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쉽게 씨워진 시

“살아있는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도쿄 아사쿠사의 광대, 새로운 문학과 혁명을 꿈꾸었던 시인의 자화상

릴케의 천사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다

특집을 기획하며 ①시장 속의 문학 ②“비탄의 시대에 시인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③미래에 관한 회상 ④살아남기 위한 자들의 언어

빨간 장미 한 송이

최후의 북촌 구식 현모양처이자 최초의 자유 신여성

시인이 안 됐으마 제비가 됐을 꺼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었던 「천체수업」

밤하늘의 투명한 시선들

평양에 갔을 때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천의 얼굴을 가진 조선의 천재’ 허균의 『성소부부고』

역사와 예술이 어우러진 ‘바다의 땅’, 통영

문인들의 ‘목뽑기’ 풍경 셋

정의론의 방법에 대한 질문

①진한 노을,초봄 개울에서 ②기러기떼 헛 가위질하듯,한네의 승천

①동전처럼 ② 오샤와 Oshawa

사물놀이

첫 번째|뒤늦게 눈뜬 재능 두 번째|혼자 있는 시간의 고요 세 번째|합포 산호동 옛집 네 번째|매미 오줌 맞기

①제25회 대산문학상 시·소설 부문 본심 대상작 선정 ②우리 문단에 당도한 새로운 감수성

유미리의 한국어

사실의 기록보다 더 무심한 영화, ‘전장’을 온전히 드러내다

소설의 귀환과 그늘

여백을 어루만지고 퇴고하다

낯선 것을 낯설지 않게 옮기기

추리와 역사 사이에서

이 세상은 꿈, 꿈이야말로 진실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

2017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 등

기획특집

④살아남기 위한 자들의 언어

- 세계화 시대의 문학

글 하진 HA Jin ㅣ 중국계 미국 소설가, 시인. 1956년 중국 출생. 개인과 가족, 현대와 전통, 사적 감정과 의무 간 긴장관계를 놓치지 않고 서술하는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1999년에 출간된 『기다림 Waiting』(1999)으로 그해 전미 도서상과 2000년 펜 포크너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외에도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소설상 펜/헤밍웨이 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붉은 깃발 아래 Under the Red Flag』(1997), 『전쟁 쓰레기 War Trash』(2004), 『보트 로커 The Boat Rocker』(2016) 등이 있다.

