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쉽게 씨워진 시

“살아있는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도쿄 아사쿠사의 광대, 새로운 문학과 혁명을 꿈꾸었던 시인의 자화상

릴케의 천사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다

특집을 기획하며 ①시장 속의 문학 ②“비탄의 시대에 시인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③미래에 관한 회상 ④살아남기 위한 자들의 언어

빨간 장미 한 송이

최후의 북촌 구식 현모양처이자 최초의 자유 신여성

시인이 안 됐으마 제비가 됐을 꺼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었던 「천체수업」

밤하늘의 투명한 시선들

평양에 갔을 때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천의 얼굴을 가진 조선의 천재’ 허균의 『성소부부고』

역사와 예술이 어우러진 ‘바다의 땅’, 통영

문인들의 ‘목뽑기’ 풍경 셋

정의론의 방법에 대한 질문

①진한 노을,초봄 개울에서 ②기러기떼 헛 가위질하듯,한네의 승천

①동전처럼 ② 오샤와 Oshawa

사물놀이

첫 번째|뒤늦게 눈뜬 재능 두 번째|혼자 있는 시간의 고요 세 번째|합포 산호동 옛집 네 번째|매미 오줌 맞기

①제25회 대산문학상 시·소설 부문 본심 대상작 선정 ②우리 문단에 당도한 새로운 감수성

유미리의 한국어

사실의 기록보다 더 무심한 영화, ‘전장’을 온전히 드러내다

소설의 귀환과 그늘

여백을 어루만지고 퇴고하다

낯선 것을 낯설지 않게 옮기기

추리와 역사 사이에서

이 세상은 꿈, 꿈이야말로 진실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

2017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 등

다시 읽는 우리 문집

‘천의 얼굴을 가진 조선의 천재’ 허균의 『성소부부고』

글과 사진제공 조운찬 ㅣ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 소장. 1963년생

 
1980년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출간한 완역본
『국역 성소부부고』



‘천의 얼굴을 가진
조선의 천재’
허균의 『성소부부고』



▲ 강릉 허균 생가에 봉안된 ‘허균 초상’     ©
2016년 9월 강원도 강릉시 허균·허난설헌 유적공원에서는 ‘호서장서각터 안내판’ 제막식이 열렸다. 조선시대 허균(許筠, 1569~1618)이 설립한 호서장서각을 추억하는 자리였다. 호서장 서각(湖墅藏書閣)은 이름 그대로 경포호 근처 허균 집안의 별 장에 세워진 장서각, 곧 도서관이다. 1만여 권의 책을 소장했다 고 한다. 『성소부부고』의 ‘호서장서각기’에는 도서관 건립에 대한 전말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 독서인 ◆
허균은 독서인이다. 아니 책벌레였다. 독서의 양뿐 아
니라 폭 에 있어서도 독보적이었다.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에는 시, 산문 할 것 없이 허균의 독서 내용이 가득 실려 있다.

공명이란 우리들의 것이 아니니 / 책이나 우선 서로 친해 보세 [功名非我輩 書史且相親](詩 「有懷」)
벼슬은 허깨비지만 / 문장은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 / 어떡하면 만년에 절개를 지킬 수 있을까 / 공 자가 주역을 읽듯이 읽고 또 읽으리라[軒冕眞同幻 文章不直錢 何如全晩節 三復絶韋編](詩 「雜詠」)




