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탄실이와 주영이

라다크,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홀림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 문학

특집을 기획하며 ①고양이 사냥의 추억 ②최초의 반려묘 까맹이부터 이백 살 사이보그 고양이까지 ③펫은 실전이다 ④해방촌의 반려종들을 위하여

텍스트에 대한 경의

자파(自派)의 탄생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이다

『반노』는 ‘인간’을 지키자는 처절한 투쟁기였다

하루 2천640번 금형을 드나든 손의 기록

아름다움에 다다르려는 맹렬한 노력

홍진에 묻힌 분내……

추운 날의 벗, 세한삼우(歲寒三友)

노을바다의 장엄

양요리루 의자에서 커피를 압음하니 문명개화 이 아닌가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제2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시 부문 수상작 리뷰-소설부문 수상작 리뷰-번역부문

얇아지는 장편, 환영할 일인가

①소각,저작 ②외경,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①30년의 끝 ②양들의 침묵

새(NEW)

거울의 미로

①녹색문명(綠色文明) 시대의 숲 ②새끼 ③재와 유리의 미래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

이광수, 일본에서 크게 취하다

머릿속에 쌓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불안과 행운 사이에서

엘리엇 업데이트하기

‘더듬더듬 먼 길’을 가는 시와 번역

경계없는 예술 향한 10년여의 노정

대산창작기금,대산세계문학총서

대학생 아시아 대장정 3차 리더십 캠프 및 아시아프론티어클럽(AFC) 발대식 개최

나의 아버지

『반노』는 ‘인간’을 지키자는 처절한 투쟁기였다

- 글과 ‘떡’이 되도록 싸웠던 아버지 염재만

글 염종영 ㅣ 도서출판 한모임 대표, 염재만 소설가의 아들, 1962년생
염재만 ㅣ 소설가, 충북 음성 출생. 1934~1995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사무국장, 한국문에학술저작권협회 이사 등 역임
장편소설 『반노』 『목마른 아침』, 소설집 『엄나무 가시내』 『엄마없는 하늘아래』, 역서 『마마 나를 잊지 마세요』 등

아버지인 소설가 염재만의 호는 평곡(平谷)이다. 나고 자란 곳이 음성 평곡리니, 그 지극한 고향 사랑을 알 수 있다. 부친의 생가는 그중에서도 약수 나오는 곳이라는 약물재에 있었다. 지금 약물 재를 알리는 이정표 뒤에는 평곡초등학교가 있는데, 원래는 일제 때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평곡유치원이 있었다. ‘병’자 ‘승’자 조부께서 여기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학교를 키우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알고 있다. 수정산, 토끼바위, 수리봉처럼 이곳의 지명들이 부친의 작품 곳곳에 등장한 다. 포근한 동산과 너른들, 쿵쾅거리며 바위를 깨던 채석장, 멀리 보이는 월악산 같은 것들이 어린 시절 부친의 마음을 채워주던 고향이었고, 그 시절의 따뜻한 기억이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아니 었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부친이 원래 장남은 아니었다. 똑똑하고 잘 나가던 다섯 살 위의 형이 육이오 전란 중에 실종되 고, 그 빈자리를 채우면서 느닷없이 맏이가 된 것이다. 전쟁 중 학도병으로 겪었던 죽음에 대한 공 포와, 형의 부재로 대신 짊어진 가족들에 대한 무게감 때문에, 소문난 장난꾸러기였던 부친이 매사가 조심스러운 안전주의자가 되었던 것 같다. 어려워진 집안 형편으로 서울대에 원서를 쓰고도 시 험 치는 걸 포기했다. 일 년 간 공무원 생활로 돈을 모아 다음 해 입시를 치를 때도 안전한 2년제 대학을 지원했던 것이다. 고학으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나 전업 작가의 길이 아닌, 교사나 공무원같이 안정적인 직업 쪽으로 생활을 먼저 챙겼던 일들이 이런 부친의 성향을 반영 한다.

1990년 12월 한국문학상 시상식장에서의 부모님

어딜 가나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부친(사진 가운데)의 몫   















그러나 예술에 대한 타고난 끼와 열정은 주변의 어려움으로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었다. 대학시절 과 자원입대한 군대생활, 그리고 사회생활 내내 끊임없이 창작하고, 반추한 결과를 모아 은사였던 안수길 선생을 찾아갔다. 그래서 졸업 후 10여 년 만에 선생의 추천으로 처녀작 『반노』를 출판한 것이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성애 묘사로 흥미를 끄는 저잣거리의 대중소설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면에서 주체 못하게 솟구치는 쾌락에의 갈구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극한까지 탐구하고, 그래서 인생이 가야할 옳은 길이 무엇인가를 고뇌한 일종의 철학서 같은 것이었다. 작품 집 『반노』에는 중편 「반노」와 함께 몇 편의 단편들, 그리고 작가의 변에 해당하는 「광고 제1장 -‘선동 문’」이 실려 있는데 다음은 여기 나오는 내용이다.

“인간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끝내 이기고자 하는 그것은 진실로 목숨을 건 모든 것이다.”