살아남기 위한 자들의 언어
- 세계화 시대의 문학

하지만 그들에게 영어로 글을 쓰는 일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이와 동시에 이 새로운 언어의 영역
안에서 문학적 존재감을 확보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들의 엄청난 문학적 성취에 경탄하지만, 영어권 문학의
영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기울였던 극심한 노력에
대해서는 거의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립주의라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오늘날의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그 속도가 늦춰질지도 모르나, 세계화라는 역사적 과정은 명백히 중단 없이 진행될 것입 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의 사람과 사람이 또한 문화와 문화가 번영과 발전 을 위해 만나고 뒤섞일 수밖에 없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가 만나게 되면, 때때로 중복 영역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창조되게 마련이지요. 그리 고 일부 사람들은 그런 공간에서 삶을 살아가고 또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들에게 중복 공간은 유동적이고 불투명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우선 누군가의 몇몇 좌표와 가치가 더 이상 본래 모습을 지킬 수 없거나 적용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유동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불확실성과 혼란이 커져서 누군가의 태도를 모호하게 하고 심지어 정체성까지 마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불투명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중복 영역은 우리가 의미 있게 존재하고자 할 때 우리 가운데 일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비옥한 지 역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주제는 문학이기에, 우리는 그와 같은 중복 영역에서 일하고 제 역할을 수행하는 작가와 언 어에 초점을 맞춰야 하고, 또한 이 영역에서 야기되는 문제점들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에 의하면, 중복 영역 안에 존재하는 작가들을 대체로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두 문화 또는 그 이상의 문화에 관해 글을 쓰되, 오로지 하나의 언어로, 그들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일차 언 어로 이 같은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차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 울여야 하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인도 출신의 대부분 작가는 첫째 유형에 속하며, 그들은 그들의 모 국에서 공식 언어인 영어와 더불어 성장했기 때문에, 영어는 그들의 일차 언어인 셈이지요. 그리고 부 모가 동아시아 출신인 아시아계 미국 작가들 가운데 일부도 그런 유형의 작가들입니다. 이창래, 맥신 홍 킹스턴, 에이미 탄, 기쉬 젠, 루스 오제키 등이 이 유형에 속하지요. 그들 모두는 영어를 자신들의 창작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창작에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가 영어입니 다. 창작 언어를 습득해야 하는 다른 유형의 작가들은 한층 더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왜냐하 면 그들은 때로 자신들의 환경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지만 생존을 위해 언어 습득의 노력을 계속해야 만 하는 그런 처지에서 투쟁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어지는 논의에서 초점을 맞추고 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둘째 유형의 작가들입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이 직면하는 몇몇 기본적 문제들 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주제에 대한 논의 전개를 이어가기 전에, 먼저 미국 이민자의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피할 수 없는 언 어 문제 가운데 몇몇을 예증해 주는 동시에 조명해 줄 수 있는 한 편의 소설 작품에 대해 간단하게 말 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문제의 작품은 시그리드 누네즈의 『신의 숨결에 날리는 깃털 A Feather on the Breath of God』입 니다. 지난 1995년에 출판된 이후 이 작품은 미국의 대학에서 강의 교재로 사용되어 왔으며, 특히 대 학생들 사이에서 열렬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는 젊은 소설가들에게 자극제가 된 일종의 생산적 소설이기도 하지요. 소설에 묘사된 이민 체험의 핵심에는 언어가 놓여 있 는데, 우리는 이 언어에 의해 작중인물들이 살아 온 삶의 대부분이 형성되고 또한 규정되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중인물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아버지인 카를로스 장으로, 그는 중국 인과 파나마인의 피가 반씩 섞인 혼혈인입니다. 그가 아기였을 때부터 열 살이 될 때까지 중국에서 살 았기 때문에 항상 중국이 자신의 고국이라고 느낍니다. 비록 그 이후에는 계속 파나마와 미국에서 살아 왔지만 말입니다. 그가 독일에서 미군으로 복무할 때, 독일인 처녀인 크리스타와 사랑에 빠지게 되 지요. 그리고 그녀에게 결혼을 하면 뉴저지에 작은 정원이 딸린 집을 갖기로 약속합니다. 하지만 미국 으로 와서 그는 뉴저지로 가는 대신 뉴욕의 차이나타운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식당 종 업원 일을 다시 하게 됩니다. 