일기』를 쓰면서 홍대용의 연행록을 가장 많이 참조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박제가는 네 차례나 북경을 방문하며 중국 지식 인들과 교유했다. 그는 『북학의(北學議)』를 통해 청 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자고 주장했다. 이덕무, 유 득공도 강도는 달랐지만, 중국의 선진 문명을 흠모 했다. 홍대용의 연행 경험은 박지원, 이덕무, 박제 가를 거쳐 추사 김정희에까지 이어졌다. 모두 중국 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들이다. 학계에서는 북학 파를 연암학파 또는 담헌학파로 부르고 때로는 절 충해 담연학파로 명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 북학의 원류를 따져 본다면 홍대용이야말로 북학파의 종장(宗匠)이자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 연행록, 삶을 바꾼 북경 여행의 기록
홍대용(1731~1783)은 충청도 천원군 수산면 장산리 수촌에서 홍역(洪櫟)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천원군 은 지금의 천안이다. 홍대용의 집안은 서울에서 대대로 벼슬을 하던 경화세족으로, 서울 남산 아래에 본가가 있었고, 천안에도 농장을 갖춘 별도의 집이 있었다.



홍대용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12살 때 남양주 석실서원으로 가 스승 김원행에게 배웠다는 사실은 밝혔다. 석실서원은 병자 호란 때 충절로 이름을 날린 김상용과 김상 헌 형제를 배향한 곳이다. 서원의 원장은 김 상헌의 후손인 김원행이었다. 김원행은 주 자학의 공리공론을 비판하며 실용적인 학 문을 강조했는데, 홍대용은 스승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홍대용은 훗날 중국인 친구 문헌(汶軒) 등사민(鄧師閔)에게 주는 편지에서 “열댓 살 때부터 고학(古學) 에 뜻을 두어 문장이나 짓는 고루한 공부는 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나라를 경륜하는 공 부에 뜻을 두었다. 이로 인해 여러 번 과거 에 응시했으나 합격이 되지 않았다”고 쓴 적이 있다. 과거 공부가 인격 수양과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며 크게 힘을 쏟지 않았던 것이다.
홍대용의 젊은 날의 행적은 밝혀진 게 많지 않다. 따로 자신의 삶이나 연보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특이한 사건은 29세 때 과학 기술에 눈을 뜬 일이다. 당시 홍대용은 나주목사인 부친을 따라 전라도 나주에서 살았는데, 화순 지방의 문인 나경적을 만나 그와 함께 혼천의와 자명종을 만들었다. 그때 만든 혼천의와 자명종을 천안의 고향집에 설치했다. 이를 계기로 홍대용은 서양의 천문학과 지리, 수학, 역법 등에 관심을 갖게 됐고, 청나라에 눈을 떴다. 북경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이때였다.
홍대용은 조선을 벗어나 큰 세계를 보고 싶었다. 당시 청나라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오랑캐의 나라 가 어떻게 태평을 구가하는가도 궁금했다. 홍대용은 중국 여행에 대비해 중국어도 배웠다. 오랫동안 중국 여행의 꿈을 간직했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숙부 홍억(洪檍)이 1765년 6월 연행사절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홍대용의 연행은 홍억의 수행원 자격으로 이루어졌다. 연행기간은 1765년 11월 2일부터 이듬해 5월 2일 까지 6개월이었다. 그의 중국 경험은 이때 한 번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6개월은 홍대용의 삶을 바꾸었다. 연행이 없었다면 홍대용은 역사에서 기억되지 못했을 것이다.
연행을 다녀온 홍대용은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 『연기(燕記)』는 연행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홍대용 은 연행록을 날짜별로 쓰는 편년체가 아닌 주제별로 기록하는 기사체(紀事體)로 정리했다. 새로운 방식이 었다. 한문으로 쓴 『연기』와 별개로 한글본인 『을병연행록』도 썼다. 이것은 편년체 방식으로, 한문에 익숙지않은 부녀자들에게 청나라와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게 목적이었다. 홍대용은 여행기와 별개로 중국에서 사귄 지식인들과 나눈 필담 기록과 편지글을 묶어 『항전척독(杭傳尺牘)』으로 펴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한 『담헌서』는 모두 4권이다. 이 가운데 『연기』와 『향전척독』이 각각 1권씩으로 『담헌서』의 절반을 차지한다. 여기에 중국 요령성 의무려산을 무대로 쓴 철학 소설 『의산문답』과 중국 지식 인들과 주고받은 시를 포함시키면 절반이 넘는다. 평생 쓴 저술의 절반 이상이 6개월간의 중국 경험에서 나왔다. 그만큼 홍대용에게 중국 체험이 끼친 영향은 컸다.

