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쉽게 씨워진 시

“살아있는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도쿄 아사쿠사의 광대, 새로운 문학과 혁명을 꿈꾸었던 시인의 자화상

릴케의 천사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다

특집을 기획하며 ①시장 속의 문학 ②“비탄의 시대에 시인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③미래에 관한 회상 ④살아남기 위한 자들의 언어

빨간 장미 한 송이

최후의 북촌 구식 현모양처이자 최초의 자유 신여성

시인이 안 됐으마 제비가 됐을 꺼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었던 「천체수업」

밤하늘의 투명한 시선들

평양에 갔을 때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천의 얼굴을 가진 조선의 천재’ 허균의 『성소부부고』

역사와 예술이 어우러진 ‘바다의 땅’, 통영

문인들의 ‘목뽑기’ 풍경 셋

정의론의 방법에 대한 질문

①진한 노을,초봄 개울에서 ②기러기떼 헛 가위질하듯,한네의 승천

①동전처럼 ② 오샤와 Oshawa

사물놀이

첫 번째|뒤늦게 눈뜬 재능 두 번째|혼자 있는 시간의 고요 세 번째|합포 산호동 옛집 네 번째|매미 오줌 맞기

①제25회 대산문학상 시·소설 부문 본심 대상작 선정 ②우리 문단에 당도한 새로운 감수성

유미리의 한국어

사실의 기록보다 더 무심한 영화, ‘전장’을 온전히 드러내다

소설의 귀환과 그늘

여백을 어루만지고 퇴고하다

낯선 것을 낯설지 않게 옮기기

추리와 역사 사이에서

이 세상은 꿈, 꿈이야말로 진실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

2017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 등

창작 후기

여백을 어루만지고 퇴고하다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

글 한인준 ㅣ 시인. 1986년생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 등

여백을 어루만지고
퇴고하다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
글 한인준 ㅣ 시인. 1986년생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 등

첫 시집을, 첫 시집을 내기 전을, 처음으로 내가 시라는 것을 끄적이던 때를, 한꺼번에 돌아보면서 이 창작후기를 쓴다. 크게 달라진 건 없다고 생각한다. 크게 달라진 건 없다며
나는 이 창작후기를 다 쓰고 다른 마감을 위해 시를 쓰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난다. 드디어 생각난다. 옆에서 출발했는데 자꾸
앞으로 간다. 왜 나였고, 왜 너였고, 왜 우리였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그런 것을 무척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말하지 못하는 ‘나’를 썼다.

처음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빈 공간이 느껴졌다. 서로 내뱉지 못한 말들이나 그 빈 공간에 머물러있다고 느껴졌다. 그런 우글거리는 침묵 쪽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서로 내뱉지 못한 말이 많아질수록 침묵은 몸집을 불리고


여백이 왔다. 그런 여백을 퇴고했다.

여백을 고민하느라 평범한 문장 두 개를 몇 달 만에 그저 띄어서 쓰기도 했다.
문장들을 양옆에 담벼락처럼 세워두기도 했다. 담벼락 사이에는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쓰지 않고 마음속에 두었다.
때로는 하고 싶은 말 대신에 이상한 말을 썼다. 반대로 말해버리고 말았다. 잘못 말해버렸다.
내가 한 말에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았다. 여백은


뒤틀렸다.


자꾸 사라지지도 못하는 말들을 여백이라는 공간에 흘려두었다. 적어두어 박제된 말보다 발화되지 못한 채 떠도는 말에 눈길이 갔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여백이, 그 여백에는 질감이 있었다. 질감을 만지고 싶었다. 쓰다듬고 싶었다. 읽지 않고도 그저 보고 싶었다, 시를, 시라는 것을.


시를 촉각과 시각의 세계로 데려갈 수 있다고 믿었다.
내 성질의 이유로 가능할 것 같았다.


부정확한 것이 두려웠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었으나 정확하게 표현할 때마다 나는 나를 실패했다. 정확하려고 해서 실패했다. 정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정확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면 그만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로 무뎌지고 잊어버리는 그 어떤 것을 생각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없는 존재라면 그저 ‘부정확’ 자체만을 정확하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


이해나 인과가 필요하지 않아도 일방적으로 느껴지는 아프거나 괴롭고 무겁거나 혼란스러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여백이, 그 여백에는 질감이 있었다.
질감을 만지고 싶었다. 쓰다듬고 싶었다.
읽지 않고도 그저 보고 싶었다,시를, 시라는 것을.


어떤 ‘한꺼번에’를.


그런 ‘한꺼번에’가 나에게는 감정보다 상황에 가닿아 있었다.
과연, 정말, 그런데, 여전히, 아직, 기어코, 마침내, 등의 의미들도 나에게는 감정보다 상황에 가닿아 있었다.


감정의 정확함보다는 상황의 정확함이 보였다. 상황이 감정을 만들고
상황을 위해서


어디로든 가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지 않고도 가야 한다.
잘못과 못함과 아님의 것들에게 가야 한다. 어쩌면 다른 차원이 나타날 때까지
그러나 생활을 잃지 않아야 한다. 쉬워야 한다. 부드러워야 한다. 또 다시 마음이어야 한다.
대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까페든 방구석이든 매일 시를 쓰던 옛날에는 지금 이런 나를 몰랐
다. 직접 쓴 시를 친한 친구에게 보여주며 옆에서 마음을 졸이던 옛날에는 지금 이런 나를 몰랐
다. 단 하나의 공감만으로 하늘이 다 소중했던 옛날에는 지금 이런 나를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핑계가 되지 않아야 한다. 나아가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지 않고도 가야 한다.
옆에서 출발했는데 자꾸 앞으로 간다.


※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는 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2017년 창비에서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