그가 차이나타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는 차 이나타운을 떠나 완전히 독자적으로 삶을 꾸려나가기가 두려운 것이지요. 하지만 그가 어떤 언어에 서도 거의 문맹에 가깝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두려움은 이해할 만한 것입니다. 또한 그 사실 때 문에 두려움은 더욱 강화됩니다. 그는 언어와 문화가 중복되는 공간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그는 오로지 두 언어와 문화 사이의 틈새에서만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심지어 집에서도 자 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 속에서 보냅니다. 심지어 아내가 딸들에게 지어 준 북유럽 식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아내인 크리스타는 역시 새로 이민 온 사람이지만 주로 연애소설을 읽음 으로써 영어를 빠른 속도로 습득합니다. 그녀는 이 새로운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합니다. 비록 관용적 표현에 실수가 있기도 하고, 억양이 자연스럽지 않지만 말입니다. 그녀가 영어로 말할 때 사람들은 그 녀가 백인인데다가 금발 머리의 소유자이지만 외국인―즉, “별난”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립 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칠 것을 거부합니다. 영어는 “아주 멋진 언어”이고 영어만 잘 하면 세상 어디를 가도 문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항상 독일로 돌아갈 것을, 그러니까 “고향으로 가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는 뉴욕에 있는 독일 식당에 가서도 영어로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영어가 점차적으로 모국어를 대신해서 그녀에게 일차 언어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마침내 자신의 고향땅을 다시 밟 게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기억해 온 독일이 더 이상 그곳에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녀의 고국 도 대체로 미국화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설상가상으로, 물건을 사러 가서 그녀는 물건 이름을 독일 어로 떠올리지 못합니다. 명백히 그녀의 이민 체험은 그녀를 내면으로나 외면으로나 바꿔 놓은 것이지 요. 심지어 모국어조차 이제 이차 언어가 된 것입니다.
크리스타에게는 칼이라는 이름의 남동생이 있는데, 그도 또한 미국으로 와서 미군 병사가 되어 군 복무를 합니다. 그는 베트남에 갔다가 젊은 베트남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 로 돌아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미국인으로 성장하여, 미국 남부 사투리의 영어를, 그것도 모국어인 독일어 억양이 전혀 감지되지 않은 영어를 구사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면에 서 보면, 칼의 변화는 완벽한 미국화의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민자가 새로운 나라에 와서 새롭 게 언어를 받아들이지만 환경과 언어 어느 면에서도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최근에 러시아에서 이민 온 바딤에 관한 기다란 서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술자는 그와 사랑을 하게 되는데, 부분적으로는 바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는 데 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가 겁이 없다는 데 이끌리기 때문이기도 합니 다. 겁이 없다는 것은 서술자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장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특성이지 요. 바딤은 영리하고도 대담한 남자로, 자신이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필수적인 사실 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습니다. 첫째, 더 이상 자신이 러시아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기에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서 삶을 살아가도록 애를 써야 한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둘째, 미국에 서는 오로지 충분한 영어를 습득함으로써만이 자신이 다시금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사실 그는 일상생활에서 모국어를 사용할 기회를 박탈당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이 손상을 입었다고 느낍니다. 그는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서술자인 자신의 영어 선생에게 다음을 강조해서 말합니다. 즉, 자신이 러시아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그녀를 설득하여 자신과 교제를 할 수 있게 만들 었을 것이라고. 바꿔 말해,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하는 경우, 그는 자신이 보다 더 유능한 유혹자의 역 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모국어를 상실한 것에 고통스러워하지만, 그와 동 시에 영어 공부에 헌신적으로 매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이는 생존의 문제이니까요. 그 때문 에 그는 결국에 가서 자신의 연인이 된 영어 선생에게 그녀가 바로 자신의 미국이라고 말하기도 합니 다. 그는 영어 구사 능력에 빠른 발전을 보입니다. 서술자가 그의 곁을 떠나고 나서 몇 년 후 두 사람 은 우연히 다시금 마주하게 되는데, 그녀는 그가 그 어떤 실수도 없이, 시제를 자유자제로 정확하게 바꿔가면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는 생존의 수단으로 새로운 언어를 습득한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하는 사람인 셈이지요.