그가 가장 가까이 하고자 한 것은 명예도, 벼슬도, 부귀도 아니었다. 책이었다. 그는 읽고 또 읽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당시 통용되던 유가의 책만 읽은 게 아니었다. 이탁오의 『분서』와 같은 금서도, 양명 학과 같은 이단의 서적에도 손을 댔다. 그의 사유는 당시 주류 가치인 성리학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허균은 1614년과 1615년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를 다녀왔다. 처음 사행은 성절사로, 다음에는 진주사 의 직책을 띠었다. 두 번의 사행에서 그는 수많은 책을 사서 귀국하였다. 들여온 책이 만 권을 넘었다. 『성소부부고』뿐 아니라 시선집 『국조시산』, 소설 『홍길동전』 등에는 그의 독서편력이 녹아 있다. 중국의 아름다운 문장을 모은 소품집 『한정록』에는 인용된 중국 도서가 무려 100종 가까이 된다. 책을 혹독히 좋아했던 그는 『한정록』에 독서관련 항목만을 추려 ‘정업’(靜業)편으로 묶었다.
중요한 사실은 허균이 자신의 장서를 혼자 독점하지 않고 공유하려 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공공도서 관의 개념을 생각한 것이다. 호서장서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도서관이다.

◆ 이단의 사상가 ◆
독서는 생각을 키우고, 생각은 다른 사상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한다. 허균은 양반 사대부 집안의 후손 이다. 아버지 허엽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고위관료였으며, 형 허성과 허봉도 조정의 명신으로 활약했다. 또 누나 허난설헌은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꼽히는 지식인이었다. 허균은 역시 젊어서는 『논어』, 『맹자』, 『통감』과 같은 주류 사회의 커리큘럼을 학습했다. 급기야는 문과에서 장원급제할 정도로 유가 경 전을 통달했다. 그러나 훗날 조천(朝天) 사신이나 원접사로 명나라에 드나들면서 양명학 등과 같은 새로 운 학문에 눈을 떴다. 또 『능엄경』과 같은 불서에 탐닉하고 『노자』, 『열자』 등의 도가서도 열심히 읽었다. 개방적인 독서는 종법과 예학으로 얽힌 유교 사회에 대한 비판의 힘을 키웠다. 때론 인간의 윤리보다는 감정을 중시하는 양명학을 긍정하고, 노장의 신선세계를 꿈꾸기도 했다. 그에게 외부에서 강제하는 도덕 이나 가치, 법은 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길을 만들어갔다.
문집에 실린 「김종직론」은 권위에 도전하는 허균의 비판정신을 잘 보여준다. 당시 김종직은 사림의 영 수이자 도학의 최고 권위였다. 그러한 김종직을 허균은 벼슬이나 명예를 탐하는 이중인격자로 몰아붙였 다. 「조의제문」을 통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며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던 김종직이 세조의 조정에서 형조판서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김종직이 훗날 사화로 부관참시당한 것은 “(그의) 불행이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하고 교활한 행위를 주벌한 것”이라는 게 허균의 주장이다.
문묘(文廟) 배향은 당시 사림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문묘에 배향되는 학자는 그 순간 조선의 최고 지 식인으로 떠받들여지기 때문이다. 1610년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5인이 문묘에 배향되 었다. 이에 허균은 ‘학론(學論)’이라는 글을 통해 서경덕, 이이와 같은 학자가 거론조차 되지 않은 것은 매우 가소로운 일이라며 문묘 배향은 공과 사, 참과 거짓을 정확히 분명한 뒤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공격을 가했다.
허균은 성역 없는 비판으로 주류 사회에서 점점 외면당했다. 그는 당시 관료 사회에서 눈엣가시 같 은 존재였다. 반대파의 질시와 탄핵으로 파직과 유배가 반복되었다. 1607년 삼척부사 재임시에는 탄핵 을 받아 두 달만에 파직됐다. 승복을
2016년 9월 강릉시 허균·허난설헌 유적공원에 세운 ‘호서장서각터 안내판’   

입고 염 주를 걸고 재를 지내는 등 불자를 자처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허균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당당하게 ‘마이웨이’를 선언했다.

