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을 기획하며 동아시아문학 공동의 집 시간과 우리 작가와 작품, 독자와 현실의 틈새에 서서 ①주요 발제문 다시 읽기➍ 작품교류-전통 ①주요 발제문 다시 읽기➎ 작품교류-차이 ①주요 발제문 다시 읽기➏ 작품교류-미래 ①주요 발제문 다시 읽기➐ 작품교류-독자 ②한중일 동아시아문학포럼 참관기 ③한중일 대표 공동 기자간담회
속간 《문예중앙》, 2010년 가을 통권 제123호로부터
숲은 아름답고 깊지만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네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네
①기차를 타고 밤 약속,월동준비 ②당분간 달콤,홀로그래피
①최근 역사 영화의 한 경향에 대해 ②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③주인도 제목도 없는
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1.
2018년 노벨상 수상자가 결정되었다. 화학, 물리학, 생리학 (또는 의학), 평화, 경제학 등 5개 분야다. 문학 부문은 수상자를 내지 않 고 ‘사고 분야’로 남겼다. 연초부터 거세게 불어 닥친 전 지구적 ‘미 투’ 운동의 여파다. 언제부턴가 노벨상은 결코 강대국이 아닌 스웨 덴이 세계의 과학과 문화를 통치하는 무기가 되었다. 경제학과 과학 부문은 선진 강대국의 독무대나 마찬가지다. 문학상과 평화상은 정 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평소에 스웨덴 한림원 의 원칙 없는 횡포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문인 세력은 급기야 ‘노벨상 대안 문학상’을 제정하여 수상자를 내기도 했다. 여러 해 동안 ‘유력 한’ 후보로 거론되었던 한국 시인은 저절로 정리되었다. 그의 퇴장을 계기로 새로운 국민후보를 추천하는 작업이 요란스럽다. 자신의 작 품을 서둘러 서구어로 번역하는 후발 문인도 있다고 한다. 내년 문 학상은 금년 몫을 더하여 두 사람을 선정한다는 풍문에 더욱 귀가 솔깃해졌을 것이다.
노벨상은 누구에게나 영광이지만 우리나라만큼 열망이 강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해마다 시즌이 되면 언론과 대중은 가히 집단 광기가 발동한다. 어김없이 이 웃나라 일본의 성과와 비교하며 열패감에 사로잡힌다. 한때 교보문고 광화문점 입구에 역대 노 벨문학상 수상자 사진이 도열해 있었다. 맨 끝에는 사진 없는 액자에 ‘미래의 한국인 수상자’라 는 간절한 기도문이 적혀 있었다. 2000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시킨 현직의 김대중 대통 령에게 평화상이 수여되자 열광적인 축하와 시샘이 함께 따랐다. 금년도 평화상 수상자 발표를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이 수상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월 중에 신청 절차를 마감하는 일정을 감안하면 실로 뜬금없는 풍설이다. 이 또한 노벨상 광기의 여파일 것이다. 하기야 초강대 국인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상에 대한 노골적인 탐욕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역대 노벨평화 상 수상자 그 누구도 인류는커녕 자기 나라의 평화도 정착시키지 못했다. 상은 성과보다는 진심 된 노력에 대한 격려의 의미가 담겼을 뿐이다. 평화협상의 길에 나선 김정은과 트럼프도 수상자 격이 없을 수 없다.
2.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일찌감치 문재인 대통령을 일러 유능한 ‘협상가(negotiator)’로 소개했다. 날이 갈수록 예측이 적중했다는 평가가 따르고 있다. 평양은 물론 미국과 중국, 러시 아와 프랑스, 그리고 교황청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평화의 협상 길에 분주하다. 어색한 일본과 도 각을 덜 세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듣는 자세는 협상가의 최대 미덕일 것이다.
누구를 상대해서도 시종일관 웃음으로 일관하는 대통령의 속은 얼마나 타고 있을까, 알 만한 사람은 안쓰러운 마음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 치적은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국민의 일부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분단과 대립과 긴 장에 편승하여 이익을 누리던 집단은 평화가 정착되면 외려 아쉬움마저 느낄지 모른다. 사사건 건 트집을 잡고, 심지어는 문 대통령이 ‘김정은 대변인’이라는 악담도 공공연히 뇌까리는 정치인 도 적지 않다.