■ 「간정동필담」, 국경을 뛰어넘은 우정을 담아내다
『담헌서』에서 가장 이채로운 글은 『향전척독』이다. 중국인들과 주고받은 시문과 편지를 책으로 펴낸 사 람은 우리 역사에서 홍대용이 처음이다. 연행에 출발하기에 앞서 홍대용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중국의 선진 문물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중국의 지식인들과 만나 대화하는 게 더욱 절실했다.

“을유년 겨울에 나는 숙부를 따라 연경에 갔다. 압록강을 건너면서부터 보이는 것이 새롭지 않은 게 없었지만 내가 원하는 바는 아름다운 학자나 마음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서 그와 더불어 실컷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 「간정동필담」

홍대용은 여행 내내 중국 사람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다.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이르 는 동안 그가 만난 사람들은 문장과 학문의 수준이 낮아 대화할 만한 상대가 못 되었다. 그는 ‘선비’로 불 릴 만한 중국 지식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연행단에 동행한 이기성이 안경을 사 러 북경 유리창에 갔다가 중국인으로부터 안경을 선물 받은 것이다. 사례를 하려 했지만 “안경 하나에 어 찌 좀스럽게 굴 수 있겠느냐”며 어떤 대가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감격한 이기성은 이 이야기를 홍대용에게 들려줬고, 홍대용은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일 것이라며 그들을 찾아 나섰다. 기대는 벗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만난 중국 지식인은 항주 전당이 고향인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均)이었다. 엄성은 35세, 반정균 은 25세. 당시 홍대용의 나이는 36세였다. 홍대용은 첫 만남에서부터 중국 지식인들에게 푹 빠졌다. 한 번 보고서도 정이 쌓인다는 ‘일견종정(一見鍾情)’,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홍대용이 머문 북경 조선관과 그들의 숙소 사이의 거리는 불과 2킬로미터 남짓이었다. 홍대용은 중국어를 할 수 있었으나 대화에서는 주로 필담 을 사용했다. 대화 주제는 경학, 시문, 서화, 역사, 풍속, 과학 등에 두루 걸쳐 있었다. 만난 지 20일이 지 나자, 엄성과 반정균이 ‘강남 제일의 인물’이라며 육비(陸飛)를 홍대용에게 소개했다. 육비가 가세하면서 대 화는 깊고 넓어졌다. 만남은 홍대용이 북경을 떠나기까지 1개월간 계속됐다. 홍대용은 이 기간 중 이들과 일곱 번을 만났다. 만나지 못한 날에는 편지와 시를 주고받았다.
홍대용은 1766년 3월 1일 북경을 떠나 5월 2일 서울에 도착했다. 북경에서 작별할 때, 교분이 두터웠던 엄성은 “이 한 번 이별로 그만이구려! 저승에서 서로 만나도 부끄러움이 없게 살기를 맹세합시다”라고 하 며 눈물을 흘렸다. 홍대용은 돌아온 뒤 중국인 친구들과 북경에서 주고받은 편지와 필담을 정리한 뒤, 「간 정동회우록」이라고 이름 붙였다. 서울에서도 편지를 통한 대화는 이어졌다. 오가는 데 1년 넘게 시간이 걸 렸다. 그 사이 엄성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홍대용은 제문을 지어 보냈는데, 글이 항주에 도착한 것은 공교 롭게도 엄성의 두 번째 기일이었다. 엄성의 죽음으로 홍대용과 중국 친구들과의 교류는 끝났다. 홍대용은 「간정동회우록」과 서울에서 보낸 편지들을 합쳐 『향전척독』으로 묶었다. 홍대용의 국경을 초월한 우정은 이후 북학파의 심금을 울렸다. 이덕무는 홍대용이 중국 문인들과 주고받은 시문과 필담 기록을 간추려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를 남겼다.

