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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기행답사기 - 촌스러운 노래
작성자 이정현
날짜 12.03.12 조회 9014

 

글/이정현_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3학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문 당선. 1986년생

등장인물

시

남. 25세. 명문대생. 박식하고 잘난척하는 걸 좋아함. 특기는 야한 개그.

소설

남. 28세. 독고다이. 세상일에 딱히 관심이 없으나, 밥 때를 잘 챙긴다.

희곡

여. 24세. 몸개그를 선호함. 시끄럽게 웃거나 떠들다 지치면 바로 잔다.

시나리오

남. 24세. 농담을 좋아하는 청년. 엄마욕도 웃기게만하면 용서한다는 주의.

평론

여. 26세. 매사 탐구적이고 심리파악에 능함. 자주쓰는 단어는 ‘리비도’

동화

남. 27세. 잡학다식. 금리에 예민함. 3초에 한번씩 웃겨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림.

2009. 1. 30 새벽, 인천공항

시가 지나갔다.

건너편에 앉아 졸고 있는 소설을 발견했다. 동화가 왔고 양말을 사러 갔다.

시와 소설과 동화가 있으니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놓였다.

시도 소설도 동화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여자들이, 비싼 백을 들고 스쳐 지나갔다.

평론과 시나리오와 아까 차마 이름 부르지 못한 시가 함께 다가왔다. 시와, 소설과, 희곡과, 시나리오와, 동화와 인사를 나누었다. 빨리 이름을 외워야하는데, 라고 생각했다.

2009. 1. 31 낮, 일본의 황궁 앞

폭풍우가 몰아쳤다. 우산이 뒤집어졌다가, 제 자리로 돌아왔다가, 다시 뒤집어졌다가, 결국 우산살이 부러졌다. 물살이 거칠게 휘몰아치는 강 건너에 커다란 궁이 있었다. 그 곳에, 명분 뿐인 대왕님이 사신다고 했다. 대왕님이야 그 안에서 무얼하시는지 알 수 없다만, 제발 이 비바람을 그치게 해주셨으면 했다. 손등이 부르튼 채 지하보도로 피신했다. 우리의 거지꼴을 사진으로 남겼다. 우리는 하나같이, 뉴스에 나오는 탈북자들 같았다. 앞으로도 이런 날씨가 반복된다면, 헤엄쳐서라도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2.2 밤, 영국 런던의 숙소

방문이 열리고, 비에 젖은 희곡과 평론이 들어온다.

표정이 어둡다.

평론너무 애쓰지마. 너만 생각해. 너만.

희곡...네.

침대에 드러눕는 평론.

코트를 벗고, 양말을 벗고, 가방에서 츄리닝을 꺼내 옷을 갈아입는 희곡.

평론잉게보르크 바흐만이라는 작가 알아?

희곡잉게르트... 뭐요?

평론잉게보르크, 바흐만.

희곡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평론 글쎄, 오스트리안가.

희곡참 ‘작가’ 같은 이름이다.

평론그치. 여튼 그 사람 단편소설 중에, <모든 것>이라는 작품이 있어. 내가 참 좋아해서 블로그에 타이핑해서 적어놓기도 했어.

희곡되게 좋나보네. 한국가면 읽어봐야겠다.

평론특히 마지막 구절이, 참 좋아. 난 힘들 때마다 그 구절을 생각해.

희곡어떤 건데요?

평론“너무 지나치지를 말아라. 우선은 계속해가는 것을 배우라. 너 자신부터.”

희곡너무, 지나치지를, 말아라. 우선은...

평론계속해 가는 것을 배우라.

희곡(중얼거리 듯) 너 자신부터.

평론좀 편안해져. 그래도 돼.

희곡. 가만히 평론 옆에 드러눕는다.

2.3 낮, 런던의 대영박물관

경석에게.

오빠, 오늘은 그리움이 조금 나아졌어. 어제 저녁에 숙소 앞 커피숍에 혼자 앉아 무너져라 무너져라 그리워했더니,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이제는 조금 견딜만 해. 최승자가 이래서 그토록 무너져라 무너져라 한건가 싶기도 해.

