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쉽게 씨워진 시

“살아있는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도쿄 아사쿠사의 광대, 새로운 문학과 혁명을 꿈꾸었던 시인의 자화상

릴케의 천사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다

특집을 기획하며 ①시장 속의 문학 ②“비탄의 시대에 시인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③미래에 관한 회상 ④살아남기 위한 자들의 언어

빨간 장미 한 송이

최후의 북촌 구식 현모양처이자 최초의 자유 신여성

시인이 안 됐으마 제비가 됐을 꺼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었던 「천체수업」

밤하늘의 투명한 시선들

평양에 갔을 때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천의 얼굴을 가진 조선의 천재’ 허균의 『성소부부고』

역사와 예술이 어우러진 ‘바다의 땅’, 통영

문인들의 ‘목뽑기’ 풍경 셋

정의론의 방법에 대한 질문

①진한 노을,초봄 개울에서 ②기러기떼 헛 가위질하듯,한네의 승천

①동전처럼 ② 오샤와 Oshawa

사물놀이

첫 번째|뒤늦게 눈뜬 재능 두 번째|혼자 있는 시간의 고요 세 번째|합포 산호동 옛집 네 번째|매미 오줌 맞기

①제25회 대산문학상 시·소설 부문 본심 대상작 선정 ②우리 문단에 당도한 새로운 감수성

유미리의 한국어

사실의 기록보다 더 무심한 영화, ‘전장’을 온전히 드러내다

소설의 귀환과 그늘

여백을 어루만지고 퇴고하다

낯선 것을 낯설지 않게 옮기기

추리와 역사 사이에서

이 세상은 꿈, 꿈이야말로 진실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

2017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 등

나의데뷔작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었던 「천체수업」

글 이윤택 ㅣ 극작가,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1952년생
시집 『시민』 『춤꾼이야기』, 평론집 『해체, 실천, 그 이후』, 희곡집 『이윤택 공연대본 전집』,
연기론 『영혼과 물질』 등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었던 「천체수업」


나의 데뷔작 「천체수업」은 1977년 1월 마산 양덕동 자취방에 서 초고가 쓰여졌다
그때 나는 한일합섬 염색가공부 나염계 염색기사였다. 매일 8 시간 의자도 없이 서서 짐머(Zimmer)란 이름의 오스트리아제 염색기계 앞에서 염료를 부어 넣는 일을 했다.
그동안 내 고향 부산에서의 시화전, 소극장 연극, 고전음악 다방 오아시스에서의 클래식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급하게 시험 쳐서 직장이라고 구한 것인데, 난생 처음 해 보는 공장 근로자 생활이 쉽지 않았다. 8시간 동안 서서 일해야 하는 데다 염료에 서 발생하는 아황산가스 때문에 기관지가 약한 나는 잦은 기침 을 해야 했다.
그러나 처음 만나 서로 부대끼며 사는 공장 사람들과의 나날 이 나쁘지 않았다. 같이 입사한 사원들 사이에서 나는 놀랍게도 조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덕분에 나는 매일 동료들의 일상을 챙 기는 역할을 해야 했다. 시를 꿈꾸던 연극배우가 졸지에 공장 근 로자 조장이 되어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평생 처음 경험하는 ‘함께 하는 삶’이 좋았다. 남자 동료들은 거 의 인문학적 세계에서 탈락한 ‘공돌이’ 인생들이었다.
여공들 대부분은 중학교 졸 업자들로 공장에서 직접 운영 하는 한일여고에 다니는 나이 많은 학생들이었다. 학교에 다

니면서 일할 수 있다는 조건에 묶여 열악한 노동 조건과 환 경 속에서도 그녀들은 묵묵히 잘 버텨 내었다. 월급날이 되 면 마산 경찰서에 비상이 걸리 고 여공들의 월급은 온갖 사 치품 월부금과 날건달들 유흥 비로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녀들은 브리태니커 영한사전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사실 그 영 한사전은 껍데기뿐이고 속은 도시락이었다. 영한사전의 꿈과 도시락이란 현실 사이에서 각자 나름의 사연이 있었고, 나름의 희망사항이 있었다. 나는 처음 경험하는, 소위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적 삶이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동료였던 누군가가 내게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으냐’고 물었 을 때, 나는 담담하게,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좋은 시를 쓰고 싶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주위 동 료들은 내 대답을 처음엔 낯설어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나의 열망을 그들은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우리 조장은 시를 꿈꾸는 공돌이다. 그들은 그렇게 나를 믿어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내가 쓴 시를 보고 싶어 했고, 나는 그들을 위해 정말 좋은 시를 써야 했다.