게다가 모든 국민은 평화에 더하여 경제적 윤택을 갈구한다. 국제적 개방경제를 표방하는 대 부분의 나라에서 경제는 국내 정책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세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모 든 경제정책은 돈의 흐름과 나눔의 문제다. 어떤 경제정책도 이해관계가 다른 계층과 집단의 합 의를 이룰 수가 없다. 경제가 일시 부침을 겪더라도 70년간 한국 국민의 뇌리를 점하고 있으며 무시로 악몽을 재현해 온 무력 전쟁의 위험만 제거한다면 그것만으로 문 대통령은 청사에 빛나 는 업적을 남긴 지도자가 될 것이다.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리는 평화만”이라는 그의 겸양지사(謙讓之辭)가 더욱 빛날 것이다.
남북한 평화 공존의 문제는 고전적인 민족주의 담론을 뛰어넘어야 한다. 일찍이 한스 콘 (Hans Kohn)은 역작 『민족주의론(Nationalism)』(1955)에서 키플링(R. Kipling, 1865~1936)의 시 「이방인(The Stranger)」을 인용했다.
“내 문안에 들어선 이방인, / 진실할 수도 친절할 수도 있다. / 그러나 그의 말은 내 말과 다르고, 그의 속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 / 그의 얼굴, 눈 그리고 입을 보아도, / 그 뒤에 숨어있는 마음은 알 수 없다. / 나의 동포들은 나쁠 수도 좋을 수도 있다. / 그들이 하는 거짓말을 나도 하고 / 내가 하는 거짓말을 그들도 한다. / 물건을 사고 팔 때 우리 사이에 통역이 필요 없다.”
언어를 포함한 집단의 동질성을 민족 개념의 핵심으로 삼던 시대였다. 그러나 콘과 키플링의 민족주의 담론으로는 한반도 문제를 접근할 수 없다. 시대가 다르고, 세대가 다르다. 이제 남북 한 언어도 통역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 따지고 보면 언어는 작은 문제다. 남북한 주민은 정치적, 문화적 사고와 가치관이 크게 다르다. 그 차이를 좁히는 데는 장구한 세월이 소요될 것이다.
게다가 냉정하게 말하면 정치적 수사야 어떠하든 한반도의 통일은 더 이상 당위가 아니라 선 택의 문제일 뿐이다. 통일보다 평화적 공존이 핵심이다. 민족 전체의 동질성보다는 개개 국민의 개성과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를 도모해야 한다. 태극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걸린 모습을 참을 수 없는 분단, 반공 세대의 윤리와 정서를 벗어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 세칭 ‘태극기 부대’의 윤리와 정서로는 평화를 얻지도 유지하지도 못한다. 철 지난 이데올로기로 뭉친 집단은 합리적 선택에 근거한 현실적 효용을 중시하는 개개인의 집합을 이길 수 없다.
3.
유발 하라리만큼 21세기 세계인의 주목을 끄는 지식인도 드물다. 하라리의 3부작,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안』을 차례차례 읽으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빨려 들 어가게 된다. 인간이 모든 생물을 복속시키고 만물의 영장으로 지구를 호령할 수 있게 된 것은 ‘가상의 질서(화폐, 국가, 종교, 법)’를 발명한 덕분이다. 과학이라는 신무기로 신을 죽여 버리고 서도 신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쌍둥이혁명을 겪고 있는 21세기 인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이번 세기 중에 알고리즘을 통한 인간 내 부의 통제와 생명의 설계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감정과 이성은 인공지능, 알고리즘 에 주도권을 내줄 것이다. 그렇다면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인간이 건설해온 세상과는 판이하게 다 른 세상이 될 것이다. 물러나는 세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고 무섭다. 자유와 자본의 질서가 정제된 조화를 이루어,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낙토로 불리던 아메리카 땅에 도널드 트럼프라는 변종 지도자가 출현하고, 정보통신수단의 신속 보편화로 전 세계를 동시 무대로 하는 ‘가짜 뉴 스’가 횡행하는 세월이다. 한때는 인류의 희망이었던 아메리카는 이제 자국의 이익만을 챙기는, 그저 그런 하나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국제정치의 관점에서 남북한의 문제를 압축하면 중국과 미국, 양대 슈퍼파워 사이의 각축이 다. 중국은 세계인의 상식이 된 시장의 자유는 받아들여도 정치의 자유는 경계한다. 시진핑의 임기 연장 가능성을 열어준 지난해 중국의 개헌은 트럼프의 재선을 대비한 방어책이라는 해석 도 있다. 중국과 북한은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불가능하다. 민중봉기를 통한 체제 변경도 생 각하기 힘들다. 그러기에 일관된 대외정책을 펼 수 있다. 중국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제국 과 유교적 유산에 눈 뜨면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단원적 정치체제가 서구식 선거민주주의 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1920년대 노신(魯迅), 양계초(梁啓超) 등 개화기 중국 지식인 들은 입을 모아 보통선거제도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 지 식인과 인민의 생각은 마찬가지다. 