소설은 이민 체험자들 누구나 절감하는 감정인 두려움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새로운 곳으로 이주할 때 느끼는 기본적인 감정이지요. 왜냐하면 새로운 사회 환경과 언어 환경에서는 이주 자의 내적 좌표가 심각하게 손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가치가 더 이상 새로운 환경에 적용될 수 없고, 신념 체계가 도전을 받기도 하고 종종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아에 대한 인식 자체도 점차적으로 불확실해지고 모호해지기 때문입니다. 최악의 경우, 모국어가 기능을 정지하 고, 모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상실되었을 때 새로운 장소에서 그는 종종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무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주자의 좌표를 이루는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과 비교할 때 언어는 가장 중요한 자 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 엄청난 두려움이 뒤따르게 마련이지요. 미 국 이민에 관한 소설에서 종종 이 두려움의 원인이 제시되는 동시에 극화(劇化)되기도 합니다. 예컨 대, 헨리 로스의 『선잠 Call It Sleep』에 등장하는 소년 데이비드는 보행자나 경찰관에게 길거리의 이 름을 제대로 발음하여 밝히지 못해, 집에 돌아가 엄마 품에 안길 수 없게 되어 두려움에 떱니다. 헨리로스의 소설은 새로 이민 온 소년의 두려움에 관한 것으로, 이 두려움은 소설 어디에나 침윤되어 있 는 감정이지요. 『신의 숨결에 날리는 깃털』의 경우, 두려움은 주요 작중인물인 모근 이민자의 내면 깊 숙이 스며들어 있는 동시에 그들을 지배하는 감정입니다.