그날 밤 나무 추워서 잠을 깨었는데 연탄불이 꺼져 있었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나는 추운 자 취방에서 드디어 시 나부랭이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는데, 환하게 해가 뜰 때까지 40행이 넘는 긴 시 한편을 썼다. 그러나 아침에 보니까 자기현시욕으로 가득 찬 관념의 누더기 같아서 그만 서랍 속에 넣어 버렸다. 나는 결국 동료들에게 내가 쓴 시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불미스럽게 내 신분증에 붉은 글씨로 퇴사라는 낙인을 찍히게 된다. 나는 거친 말을 함부로 내뱉는 선임자에게 염 료를 타는 긴 쇠봉을 후려쳤고, 졸지에 무뢰한 폭력자가 되어 짧은 공장 근로자 생활을 마감한다.

그때 얻은 40행이 넘는 시 한 편을 계속 지우고 지워서 열행 정도가 남게 되었을 때, 나는 누군가 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부산 광복동 입구 백조다방은 문인 화가들의 아지트였다. 국제신문 주필로 계 시는 이형기 시인이 점심 나절이면 항상 이 다방에 오신다는 정보를 접한 나는 이형기 선생을 기다 렸고, 선생이 오후의 휴식을 즐기고 계실 즈음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네었다. “선생님께 제가 쓴 시를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형기 선생은 예의 그 날카로운 시선을 안 경너머로 흘낏 보시고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여덟 행 남은 시를 보여 드렸 는데, 한참을 보시던 이형기 선생은 “이왕 지우려면 마지막 행도 지우지”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기 성시인에게 생전 처음 지도를 받은 순간이었다.
그 이듬해 1978년 한국방송통신대학 신문에서 제1회 방송통신대문학상 공고가 났고, 나는 세 편 의 시를 투고했다. 그 속에 내가 쓴 「천체수업」이 포함되었고, 투고할 당시 나는 고민 끝에 마지막 행 을 지웠다. 서울대에 재직 중이신 황동규 시인이 심사를 하셨고, 그때 예심을 본 이성복 최미정 두 분은 나와 동년배의 서울대 대학원생이었고, 이성복 시인은 이미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시인이었는 데, 나는 그 당시 문단과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성복 시인을 몰랐다. 시상식장에서 만난 황동규 선생은 어디 시를 발표한 적이 있느냐 물었고, 나는 3년 전에 현대시학 신풍시집이란 신인 응 모작품에서 최우수작으로 당선된 적이 있다고 했고, 그렇다면 이왕 서울에 온 김에 현대시학 전봉건 선생에게 한번 들러 보라고 권하셨다.
그리하여 나는 서울역 뒤 충정로 골목길을 더듬어 올라 현대시학사를 방문했다. 아주 좁은 이층 목조 건물 방 한 칸에 키 큰 노신사 한분이 혼자 앉아 계셨는데 전봉건 시인이셨다. 황동규 선생이 가보라고 해서 왔다고 말하고 시 세 편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는데, 선생은 한 이삼 분 정도 가볍게 읽 어 보시고는 별 말이 없이 다른 원고를 읽고 정리하는 일을 하셨다. 나는 기다리다 못해 그만 가 봐 야겠다고 인사를 드리는데, 그때서야 선생께서 “그래, 돌아가서 추천완료 소감 원고지 석장 분량으로 보내” 그러셨다. 나는 그만 허탈해져서 엉뚱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러면 제가 시인이 되는 겁니 까?” 전봉건 시인은 그냥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한때 시를 꿈꾸었고, 또 한때 연극배우를 꿈꾼 죄 때문에 패가망신하여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 립되어 버린 20대 청춘이 당대의 시인 이형기 황 동규 전봉건 선생의 눈에 차례로 발견되어 1979 년 2월 현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애초에 함께 하는 삶을 나누었던 한일합섬 염색가공과 근로자들을 위해 쓴 시였고, 노동시와는 전혀 거리가 먼 시였다. 나 는 애시당초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형이상 학을 꿈꾸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