만약 어설프게 보통선거제도를 채택했다가는 시진핑 대신 트 럼프와 같은 인간이 지도자가 되는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먹혀드는 중국이다. 선거는 이성적인 제도가 아니다. 언론도 대중도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오로지 깨어 있는 집단지성만이 공적 제도를 이성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그들의 확신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 선거를 통해 정기적으로 민심의 소재를 확인하는 정치제도다. 그러기에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전면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이명박-박 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의 차이나, 미국 역사상 최대의 빈민 구조정책이라는 ‘오바마 케어’를 하루 아침에 백지로 만든 트럼프의 정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청와대가 운영하는 온라인 국민청원제도는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 는 ‘직접민주주의’의 의미가 크다. 신속하게 건설적인 제안이 국정운영에 도움이 되는 예도 적지않다. 그러나 온라인 통신은 상식과 이성 대신 생경한 열정과 감성이 주도할 수도 있다. 사려 깊 은 성찰보다는 즉흥적인 변덕의 무대가 될 위험도 농후하다. 공적 의제보다 개인적 불만을 토로 하는 쓰레기장으로 변질된다.
공적 의제가 아닌 사적 차원의 온라인 언론의 폐해는 막심하다. 무책임하게 ‘질러대고는’ 이내 잊어버리는, 윤리의식이 마비된 네티즌들의 활주로가 된다. 가해자는 잠시 승리감에 도취하지 만, 피해자의 상처는 오래 아물지 않는다. 이러한 신종 범죄에 대처할 법은 더디기만 하다. 그러 나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활발한 의사소통을 강조한다. 설령 말과 글을 무기로 타인의 인격을 무참히 유린하는 악마와 무뢰한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더라도 이를 사전에 막 을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여기에 현대사회의 크나큰 고민이 있다.
4.
허먼 멜빌의 명 단편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1853)는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 적 현상인 인간 소외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법률가를 화자로 삼아 그의 관점에서 노동과 인간의 문제를 서술한다. ‘월스트리트 이야기(A Story of Wall Street)’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월스트리 트는 미국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다. 금융과 법률이라는 자본주의의 두 핵심 기재가 결합하여 인간성을 유린하는 사회의 상징이다. 또한 거리 이름의 어원처럼 ‘벽’으로 차단된 사회, 인간 사 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각종 벽과 담이 즐비한 숨통 막히는 사회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동물농 장’이다. 한 세기 반도 전에 이미 작가는 인류의 장래를 예언한 듯하다. 글로벌 금융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사생아 공룡이다. 1퍼센트의 절대 탐욕이 99퍼센트의 삶을 지배할 수 있도록 방관 하는 사회 제도다. 세계 도처에 월스트리트의 축소판이 탄생한다.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이는 두 축은 삼성과 김앤장법률사무소라는 세속의 냉소적 수사 속에 진실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하라리의 논제 중에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은 ‘세속주의(14장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안」)’ 다. 세속주의의 핵심적 가치는 (과학적) ‘진실’이다. 진실은 믿음과 다르다. 세속주의는 진실에 더 하여 ‘연민(compassion)’을 핵심가치로 삼는다. 어떤 주제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 관련된 사람들 의 감정적 차원과 지적 차원, 그리고 영적 깊이까지 배려한다. 세속주의는 실험할 자유를, 그리 고 그 실험에 대한 책임을 중시한다. 그러나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기술혁명은 빅데이터 알고 리즘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정당성의 기반을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다. 컴퓨터에게는 인간의 삶의 중요한 부분인 잠재의식이 없다.