영국은 폭설 때문에 휴교령이 내렸어. 18년만에 폭설이래. 우리가 가는 곳마다 눈이 퍼붓고 있어. 지마켓에서 만 삼천원 주고 산 부츠를 신고 왔는데, 이건 뭐 양말이나 다름없어. 눈이 다 스며들어 와서 동상 걸릴 지경이야. 발가락 잘라버리고 싶더라.

그 눈길을 밟으며 버킹험 궁전에 갔어. 눈 내린 버킹험은, 참 멋지더라. 돌아가면 사진 보여줄게. 자꾸, 너랑 같이 왔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어. 손이 무척이나 시렸는데, 아무도 잡아주지 않았거든.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대영박물관이야. 대영박물관은 영국의 제일 큰 박물관인데, 전 세계에서 약탈한 문화재들로 84개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직지심체요절도,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네. 국력이 쎄면 인간적으로 저렴한 행동들도 벌 받지 않고 계속 저질러댈 수 있나 봐.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것처럼. 이런 거 생각하면 권력이란 게 참 싫어. 그런데, 갖고 싶어. 권력자가 되면, 나쁜 권력자는 되지 말아야지. 그런데 착한 권력자가 있을 수 있는걸까? 또 편지쓸게.

당신의 오진.


2.6 오후, 액상프로방스 거리

추적추적 내리는 비.

시와 희곡이 거리를 걷고 있다. 다리를 저는 희곡을 시가 부축하고 있다.

희곡(미안해하며) 오빠, 별로 안 아파. 괜찮아.

시응, 몹시 안 괜찮다는 말이구나.

시, 희곡 계속 그렇게 걷는다.

희곡사실, 내가 얼마나 아픈건지, 정확히 어디가 아픈 건지 잘 모르겠어. 내 상태에 대한 인지가 안돼.

시왜 그런걸까?

희곡글쎄, 주위의 상황,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 나 때문에 어두워지는 분위기, 어쩌면 내가 엄살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런 것들에 둘러싸여 있어.

시그 것은 네가 자주 말하는 너의 관계지향적인 성향 때문이겠지?

희곡그런가. 말했었나? 전에 식도염약을 삼개월동안 먹었는데, 알고보니 성대결절이었다고.

시음.

희곡오빠 기억 나지? 그저께 저녁에 나 되게 좋았어. 우리 다 같이 맥주 마실 때.

시일본에서?

희곡아니. 런던이었나. 아니, 그제가 아니라 어제인가?

시런던에서? 오후에 같이 밥먹었을 때?

희곡아니아니, 빨간 지붕이 있던 커피집있잖아.

시아, 그건. 어제 저녁이고, 여기, 액상프로방스야.

희곡정말? 그게 어젯밤이야? (사이) 나는 공간과 시간이 인지가 안돼. 그냥 그 때 그 사람들,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런 거 밖에 기억이 안나.

시너는 정말, 한국 사람이구나.

희곡한국사람이라고?

시우리 다같이, 하나. 그런 거 있잖아.

희곡촌스럽다. 오빠 나 촌스럽지.

시그런 점이 니가 글을 쓰게 만드는 건지도 몰라.

희곡정말 그런걸까?

희곡, 시. 그렇게 계속 걷는다.

2009. 2. 5 마르세유, 낮, 커피집

희곡, 동화, 빵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희곡이 빵 하나에 만 원이 넘어. 드럽게 비싸네.

동화그러게. 한국가면 3천원이면 먹을텐데. 아, 근데 한국가면 열흘 치 신문 언제 다 보냐.

희곡오빠는 신문 되게 열심히 보나보다.

동화나 주요일간지 전부 다 봐. 주간지도 보고.

희곡우와, 엄청 많이 본다. 난 집에 날아오는 것만 밥 먹을 때 챙겨 보는 정도?

동화난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어. 기자가 되고 싶었거든.

희곡그래서 사회과학부에 갔어? 문창과가 아니라?