자, 이제 누네즈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작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언어의 문 제들을 조명해 보기로 합시다. 물론 작가가 겪는 어려움은 다(多)차원적인 것이고 한층 더 형이상학적 인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예로 삼음으로써 우리는 작가들이 왜 고군분투의 세 월을 보내야 하는지의 이유를 이주민들의 실제 체험에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를로스 장 은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어떤 언어에서도 문맹입니다. 이는 명백히 그의 이주 생활에 기인 하는 것으로, 이주 생활로 인해 그는 그 어느 하나의 언어에도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최근에 저는 영어로 글을 쓰고자 하는 동아시아 출신의 젊고 야심찬 작가들을 종종 만나곤 했습니 다. 몇몇 경우, 그들은 세 가지 이상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다중 언어 사용자입니다. 예컨대, 독 일인 남성과 결혼한 한국 광주 출신의 한 젊은 여성은 한국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데, 현재 영어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그녀가 영어로 말은 유창하게 하지만 그녀가 영어로 쓴 글 은 문학 작품을 창작할 만큼 견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앞으로 오랫동안 고군분투의 시간을 보내 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언젠가는 그녀의 모국어인 한국어로 글을 쓸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으며, 한국어로 무 언가 글을 쓴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녀에게 한국어는 다만 가족과 말을 나눌 때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모국어에 관한 한,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셈이지요. 그런 모국어는 그녀에게 결코 일차 언어로서 기능할 수 없습니다.
타이완 출신의 또 다른 젊은 여성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합니다. 그녀에게 영어로 글을 쓰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영어는 성숙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그 녀의 영어가 창조적인 문학의 언어에 이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저는 그녀에게도 그녀의 모 국어인 중국어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겠냐는 점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녀 역시 중국어로 글 을 쓰는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동일한 답변을 하더군요.

