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부일_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3학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동화부문 당선. 1983년생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의 작품이다.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보았던 그 그림을 나는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보았다.
가슴을 풀어헤친 채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맨발로 달려가는 자유의 여신. 긴박했던 격동의 순간을 나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내 시선을 잡아끈 건 자유의 여신 옆에 있는, 총을 든 소년이었다. 녀석은 실제로 프랑스혁명에서도 총을 들었다고 한다. 소년이 총을 들고 광장으로 나와야할 만큼 당시 상황은 절박했으리라.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참혹한 세상 위를 뛰면서 녀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년은 희망을 배태(胚胎)하고 있었다. 그 녀석과 눈이 마주치자 가슴 한 끝이 찌르르 떨렸다.
나는 잠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먼산바라기를 했다. 세느강은 지난 세월을 강바닥에 묻은 채 묵묵히 흐르고 있었고 물 위로는 눈부신 햇살이 반짝거렸다. 박물관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명랑했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지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늦겨울이었다. 한가한 어느 일요일 오후, 그 누구도 프랑스 혁명을, 그리고 총을 들고 뛰던 그 소년을 기억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도시 어디에서도 그날의 함성과 녀석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서글프지 않았다. 지나간 시간을 우리는 금세 잊는다. 역사의 낙장(落張)이 되어 잊혀질 수 있는 시대를 화가가 남긴 그림이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역사책보다도 더 사실적으로 증언했다. 역사책이 프랑스혁명을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지만 내 맥박과 심장을 빨리 뛰게 할 수는 없다. 그건 오로지 예술의 몫이니까.
화가는 그 작품을 1830년에 그렸다고 한다. 무려 이백 육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공분(公憤)하게 만드는 그림 앞에서 나는 겸손해졌다. 좋은 예술작품은 세월의 침식과 풍화를 견딜 수 있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그림과 공연 그리고 작가를 만나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런던에서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다른 뮤지컬을 보고 싶었지만 런던에 폭설이 내리면서 원하던 작품이 취소되어 어쩔 수 없이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인연이었다.
그 작품에는 ‘가보로슈’라는 소년이 나온다. 녀석은 공연 마지막 즈음 총에 맞아 죽는다. 나는 소년이 낯설지 않다. 소년을 루브르박물관에서 만난 적이 있다. 바로 자유의 여신 옆에서 총을 들고 함성을 지르던 녀석이다. 그 녀석이 그림에서 뛰쳐나와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녀석이 반갑기도 했지만 가슴이 먹먹했다. 녀석은 7월 혁명에서 진압군에게 잡혀 처형을 당했다고 전한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까르르 웃어야 할 나이에 죽다니! 기득권에 눈이 먼 어른들에게 일갈(一喝)하는, 절대적 ‘선’을 체현하려는 녀석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백하자면, 동화를 처음 쓸 때 나는 한국창작동화를 거의 읽지 않았다. 한국동화 특유의 감상적인 냄새와 작품 행간에서 뿜어지는 물기(?)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개진하지 못하는, 현실감각이 부족한 어리보기 주인공이 싫었다.