신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종교적 권위로 신의 지위를 정당화했듯이 인간의 권위를 정당화한 것은 자유주의였다. 인문학은 인간학이다. 개개 인간이 모두 고유한 존재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전제에 선다. 그리하여 인간의 사유와 경험을 공동체 차원에서 존 중하고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지혜의 원천을 배양하는 것이 인문학의 임무였다. 이제 그런 통합 적 지식과 지혜의 보고로서의 인문학은 죽음의 계곡 앞에 서 있다. 인간의 경험은 데이터로 완 벽하게 정리되고, 인간의 사유와 감정조차도 AI 알고리즘의 인도와 지시를 받게 될 운명이다.
5.
사람들은 자신의 발로 투표한다고 한다. 여행하면서 마음으로 살고 싶은 나라를 택한다. 대한 민국도 살기 괜찮은 나라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형편이 어려운 지역의 사람에게는 일자리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국인 인구가 200만을 훌쩍 넘어섰고, 이에 더하여 적지 않은 탈북 새터민들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조화롭게 사는 나라가 낙토다. 오래도록 한국은 OECD 국가 중에 가장 폐쇄적인 나라라는 평판이 따랐다. 인종적 편견이 심하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가혹한 차별이 횡행한다는 국제적 비난을 달고 살았다. 그러나 근래 들어 점차의 개선의 정황이 역력하다. 지난 10월 17일 법무부는 제주도에 불시착하여 난민 신청을 한 예멘인 481명 가운데 339명에게 인도적 체류를 허가했다. 과거에 비하면 획기적인 조치다. 앞서 10월 7일, 경기도 고 양시의 저유소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무심코 풍등을 날려 원인을 제공한 스리랑카 청년 노동자 에게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검찰은 인권을 내세워 제동을 걸었고, 국회도 드물게 여, 야 가 한 목소리로 경찰을 비판했다. 국민도 외국인 청년의 부주의보다 정부의 안전 불감증을 비판 하고 나섰다. 종전의 기준으로 보면 이례적인 일이다.
2018년 늦가을, 국내외 온갖 불화와 반목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의연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 다. 2019년은 더욱 나아갈 것이다. 설령 노벨상과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은 거머쥐지 못할지라도 분명히 역사의 진보에 동참할 것이다.
대한민국, 2018년 늦가을
글 안경환 ㅣ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1948년생
저서 『법과 문학 사이』 『남자란 무엇인가』 『에세이, 셰익스피어를 만나다』 『좌우지간 인권이다』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역서 『동물농장』 『두 도시 이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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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노벨상 수상자가 결정되었다. 화학, 물리학, 생리학 (또는 의학), 평화, 경제학 등 5개 분야다. 문학 부문은 수상자를 내지 않 고 ‘사고 분야’로 남겼다. 연초부터 거세게 불어 닥친 전 지구적 ‘미 투’ 운동의 여파다. 언제부턴가 노벨상은 결코 강대국이 아닌 스웨 덴이 세계의 과학과 문화를 통치하는 무기가 되었다. 경제학과 과학 부문은 선진 강대국의 독무대나 마찬가지다. 문학상과 평화상은 정 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평소에 스웨덴 한림원 의 원칙 없는 횡포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문인 세력은 급기야 ‘노벨상 대안 문학상’을 제정하여 수상자를 내기도 했다. 여러 해 동안 ‘유력 한’ 후보로 거론되었던 한국 시인은 저절로 정리되었다. 그의 퇴장을 계기로 새로운 국민후보를 추천하는 작업이 요란스럽다. 자신의 작 품을 서둘러 서구어로 번역하는 후발 문인도 있다고 한다. 내년 문 학상은 금년 몫을 더하여 두 사람을 선정한다는 풍문에 더욱 귀가 솔깃해졌을 것이다.