제가 위에서 제시한 두 사례는 오늘날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것이 오늘날의 일반 적인 현상일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이주가 한결 쉬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국제화의 과 정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 덕분일 것입니다. 다중 언어 사용자들의 재능과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들 은 생산적인 일차 언어를 소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의 모국어가 더 이상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지요. 인도나 파키스탄 또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대부분 작가들과 달리, 그들에게 영어는 주어진 언 어, 그러니까 식민 시대의 유산이 아닙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그런 종류의 언어적 유산을 소유 하고 있지 않기에 일차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때 일차 언어란 그 들이 선택한 서양의 주요 언어를 말합니다. 그런 과정은 평생이 걸리는 작업일 수도 있고, 이에 따라 명백히 엄청난 좌절과 고통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영어나 프랑스어로 창작하는 작가로 살아남고자 결심한다면, 그들은 언어 선택을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하며, 언어를 습득하는 데 그 들의 에너지와 삶을 총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카를로스 장과 같은 결말에 이를 것입니다. 그 어떤 언어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카를로스 장과 비교할 때, 그들은 한결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적 역량 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요. 여타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얻은 바를 동원하여 그들이 새로 선택한 언어를 더욱 풍요롭게 하려 노력함으로써 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들은 여타 의 언어를 희생하거나 심지어 필요한 경우에는 포기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들에게 문학 창 작을 위한 일차 언어가 되어야 하는 유일한 언어의 영역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내세우기 위해서라면,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누네즈의 소설에서 크리스타와 칼은 이민 체험에서 전혀 다른 언어적 가능성을 대변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이지요. 그들 두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모두 자신의 모국어가 차지 하는 자리를 영어에게 넘기려 합니다. 결국에는 영어가 그들의 일차 언어가 되었습니다. 비록 크리스타 의 영어는 아직까지 그녀의 모국어인 독일어의 영향을 받고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현실의 삶 이나 글쓰기의 영역 안에서는 칼의 것과 같은 유형의 성공을 이루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국어의 흔적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지우는 식의 성공 말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런 식의 성공이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은 유해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해 당 언어가 모국어가 아닌 작가의 가치는 그들이 새롭게 채택한 언어에 무엇을 가져올 수 있는가에 의 해 측정되며, 어떻게 해당 언어의 영역 안에서 다른 사람들―특히 해당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들―과 다르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의해 측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해당 언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새롭게 채택한 언어가 독특하고 색다르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모국어가 지닌 몇몇 요소 들을 보존하는 것이 한결 더 건전하고 바람직합니다. 바꿔 말해, 크리스타의 영어가 그러하듯 특유의 억양을 유지하는 것이 전적으로 건강한 방법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새로운 언어권으로 진입한 새로운 문학은 쉽게 그 정체성을 상실하여 일상적이고 진부한 것으로 축소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필요에 의해 다른 언어를 습득하지 않을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딤의 것과 유사한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고통스럽기도 하고 심지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이 그가 거친 과정이지 요. 하지만 콘래드나 나보코프와 같은 유형의 작가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뛰어난 업적을 성취한 작가 들은 어떻게 해서든 바딤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언 어적 이주 때문에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딤은 택시 기사이며, 그에게는 생존을 위해 글쓰기의 영역에서 영어를 숙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다시금 정상적인 인간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영어를 배우고자 했던 것, 자신의 일과 삶에 충분할 정도의 영어를 배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충분할 정도의 구어체 영어를 배움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하고 복원 하고자 애를 쓰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콘래드나 나보코프와 같은 문학의 대가들은 언어적으로 편안함을 느끼거나 느긋해질 만큼 충분하게 구어체 영어를 숙달하는 경지에까지 가지는 않았습니다. 양자 모두에게서 우리는 장 애인이 느낄 법한 통렬한 마음의 상처를 감지할 수도 있습니다. 나보코프는 인터뷰를 해도 단지 서면 으로 했을 뿐입니다. 구어체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가 없었고, 그의 말에는 강한 억양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지요. 콘래드도 구어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없었으며, 친구들도 그의 말을 종 종 이해하지 못하곤 했습니다. 언어 습득의 측면에서 노정되는 이 같은 결함은 그들의 소설 작품에서 도 추적이 가능한데, 작품 속의 대화가 자연스럽지 않거나, 유연하게 전개되지 않는 경우가 있지요. 하 지만 그들에게 영어로 글을 쓰는 일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글을 써 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이와 동시에 이 새로운 언어의 영역 안에서 문학적 존재감을 확보해야 했습 니다. 우리는 종종 그들의 엄청난 문학적 성취에 경탄하지만, 영어권 문학의 영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기울였던 극심한 노력에 대해서는 거의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콘래드는 12권의 책을 출간한 후 친구에게 지난 11년의 세월 동안 15분 동안의 휴식을 취한 기억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지요. 그 와 같은 집중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만,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자신의 소설 『노스트로모 Nostromo』를 끝내고 작업실에서 돌아와 가족과 함께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아이들이 모두 눈에 띄 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나보코프는 두 차례나 그의 작업실에서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는데, 이는 탈진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콘래드와 나보코프는 의미 있는 작가가 되기 위해 영어권의 창작 영역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나보 코프는 종종 자신의 세계에서 모국어가 사멸 위기에 있다고 말하곤 했지요. 그래서 그는 러시아어 산 문 영역에서 명문가로 나름의 업적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모국어로 글을 쓰는 일을 이어나갈 수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하나의 언어권 이상의 언어권에서 존재하는 작가는 거의 없습니다. 나 보코프는 예외적 작가라고 할 수 있는데, 영어로 글을 쓰는 쪽으로 전환하기 전에 성공한 작가는 아 니었어도 이미 러시아어로 작품을 쓰는 알려진 소설가였습니다. 고국을 떠나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 지만 말입니다. 생존을 위해 영어권으로 가지를 뻗어 문학 작가로서의 자신의 생활을 재개해야 했으며, 이는 또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1940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전에 도 자신의 첫 영어 소설인 『세바스찬 나이트의 진짜 인생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을 쓰 는 데 2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시루 안의 콩나물처럼 모여 사는 프랑스 파리의 비좁은 아파트에서도 목욕탕을 작업실 삼아 밤에 글을 쓰곤 했습니다. 그에게 당면 과제는 영어권 세 계에서 직업을 얻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10년이 훨씬 더 지난 1953년에서야 코넬대학교에 전임 교원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언어적으로 화려한 글을 남기고 문체의 측면에서 볼 때 영어권에서 엄청난 업적을 성취했지만, 그 럼에도 그는 이 언어에 대해 편안함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그의 문체는 또렷하게 감지될 정도로 이국 적인 것으로, 해학적이고 재치 있는 동시에 미묘한 여운을 지닌 것인 동시에 농담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합니다. 그는 콘래드와는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고자 했는데, 나보코프는 콘래드의 문체를 싫어하는 동시에 지나치게 인습에 사로잡힌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친구인 에드먼드 윌슨이 자신 을 콘래드와 비교할 때 그는 종종 짜증을 내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을 방어했다고 합니다. 영어 구사의 면에서 자신이 때때로 콘래드보다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았을지도 모르지만 콘래드는 결코 자신이 이른 언어적 정점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보코프가 영어 산문의 영역에서 독창 적인 대가로 우뚝 서고자 했을 때, 그와 같은 문학적 자세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역설적인 것은 콘래드와 나보코프라는 이 두 위대한 영어 산문의 대가가 이 언어를 단순히 임의로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든 문학적으로든 존재 자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영어로 글을 썼던 것이지요. 의미 있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글을 썼고, 그 결과 영문학계에서 그들 나 름의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가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언어로 그들이 이주한 것은 순전히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황이 그들에게 강요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위대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비록 언어적으로 자신들이 장애인이라고 느꼈지만, 그들 은 자신들의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을 환하게 깨닫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데 어떻게 해서든 성공했지요. 콘래드와 나보코프가 글을 쓰던 시절에 영어가 모국어는 아니지만 이 를 채택해서 글을 쓰고자 했던 작가들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글은 대부분 사 라지고 말았지요. 콘래드와 나보코프의 글이 살아남게 된 것은 두 사람이 문체에 집중한 탁월한 명문 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의 노력이 그들이 채택한 언어를 풍요롭게 했기 때문이지요.