예교로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요 / 잘 되고 못 되는 건 정에 맡길 뿐 / 그대들은 그대들 의 법을 따르라 /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살 아가리라[禮敎寧拘放 浮沈只任情 君須用君 法 吾自達吾生](詩 「聞罷官作」)

예교의 규범이 옥죄어 올수록 허균은 자신의 길을 고수하였다. 그리고 영혼의 자유를 더욱 갈구하였 다. 그의 말대로 ‘권문에 발을 디디면 / 발꿈치가 곧 쑤셔댔고 / 높은 이와 서로 인사할 때는 / 몸이 얼어 붙은 듯 뻣뻣해졌다[足躡權門 其跟卒瘏 軒裳拱揖 如柱在軀](「對詰者」). 그는 점점 현달한 사대부들과 는 멀어졌고, 서얼 등과 같은 소수자들과 어울렸다. 그가 이재영과 같은 서얼의 친구가 된 것은 서얼 출 신 스승 이달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주류 양반 사회에 대한 거부감으로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不與世 合] 이단적인 성향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 사회개혁가 ◆
허균이 생전에 편찬한 『성소부부고』는 시(詩), 부(賦), 문(文), 설(說)의 4부(四部)로 구성되어 있다. 부 는 산문시, 설은 옛글의 전형적인 문체를 갖추지 못한 잡문이나 수필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성소 부부고』는 모두 26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허균의 생각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글은 11권 문부(文部) 에 실려 있는 「논」(論)이다. 이들 글은 허균을 개혁가나 혁명가로 얘기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논」 가운데 널리 알려진 글은 ‘유재론’(遺才論)과 ‘호민론’(豪民論)이다. 유재론은 조선에 인재가 드문 것은 땅이 좁아서가 아니고 서얼 차별로 강호에 묻힌 인재를 발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관리 등용 정 책을 비판한 논설이다. 서열 차별 금지를 선언한 대표적인 글이다.
호민론은 위정자는 깨어있는 백성, 즉 호민을 두려워하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정치 논설 이다. 허균은 백성을 항민(恒民, 항상 순종하는 백성), 원민(怨民, 원망은 하지만 저항하지 못하는 백성), 호민 등 세 부류로 나눈 뒤 이렇게 적고 있다.

호민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세가 편승할 만한가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 에서 한 차례 소리 지르면, 저 ‘원민’이란 자들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댄 다. 저 ‘항민’이란 자들도 역시 살아갈 길을 찾느라 호미, 고무래, 창 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 들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호민은 민중을 지도하는 계층이다. 허균은 중국 역사의 농민지도자들, 예를 들어 진승과 오광, 황건 적, 황소 등을 모두 호민으로 보았다. 그렇다고 허균이 『홍길동전』의 주인공이나 활빈당 같은 호민을 갈 구한 것은 아니다. 위정자들에게 민심의 무서움을 경고한 것이다.
또 다른 논설 ‘관론’(官論)은 업무가 중복되는 관직과 지나치게 많은 관리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행정 제도 개혁론이다. 조선시대 관직의 중복 업무실태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이를 중국의 제도와 비교하며 관료제도 전반을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허균은 또 ‘후록론’(厚祿論)에서는 관직과 관리의 수는 줄 이되 현직 관리에 대해서는 녹봉을 충분히 지급해 부정부패를 줄이고 일에 대한 책임성을 높이라고 조 언한다.