노벨상은 누구에게나 영광이지만 우리나라만큼 열망이 강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해마다 시즌이 되면 언론과 대중은 가히 집단 광기가 발동한다. 어김없이 이 웃나라 일본의 성과와 비교하며 열패감에 사로잡힌다. 한때 교보문고 광화문점 입구에 역대 노 벨문학상 수상자 사진이 도열해 있었다. 맨 끝에는 사진 없는 액자에 ‘미래의 한국인 수상자’라 는 간절한 기도문이 적혀 있었다. 2000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시킨 현직의 김대중 대통 령에게 평화상이 수여되자 열광적인 축하와 시샘이 함께 따랐다. 금년도 평화상 수상자 발표를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이 수상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월 중에 신청 절차를 마감하는 일정을 감안하면 실로 뜬금없는 풍설이다. 이 또한 노벨상 광기의 여파일 것이다. 하기야 초강대 국인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상에 대한 노골적인 탐욕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역대 노벨평화 상 수상자 그 누구도 인류는커녕 자기 나라의 평화도 정착시키지 못했다. 상은 성과보다는 진심 된 노력에 대한 격려의 의미가 담겼을 뿐이다. 평화협상의 길에 나선 김정은과 트럼프도 수상자 격이 없을 수 없다.
2.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일찌감치 문재인 대통령을 일러 유능한 ‘협상가(negotiator)’로 소개했다. 날이 갈수록 예측이 적중했다는 평가가 따르고 있다. 평양은 물론 미국과 중국, 러시 아와 프랑스, 그리고 교황청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평화의 협상 길에 분주하다. 어색한 일본과 도 각을 덜 세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듣는 자세는 협상가의 최대 미덕일 것이다.
누구를 상대해서도 시종일관 웃음으로 일관하는 대통령의 속은 얼마나 타고 있을까, 알 만한 사람은 안쓰러운 마음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 치적은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국민의 일부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분단과 대립과 긴 장에 편승하여 이익을 누리던 집단은 평화가 정착되면 외려 아쉬움마저 느낄지 모른다. 사사건 건 트집을 잡고, 심지어는 문 대통령이 ‘김정은 대변인’이라는 악담도 공공연히 뇌까리는 정치인 도 적지 않다.
게다가 모든 국민은 평화에 더하여 경제적 윤택을 갈구한다. 국제적 개방경제를 표방하는 대 부분의 나라에서 경제는 국내 정책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세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모 든 경제정책은 돈의 흐름과 나눔의 문제다. 어떤 경제정책도 이해관계가 다른 계층과 집단의 합 의를 이룰 수가 없다. 경제가 일시 부침을 겪더라도 70년간 한국 국민의 뇌리를 점하고 있으며 무시로 악몽을 재현해 온 무력 전쟁의 위험만 제거한다면 그것만으로 문 대통령은 청사에 빛나 는 업적을 남긴 지도자가 될 것이다.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리는 평화만”이라는 그의 겸양지사(謙讓之辭)가 더욱 빛날 것이다.
남북한 평화 공존의 문제는 고전적인 민족주의 담론을 뛰어넘어야 한다. 일찍이 한스 콘 (Hans Kohn)은 역작 『민족주의론(Nationalism)』(1955)에서 키플링(R. Kipling, 1865~1936)의 시 「이방인(The Stranger)」을 인용했다.
“내 문안에 들어선 이방인, / 진실할 수도 친절할 수도 있다. / 그러나 그의 말은 내 말과 다르고, 그의 속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 / 그의 얼굴, 눈 그리고 입을 보아도, / 그 뒤에 숨어있는 마음은 알 수 없다. / 나의 동포들은 나쁠 수도 좋을 수도 있다. / 그들이 하는 거짓말을 나도 하고 / 내가 하는 거짓말을 그들도 한다. / 물건을 사고 팔 때 우리 사이에 통역이 필요 없다.”
언어를 포함한 집단의 동질성을 민족 개념의 핵심으로 삼던 시대였다. 그러나 콘과 키플링의 민족주의 담론으로는 한반도 문제를 접근할 수 없다. 시대가 다르고, 세대가 다르다. 이제 남북 한 언어도 통역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 따지고 보면 언어는 작은 문제다. 남북한 주민은 정치적, 문화적 사고와 가치관이 크게 다르다. 그 차이를 좁히는 데는 장구한 세월이 소요될 것이다.