「반노」는 바로 ‘인간’을 지키고자 하는 목숨 건 싸움의 처절한 투쟁기였다. 그러나 군사정부의 사 전심의관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부당한 것의 옷을 벗기고 하나씩 자빠뜨려야 한다”는 작가의 호소를 ‘과도하게 성욕을 자극하는’ 음란선동으로 규정하여 책 판매를 금지시키고 작가를 음란문 서제조죄로 기소하였다. 더구나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을 도모하고 있던 당시 정부는, 부친의 작품 을 여론몰이를 위한 마녀사냥 거리로 삼아, 문화계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대대적인 퇴폐풍조 단속 까지 몰아붙였다. 보수적이던 부친이 처음에는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아무리 진정을 다해 호소하고 기다려도 코웃음 당하자, 드디어는 그 몰상식한 행태에 분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진 7년간 의 긴 법정투쟁은 부친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극한의 고통을 안겨준 시간이었다.

 

안정된 공무원 생활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부가 운영하던 사업이 실패하여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대가족이 모여 살던 수원 집이 빚으로 넘어가 조부모는 한남동 숙부네로 옮겨가고, 어머니는 어린 삼 남매를 데리고 서울 신촌의 외가 근처로 떨어져 나왔다. 이때 부친은 떠도는 방랑자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예술창작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심 유죄, 항 소심 무죄, 대법원 상고심 파기환송, 환송 후 항소심 무죄,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최종 무죄 확정 까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다섯 번의 재판이 열리는 동안 “문예작품의 음란성 여부는 작품 중 어느 일부분만을 따로 떼어 논할 수 없다”는 예술 표현의 자유를 일관되게 주장했고 그것을 법원 판 결로 인정받은 것이다. 십여 년 전 60주년을 맞은 서울대가 개교 이후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판금서적 20종을 발표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반노』였다. 부친의 “인간이기 위한 싸움”에 피치 못 하게 조연으로 참여했던 가족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긴 재판에서 승소하자 신문과 방송에 대서특필되고, 다시 출판된 『반노』는 당장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같은 제목의 영화와 연극이 잇달아 제작·공연되어 한동안 문화계 전체가 『반노』 열풍에 휩싸였을 정도였다. 가족들에게는 무엇보다 끝이 안 보이던 가장의 무직 방랑생활이 끝나고, 출판사 주간으로 꼬박꼬박 월급 받는 평범한 일상생활이 돌아온, 참으로 꿈같은 일이었다. 이때 생긴 약간의 여윳돈으로 고향 음성에서 멀지 않은 옥천에 집과 밭을 장만했고, 조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곳에 모시게 되었다. 당시 부친은 별도로 밭 옆에 직접 설계한 조립식 주택을 짓고, 주말이면 거기서 글도 쓰고 낚시도 나갔는데, 그 집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다.
부친은 평소 당신의 입버릇처럼 “글로 떡을 치며” 살아온 분이다. 그 것은 못난 아들이 머리 컸다고


반항 하며 집 나오기까지 늘 보았던 모습 이다. 출판사 주간 시절, 부친은 거의 매일, 늦은 저녁 술 취한 모습으 로, 대개는 동료 문인 분들과 함께 귀가했다. 밤늦도록 시끄러운 술자리가 아니면 어머니와의 소란스런 다툼이 이어졌다. 조용해졌나 싶어 잠깐 선잠에 들었다가, 참았던 오줌 때문에 마루로 나서면 어김없이 안방에 불이 켜져 있고, 문틈 너머에서는 부친이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글과의 싸움이 끝나면, 휴지통은 원고지 조각으로 넘치고, 아침 밥상 건너편 에서 부친의 코 고는 소리가 높이 들리곤 했다. 언젠가는 꼭 묻고 싶던 질문이 있었다. 평생을 그렇게 “떡”이 되도록 싸우면서 부친이 이루고자 했던 “인간 승리”는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그러나 제대로 물어볼 새도 없이 갑작스런 병마가 부친의 몸을 훑어가 버렸다.

“사람은 다단계 로켓이야. 나는 1단, 너희는 3단 조종석. 나는 밑에서 밀다가 연료가 다하면 떨어져야지. 그런데 그놈의 조종사가 갈팡질팡하면 떨어져 죽으면서도 속이 상하잖니”

하던 부친의 꾸짖음이 귓가에 맴도는데 벌써 25주기가 내년이다. 부친이 보기에 3단에서 헤매던 아들이 지금은 1단 추진체의 입장이 되었으니, 생전이었다면 또 무슨 말씀을 했을지. 영정사진 속 부친은 담배를 멋지게 피워들고 있다. 가까운 이들은 부친이 술은 정말 좋아하지만 담배는 ‘폼’으로 들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스무 살 아래 막내 숙부가 “형님은 담배 아깝게 왜 피워요?”하고 장난삼아 물어도 “무슨 소리야?”하며 씩 웃던 짓궂은 모습이 떠오른다.
부친이 ‘폼’으로 했던 일 중 하나가 낚시다. 한번은 고모부와 두 분이 옥천집 근처로 낚시를 나갔 다. 고모부는 단출한 외낚시로 연신 튼실한 고기를 걷어 올리는데, 부친은 도합 네 대의 장낚시로 도 피라미 몇 마리뿐이었다. 부친이 짐짓 심통 부려 자리를 바꿨으나 어황 차이는 오히려 더 심했다. “에이, 고기가 날 피해가니 재미없네”하고 낚싯대를 접으면서도 부친은 씩 웃었다.
25주기가 되기 전에 부친의 대표작들을 모아 염재만 선집을 발간하려고 작업하고 있다. 그 웃음을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의 발로가 아닐까 잠시 더듬어 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