이밖에 ‘정론’(政論)에서는 정치의 방도와 관직의 제도를 논하고, ‘병론’(兵論)에서는 군사제도를 정비하 여 국방을 강화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허균이 이처럼 나라의 정치, 행정 전반에 대해 개혁론을 피력하 였다. 그것은 그가 예조좌랑, 병조정랑, 사복시정, 좌승지, 형조판서, 공주부사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한 데다 사회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문학비평가 ◆
허균은 당대 내로라하는 문장가였다. 그는 문과에 합격하던 26세에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 에 차출된 이후 외교사신으로 여러 차례 중국을 다녀왔다. 한시를 비롯한 글솜씨가 뛰어나 중국 사신을 대하는 데는 그만한 이가 없었다. 특히 시를 쓰고 평하기를 즐겨하여 중국과 조선의 한시나 빼어난 문 장을 뽑아 여러 종의 선집을 펴냈다. 『고시선』은 당나라 이전의 고대 중국시의 선집이고, 『당절선산』(唐 絶選刪)은 당시의 절구 선집, 『명사가시선』은 이몽양, 하정명, 이반룡, 왕세정 등 명나라 4대 시인의 시를 뽑은 선집, 『구소문략』은 구양수와 소동파의 문장 선집이다.
허균은 우리나라의 시에도 눈을 돌려 한 권의 시선집과 두 권의 시화집을 펴냈다. 시선집 『국조시산』 은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의 한시 800여수를 뽑은 선집으로 작품마다 간단한 시평을 가했다. 시화집은 『성수시화』와 『학담초담』이라는 이름으로 『성소부부고』에 실려 있는데, 전자는 통일신라부터 조선 중기 까지 역대 시인들의 시평을 담고 있으며, 후자는 허균 당대 시인들에 대한 시평집이다.
비평은 문학에 대한 관점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면, 허균은 자신만의 문학론을 갖고 있었다. 그것 은 남의 글을 표절하거나 모방하지 않은 독창성이다. 그는 자신만의 개성을 살려 일가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문학 스승인 손곡 이달에게 주는 편지[與李蓀谷]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시가 비록 예스럽긴 하나 이는 그대로 베껴 흡사할 뿐이니, 남의 집 아래에서 집을 짓는 게 어찌 귀 한 일이겠습니까. …… 저는 제 시가 당시나 송시와 비슷해질까 두려울 뿐이니, 남들이 ‘허균의 시’라고 말하기를 원합니다. 이게 지나친 일일까요?”[古詩雖古 是臨榻逼眞而已 屋下架屋 何足貴乎……吾則懼 其似唐似宋而欲人曰許子之詩也 毋乃濫乎]

허균은 무턱대고 개성적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모방하고 따져본 뒤에 변화를 이룬 다’[擬議以成變化]는 『주역』의 구절을 인용하며 옛것을 배우며 변화를 추구할 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뒷 날 연암 박지원이 말한 ‘법고창신’이다. 허균은 비록 법고창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생각에서는 연 암의 문학론과 일치한다. 허균의 문학비평의 힘은 바로 법고창신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허균을 독서인, 이단의 사상가, 사회개혁가, 문학비평가라는 열쇳말로 비춰 봤다. 그러나 이 것으로 그의 면모를 밝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소설가로서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 이외에 「남 궁선생전」과 같은 한문소설을 짓기도 했다. 미식가로서 전국 각지에서 맛보았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도문대작』(屠門大嚼)을 남겼다. 또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을 통해 당대의 관리들의 행적과 일화, 관직제도, 교유 인물들에 대한 뒷이야기를 기록한, 당대의 증언자이기도 하다.
‘군자는 한 그릇에 담아낼 수 없다’[君子不器]는 옛말이 있지만, 허균이야말로 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 는 인물이다. 그것은 그가 반역죄로 처형당해 오랫동안 ‘역사 속의 기피인물’이 되면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다행히 허균은 처형되기 몇 년 전에 자신의 시문을 손수 편집해 『성소부부고』라는 이름으로 남겼다. 성소(惺所)는 ‘깨어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허균의 당호이고, 부부고(覆瓿稿)는 ‘장독의 덮개로나 쓰일 책’이라는 뜻이다. 장독 덮개로 버려지지 않고 지금껏 전해지는 것은 천만 다행이다. 그러 나 ‘천의 얼굴을 가진 조선의 천재’ 허균의 면모는 소상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문집 『성소부부고』는 허균 의 맨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1차 사료이다. 문집에 빠져 있는 『홍길동전』, 『국조시산』, 『을병연행록』 등과 함께 일실된 시선집 등을 보면 허균의 전모가 드러날까? 2018년은 허균 서거 400주년. 이제부터라도 그 를 제대로 조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