게다가 냉정하게 말하면 정치적 수사야 어떠하든 한반도의 통일은 더 이상 당위가 아니라 선 택의 문제일 뿐이다. 통일보다 평화적 공존이 핵심이다. 민족 전체의 동질성보다는 개개 국민의 개성과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를 도모해야 한다. 태극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걸린 모습을 참을 수 없는 분단, 반공 세대의 윤리와 정서를 벗어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 세칭 ‘태극기 부대’의 윤리와 정서로는 평화를 얻지도 유지하지도 못한다. 철 지난 이데올로기로 뭉친 집단은 합리적 선택에 근거한 현실적 효용을 중시하는 개개인의 집합을 이길 수 없다.
3.
유발 하라리만큼 21세기 세계인의 주목을 끄는 지식인도 드물다. 하라리의 3부작,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안』을 차례차례 읽으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빨려 들 어가게 된다. 인간이 모든 생물을 복속시키고 만물의 영장으로 지구를 호령할 수 있게 된 것은 ‘가상의 질서(화폐, 국가, 종교, 법)’를 발명한 덕분이다. 과학이라는 신무기로 신을 죽여 버리고 서도 신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쌍둥이혁명을 겪고 있는 21세기 인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이번 세기 중에 알고리즘을 통한 인간 내 부의 통제와 생명의 설계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감정과 이성은 인공지능, 알고리즘 에 주도권을 내줄 것이다. 그렇다면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인간이 건설해온 세상과는 판이하게 다 른 세상이 될 것이다. 물러나는 세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고 무섭다. 자유와 자본의 질서가 정제된 조화를 이루어,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낙토로 불리던 아메리카 땅에 도널드 트럼프라는 변종 지도자가 출현하고, 정보통신수단의 신속 보편화로 전 세계를 동시 무대로 하는 ‘가짜 뉴 스’가 횡행하는 세월이다. 한때는 인류의 희망이었던 아메리카는 이제 자국의 이익만을 챙기는, 그저 그런 하나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국제정치의 관점에서 남북한의 문제를 압축하면 중국과 미국, 양대 슈퍼파워 사이의 각축이 다. 중국은 세계인의 상식이 된 시장의 자유는 받아들여도 정치의 자유는 경계한다. 시진핑의 임기 연장 가능성을 열어준 지난해 중국의 개헌은 트럼프의 재선을 대비한 방어책이라는 해석 도 있다. 중국과 북한은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불가능하다. 민중봉기를 통한 체제 변경도 생 각하기 힘들다. 그러기에 일관된 대외정책을 펼 수 있다. 중국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제국 과 유교적 유산에 눈 뜨면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단원적 정치체제가 서구식 선거민주주의 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1920년대 노신(魯迅), 양계초(梁啓超) 등 개화기 중국 지식인 들은 입을 모아 보통선거제도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 지 식인과 인민의 생각은 마찬가지다. 만약 어설프게 보통선거제도를 채택했다가는 시진핑 대신 트 럼프와 같은 인간이 지도자가 되는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먹혀드는 중국이다. 선거는 이성적인 제도가 아니다. 언론도 대중도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오로지 깨어 있는 집단지성만이 공적 제도를 이성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그들의 확신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 선거를 통해 정기적으로 민심의 소재를 확인하는 정치제도다. 그러기에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전면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이명박-박 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의 차이나, 미국 역사상 최대의 빈민 구조정책이라는 ‘오바마 케어’를 하루 아침에 백지로 만든 트럼프의 정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청와대가 운영하는 온라인 국민청원제도는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 는 ‘직접민주주의’의 의미가 크다. 신속하게 건설적인 제안이 국정운영에 도움이 되는 예도 적지않다. 그러나 온라인 통신은 상식과 이성 대신 생경한 열정과 감성이 주도할 수도 있다. 사려 깊 은 성찰보다는 즉흥적인 변덕의 무대가 될 위험도 농후하다. 공적 의제보다 개인적 불만을 토로 하는 쓰레기장으로 변질된다.
공적 의제가 아닌 사적 차원의 온라인 언론의 폐해는 막심하다. 무책임하게 ‘질러대고는’ 이내 잊어버리는, 윤리의식이 마비된 네티즌들의 활주로가 된다. 가해자는 잠시 승리감에 도취하지 만, 피해자의 상처는 오래 아물지 않는다. 이러한 신종 범죄에 대처할 법은 더디기만 하다. 그러 나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활발한 의사소통을 강조한다. 설령 말과 글을 무기로 타인의 인격을 무참히 유린하는 악마와 무뢰한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더라도 이를 사전에 막 을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여기에 현대사회의 크나큰 고민이 있다.