서양의 언어로 소설을 써서 성공한 몇몇 중국인 이민 작가들로 인해, 최근 들어 중국의 언론계에서 는 언어 선택의 문제가 종종 제기되곤 합니다. 작가들이 중국어로 글을 쓰는 쪽을 선택해야 하느냐, 아니면 서양의 언어로 글을 쓰는 쪽을 선택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토의 주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논제는 하찮은 것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더라도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비평가들은 작가가 다른 언어로 글을 쓰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쓸 때 이는 대부분 필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 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일단 언어가 단순히 자유롭게 선 택할 수 있는 임의적인 것이 되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라면 지닐 법한 강렬성과 긴박성 이 상실되는 경향이 있지요.
이 문제를 놓고 깊은 생각을 기울여 왔던 조지프 브로드스키조차도 문제를 아주 단순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림자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To Please a Shadow』라는 그의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한 작가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에 의지하고자 할 때, 그는 콘래드처럼 필요에 따 라 그렇게 할 수도 있고, 나보코프처럼 불타는 야망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있으며, 베케트처럼 한층 더 멀어지기 위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이어서 브로드스키는 자신이 영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위의 세 동기 증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가 영어라는 외국어로 글을 쓰게 된 것은 W. H. 오든이라는 위대한 시인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을 드러내자면,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글을 쓰기 시작하는 동기에 관한 브로드스키의 포괄적인 진술은 지나친 단순화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콘래드, 나보코프, 베케트 세 작가 가운데 누구 도 다른 언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아직 성공한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시 도는 생계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채택한 언어의 영역에서 맹렬한 창작의 불길을 태우며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타는 야망”과 “한층 더 멀어지기”는 누군가가 외국어에 의지하여 글을 쓸 때 필수적인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아울 러,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문학적 모험을 시도할 때 깊숙이 모험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작가를 이 끄는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명한 작가가 자신의 일차 언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쓰기로 하는 것이 단순히 선택 사항에 불과한 것일 때, 그는 콘래드와 나보코프가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은 정도의 에너지와 열정을 결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20여 년을 살고 난 후에 밀란 쿤데라는 1990년대에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기 시 작했습니다. 그때는 그가 이미 60대의 나이였으며, 체코어로 창작된 그의 주요한 소설들로 인해 이미 국제적으로 저명한 작가였습니다. 프랑스어로 그가 글쓰기를 전환한 것은 명백히 자신의 모국어와 조 국으로부터 “한층 더 멀어지기”의 사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용감하고도 감탄할 만 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는 프랑스어로 창작된 그의 소설이 그가 자신의 모국어로 쓴 이전 작품들의 풍 요로움과 밀도를 더 이상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 는 것은 그는 콘래드와 나보코프가 영어권에서 성취한 것과 같은 종류의 언어적 장려함을 프랑스어권 에서 성취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모국어에서 멀어진다는 것이 모국어가 아닌 언어의 세계 안으로 길고도 힘든 여정을, 보람있는 여정으로 수행하도록 작가를 자극 하는 데 충분히 강한 동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고통스러운 문학적 모험은 한 인간의 존재 내부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를, 다름 아닌 바로 그와 같은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영어의 세계로 향한 브로드스키의 모험조차 그렇게 성공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모 험을 감행한 동기는 다소 미약한 것이었습니다. 오든은 브로드스키가 영어로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 에 이미 세상을 떴습니다. 그렇긴 하나, 시적 대화란 초(超)시간적인 것이고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기 에, 젊은 시인에게 상대의 죽음은 별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 가 되는 것은 그런 식의 노력이 영어를 풍요롭게 할 수도 있는 의미 있는 시 세계를 창출할 수 있겠는 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시가 충분히 훌륭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당 언어권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할 수 있겠습니까.
브로드스키는 영어권에서 의미 있는 시인이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 자신이 영어로 창작한 시와 리처드 윌버, 데렉 월코트, 앤터니 헤치트와 같은 시인들이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그의 시를 비교해 보면, 브로드스키 자신이 영어로 창작한 작품이 다른 시인들이 영어 로 번역한 그의 러시아어 작품보다 한결 열등하다는 점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창작된 그의 시 행들은 느리고 무겁게 이어지며, 시의 운(韻)은 종종 투박하고 진부합니다. 그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 츠의 경고를 무시한 채 너무 쉽게 영어의 세계로 서둘러 돌진했던 것입니다. 예이츠는 “그 어떤 시인 도 어린 시절에 습득하지 않은 언어를 동원하여 음악성과 문체의 측면에서 탁월한 시를 창작할 수는 없다”(1935년 5월 7일 윌리엄 로선스타인에게 보내는 서한)고 말한 적이 있지요. 오든의 그림자를 즐 겁게 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 저변에 있던 것은 불타는 야망이 아니었을까요. 브로드스키 역시 불타 는 야망에 이끌려 영어로 시를 썼던 것은 아닌가하는 것이 제가 느끼는 의혹입니다. 다시 말해, 러시 아어권 시단에서뿐만 아니라 영어권 시단에서도 주요 작가가 되고자 하는 야망에 이끌렸던 것은 아 닐까요.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타의 이주민 작가들은 언어적 이주의 측면에서 한층 더 현명했습니다. 체슬 라브 밀로즈는 교직 생활을 하며 미국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도 여전히 폴란드어로 글쓰기를 이어갔 습니다. W. G. 제발트는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지만 독일어로 계속 글을 썼습니다. 자신에게는 다 른 언어로 전환할 필요성이 따로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따지고 보면, 독일어는 중요한 서양 의 언어 가운데 하나이고, 그 언어권의 작가는 그다지 많은 장애를 거치지 않고서라도 국제적으로 자 신의 문학적 존재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자신의 최초 언어를 벗어나서 위대한 시를 쓸 수 없다는 예이츠의 발언은 문학적 세계화의 측면에 비춰볼 때 이제는 보수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다른 언어권에서 온 중요한 시 인들이 이미 존재합니다. 찰스 시믹, 아가 샤히드 알리와 같은 시인들이 그들이지요. 하지만 우리 주 위에는 아직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시인 가운데 위대한 시인이 있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시믹―16 세의 나이에 이전의 유고슬라비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시인―이 영어권에서 위대한 시인인가 아닌 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예이츠가 밝힌 전통적인 잣대는 여전히 유효해 보이기도 합 니다. 시각을 달리해 보면,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확실히 새롭게 채택한 언어로 작품을 창작하는 그런 위대한 시인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런 그의 출현은 결국에 가서 예이츠의 원리를 진부하고 낡은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위대한 시인이 우리 앞에 출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터넷은 언어적 소통을 엄청나게 편리하게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철저하게 완벽 한 고립과 억압에 직면해 있는 작가는 거의 없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각자의 모국어로 우리의 창작 물을 발표하는 데 한층 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저는 종종 이런 상상을 하곤 합니다. 만일 나보 코프가 미국에 살면서도 자신의 “자유롭고 풍요로우면서 무한하게 고분고분한 언어인 러시아어”로 계 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다면, 과연 어떤 업적을 성취할 수 있었을까. 결과 가운데 하나는 명백합니다. 즉, 그가 모국어 사용의 기회를 잃은 덕분에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롤리타 Lolita』와 『프닌 Pnin』 과 같은 위대한 소설 몇몇은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들은 그가 영어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노역을 마다 않고 예술적으로 고군분투한 끝에 우리 가 얻게 된 고마운 선물이지요. 그들은 새롭게 수용한 언어로 글을 쓰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작가들, 새롭게 수용한 언어 안에서 결코 마음의 평화를 느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대가들입니다. 그러한 작가들을 생각할 때, 비슷한 상황에 처한 우리와 같은 작가들은 생존을 위한 언어를 우리의 기본적인 작업 조건으로, 그리고 모험과 약속으로 가득한 의미 있는 여행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용기를 잃지 맙시다.

번역 : 장경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