■ 『의산문답』,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다
조선 연행사들이 북경에 갈 때 자주 찾는 곳 가운데 하나가 의무려산이다. 요령성 북진(北鎮)시 서쪽 5 킬로미터 지점에 있으며 해발 867미터이다. 중국 전통의 5악(嶽)4진(鎭) 가운데 북쪽 진산(鎭山)으로, 도 교의 성지로 불린다.
홍대용의 연행단은 북경에서 서울로 오던 길에 의무려산에 올랐다. 관음동, 도화동, 서하동 등을 두루다니며 산 아래에 있는 북진묘도 들렀다. 중국 천하체계관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의무려산에서 홍대용은 많 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북경에서 오랑캐 나라의 문명을 목도하고, 명나라 유민들인 항주 출신 중국 친구 들과 대화하면서 조선의 소중화 의식이 얼마나 허망된 것인가를 깨달았다. 서울로 돌아온 홍대용은 당시 조선의 현실과 사유체계를 총체적으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전설 등 그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결합시켜 새 로운 사상체계를 만들어갔다. 『의산문답』은 바로 북경을 다녀온 홍대용이 평생의 연구 성과를 종합한 사상서라고 할 수 있다.
『의산문답』은 의산, 즉 의무려산을 무대로 허자와 실옹이라는 두 가상인물이 나누는 문답 형식으로 이 루어져 있다. 허자는 성리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조선의 학자를 대표한 다. 반면 실옹은 허구적인 유학에서 벗어나 인간과 세상을 실사구시적으로 파악하려는 인물이다. 허자와 실옹은 인간과 만물은 어떻게 다른가, 중국과 오랑캐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지구는 어떤 모양인가, 지구는 하늘의 중심인가 등의 문제를 주고받으며 기존의 통념을 하나하나 비판한다. 그러면서 사람과 만물이 똑 같다는 ‘인물균(人物均) 사상’,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 중국이 중심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 등을 들려준다. 사실 실옹이 제시하는 이러한 내용은 바로 홍대용의 생각이다.
홍대용은 성리학, 천문학, 인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조선 유학자들의 통념과 편견을 깨뜨리 고 동아시아와 천하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산문답』은 인간과 역사, 자연과 우주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철학서이자 자연과학서라고 할 수 있다. 홍대용은 『연 기』와 『항전척독』을 통해 중국 경험을 산문 형태로 남겼다. 그리고 못다 한 생각을 전하기 위해 소설 형식 의 『의산문답』을 지었다. 홍대용에게 중국 여행은 이처럼 연행 기록, 대화록, 소설 등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박지원에 이르러 중국 여행은 『열하일기』 하나에 통합되었다. 『열하일기』 속의 「호질」, 「허생전」 은 홍대용의 『의산문답』식 글쓰기 방식을 모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산문답』의 저작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대략 43세 때인 177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듬해 홍 대용은 세손 시절의 정조 임금을 보위하는 익위사 사직을 제수 받으며 관직에 첫 발을 내디딘다. 정조가 즉위해서는 사헌부감찰과 태인현감, 영천군수 등의 벼슬살이를 한다. 이 기간 중에 동궁과 주고받은 말을 기록한 『계방일기』, 관리의 경험을 토대로 한 국가경영론 『임하경륜』 등의 저작을 남긴다. 이들 책은 총론격 인 『의산문답』을 실제 생활에 적용한 각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한다. 홍대용이 53세 나이에 중풍으로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홍대용의 생각은 북학파 실학자들에게 계승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