4.
허먼 멜빌의 명 단편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1853)는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 적 현상인 인간 소외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법률가를 화자로 삼아 그의 관점에서 노동과 인간의 문제를 서술한다. ‘월스트리트 이야기(A Story of Wall Street)’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월스트리 트는 미국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다. 금융과 법률이라는 자본주의의 두 핵심 기재가 결합하여 인간성을 유린하는 사회의 상징이다. 또한 거리 이름의 어원처럼 ‘벽’으로 차단된 사회, 인간 사 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각종 벽과 담이 즐비한 숨통 막히는 사회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동물농 장’이다. 한 세기 반도 전에 이미 작가는 인류의 장래를 예언한 듯하다. 글로벌 금융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사생아 공룡이다. 1퍼센트의 절대 탐욕이 99퍼센트의 삶을 지배할 수 있도록 방관 하는 사회 제도다. 세계 도처에 월스트리트의 축소판이 탄생한다.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이는 두 축은 삼성과 김앤장법률사무소라는 세속의 냉소적 수사 속에 진실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하라리의 논제 중에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은 ‘세속주의(14장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안」)’ 다. 세속주의의 핵심적 가치는 (과학적) ‘진실’이다. 진실은 믿음과 다르다. 세속주의는 진실에 더 하여 ‘연민(compassion)’을 핵심가치로 삼는다. 어떤 주제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 관련된 사람들 의 감정적 차원과 지적 차원, 그리고 영적 깊이까지 배려한다. 세속주의는 실험할 자유를, 그리 고 그 실험에 대한 책임을 중시한다. 그러나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기술혁명은 빅데이터 알고 리즘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정당성의 기반을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다. 컴퓨터에게는 인간의 삶의 중요한 부분인 잠재의식이 없다.
신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종교적 권위로 신의 지위를 정당화했듯이 인간의 권위를 정당화한 것은 자유주의였다. 인문학은 인간학이다. 개개 인간이 모두 고유한 존재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전제에 선다. 그리하여 인간의 사유와 경험을 공동체 차원에서 존 중하고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지혜의 원천을 배양하는 것이 인문학의 임무였다. 이제 그런 통합 적 지식과 지혜의 보고로서의 인문학은 죽음의 계곡 앞에 서 있다. 인간의 경험은 데이터로 완 벽하게 정리되고, 인간의 사유와 감정조차도 AI 알고리즘의 인도와 지시를 받게 될 운명이다.
5.
사람들은 자신의 발로 투표한다고 한다. 여행하면서 마음으로 살고 싶은 나라를 택한다. 대한 민국도 살기 괜찮은 나라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형편이 어려운 지역의 사람에게는 일자리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국인 인구가 200만을 훌쩍 넘어섰고, 이에 더하여 적지 않은 탈북 새터민들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조화롭게 사는 나라가 낙토다. 오래도록 한국은 OECD 국가 중에 가장 폐쇄적인 나라라는 평판이 따랐다. 인종적 편견이 심하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가혹한 차별이 횡행한다는 국제적 비난을 달고 살았다. 그러나 근래 들어 점차의 개선의 정황이 역력하다. 지난 10월 17일 법무부는 제주도에 불시착하여 난민 신청을 한 예멘인 481명 가운데 339명에게 인도적 체류를 허가했다. 과거에 비하면 획기적인 조치다. 앞서 10월 7일, 경기도 고 양시의 저유소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무심코 풍등을 날려 원인을 제공한 스리랑카 청년 노동자 에게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검찰은 인권을 내세워 제동을 걸었고, 국회도 드물게 여, 야 가 한 목소리로 경찰을 비판했다. 국민도 외국인 청년의 부주의보다 정부의 안전 불감증을 비판 하고 나섰다. 종전의 기준으로 보면 이례적인 일이다.
2018년 늦가을, 국내외 온갖 불화와 반목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의연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 다. 2019년은 더욱 나아갈 것이다. 설령 노벨상과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은 거머쥐지 못할지라도 분명히 역사의 진보에 동참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