특히 한국동화를 멀리하게 된 가장 큰 까닭은 비슷한 소재와 낯익은 캐릭터 때문이었다. 절대적으로 ‘선한 아이’가 아니라 한국 사회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 ‘착한 아이’를 대량생산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가보로슈는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다. 마음을 홀딱 빼앗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예술은 역사에 남지 않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우리들의 뇌리에 남는 것 같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우리는 공감하며 그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난 가보로슈를 보면서 그 마음을 느꼈다.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초등학생 때 읽었던 장발장과 작가 빅톨위고를 떠올렸다. 그 소설은 1860년대 출간되었다. 몇 백 전이 지난 지금,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 그 작품의 힘은 무엇일까. 그걸 정확하게 깨달아서 어려운 말로 멋지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뮤지컬을 관람하는 동안, 공연이 지겨워서 선하품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집중하고 있었다. 그 질문의 답을 내 마음은 이미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도쿄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를 만난다고 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작가의 책, 『달』을 샀다. 사람들은 그를 세계적인 천재 작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강연회에서 만난 작가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책을 읽지 않는 요즘, 책을 읽게 만드는 건 작가의 몫이라고. 또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말을 했다. 나를 포함한 수상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게 일본문학은 한국문학처럼 친숙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오카슈조……. 떠오르는 일본 작가의 이름이 정말 많다. 뿐만 아니라 중국문학도 마찬가지다. 서점에서 게이치로의 책을 고르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문학을 어떻게 생각할까, 무척 궁금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번역가 김혜경 선생님과 같은 대학교에 근무하는 로엘 교수님을 만났다. 로엘 교수님은 황석영 작가의 팬이었다. 그는 프랑스에 소개된 한국작가가 적고 유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학을 위해서 좀 더 열심히 노력해달라고 로엘 교수님은 덧붙였다. 파리에서 만난 번역가 한유미 선생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런 안타까운 사실은 런던에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런던 피카딜리에 있는 서점에서 여행안내책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시아 여행코너를 한참 뒤적여도 한국 안내책은 한 권도 없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들에게 얼마나 낯선 나라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씁쓸했다. 과연 그 서점에 한국문학책이 있을까, 찾아보려고 했지만 관두었다. 허전한 마음에 영어로 된 책들을 훑어보았다. 갑자기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게 어떤 것인지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서점에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이 영어로 번역되어 팔리고 있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올해 서른다섯 살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그와 비슷한 연배의 작가들이 많지만, 해외에 소개된 작가가 몇 명이나 있을까. 아이에 없거나 있다고 해도 적은 숫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동문학의 현실은 어떨까. 몇 작품이 해외에 소개되었지만 큰 수확을 걷지 못했다. ‘가보로슈’ 같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한다면 한국동화도 파리에 있는 자그마한 서점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텐데. 헤리포터, 말괄량이 삐삐, 어린왕자, 피터팬처럼 말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T.G.V.와 비행기, 버스, 그리고 택시를 타서 도쿄, 런던, 엑상프로방스, 파리를 지났다. 또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호젓한 밤길을 발이 아프도록 걷고 또 걸었다. 그 길에서 나는 사람들을 만났다. 생존한 천재작가, 화가 들라크루아, 작가 빅톨위고 그리고 가보로슈까지. 뿐만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미소가 예쁜 소녀와 인자한 할아버지도 만났다.
나는 길에서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했다. 알은 체 할 겨를 없이 스쳐지나간 사람도 많다. 또 눈, 비, 우박, 햇빛, 바람 그리고 구름을 만났다. 어디 그 뿐일까. 길에는 돌멩이가 뒹굴었고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언덕에는 꽃이 자라고 있었다. 그곳은 벌써 봄나라로 입국할 채비를 서둘렀다.
지금 돌이켜보면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늘 충만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창 밖에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나는 엑상프로방스 카페에 앉아서 우유가 듬뿍 들어있는 뜨거운 카페오레를 마셨다. 내 둘레에는 다섯 사람이 앉았다. 모두 열정 넘치는 젊은 문학도들이었다.
천재 ‘끼’가 있는 시인 희수, 늘 진지하게 고민하는 소설가 윤수 형, 내 말에 언제나 웃어주는, 명랑한 희곡작가 정현, 이성과 감성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평론가 은정, 그리고 찢어진 우산을 함께 쓰고 도쿄 시내를 걸으며 친해진 시나리오 작가 주성이가 내 곁에 있어서 나는 든든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녀석들을 만날 수 없었을 거다.
우리는 허심탄회하게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를 통해서 세상을 곁눈질했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고 모두 눈을 반짝거렸다. 어느새 사위는 점점 어두워졌다. 환한 가로등 불빛이 더욱 따스하게 느껴질 때, 비는 더욱 거세졌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엑상프로방스 거리를 걸었다. 그렇게 나는 길에서 또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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