동화음... 또, 말하자면 졸라 긴데. 또 이야기해야하나. 그 때는 뭔가 잘못 돌아가는 이 세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

희곡오, 신자유주의 시대에 반하는 정서?

동화야, 쪽팔리다. 뭐 다 옛날 이야기야.

희곡좋네. 청년이네. 진짜 청년.

동화(얕은 한숨) 그런데 지금은 뭐.

희곡글 쓰잖아. 수상소감에 필리핀 아이들 걱정도 했잖아.

동화(크게 웃는다) 맞다, 그랬지. (사이) 내가 아는 간사님 한 분은, 서울대 졸업하셨는데도 3년이나 인도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오셔서, 지금도 가난한 애들 가르치면서 사셔.

희곡결혼은.

동화안 했지. 어떻게 하냐.

희곡취직은?

동화그런 걸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그 분은 진짜 내 한 몸 희생하자는 식의... 난 진짜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 분 생각하면 필리핀 아이들 얘기도 못 꺼내.

희곡에이, 오빠 너무 자책한다. 그래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 게 어디야. 네팔에서 학교 한 번 못 간 아이들이 벽돌로 종일 손 찍으면서 일하고 하루에 1달러를 벌건 말건, 필리핀 소녀들이 몸 팔다 굶어 죽어가건 말건, 당장 토익점수가 더 중요한 애들이 대다수야.

동화그런가?

동화, 고민한다.

동화그래도 나, 한 달에 8만원씩 기부해. 아이들한테 가는 거.

희곡응.

동화, 또 고민한다.

동화그래도 이게 좀 나은 거겠지?

희곡응.

희곡, 음료수 마신다. 동화, 계속 고민한다.

2008. 2.7 파리 낮,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혁명기의 회화들이 있는 전시관.

희곡, 그림을 바라보고 서 있다.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건장한 한 남자와, 커튼 뒤에 숨어 칼을 들고 그 남자를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젊은 남자. 리오, 다가 와 말을 건다.

리오너, 이 그림 좋지.

희곡응.

리오이 그림이 왜 좋은 지 알아?

희곡응? 왜?

리오플롯이 있기 때문이야.

희곡, 다시 한 번 그림을 본다.

한참을 그 그림을 들여다 보는 희곡과 시나리오.

2.8. 파리 오후, 전철 안

옆 자리에 앉은 시와 희곡. 희곡은 창 밖을 보고 있다.

고개를 반 쯤 숙이고 골똘하게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는 시. 문득 고개를 들고, 희곡에게 묻는다.

시기행문 어떻게 쓸거야?

희곡글쎄, 여러 가지 생각 중인데. 난 씬으로 쓰게 될 거 같애. 오빠는?

시난. 내가 접한 이미지들. 그 것들을 공간과 연계해서 쓰게 될 것 같아.

희곡역시, 오빠는 이미지로 가는구나. 난 ‘관계’로 풀어서 이야기를 할거야. 도쿄의 긴자거리를 걷건, 영국에서 대영박물관을 가건, 몽마르뜨에 오르건. 나의 화두는 늘 ‘사람’ 이니까.

시으응, 그래그래.

희곡또 할아버지 인자한 말투.

시으응? 내가 그랬니?

무언가를 생각하며 손톱 물어뜯는 희곡. 문득, 생각난 듯이.

희곡오빠, 우리 인천공항에서 헤어질 때. ‘반가웠어요, 잘 들어가세요!’ 라고 인사하고 헤어지지 말자.

시그럼 어떻게 헤어져야 하는데?

희곡막 이야기도 많이 하고, 서로 마음껏 아쉬워하면서 막 못헤어질 것처럼 그러다가 한참 있다가 헤어지자.

시난 그런 이야기 들으니까 더더욱 휙 가버리고 싶어지는데.

희곡(기분 상해서)그럼 오빠는 빨리 가. 오빠 혼자 그냥 휙 가버려.

시그래. 그럴게.

희곡, 창 밖 본다. 또 다시 생각에 빠져드는 시.

전철은 달린다.

*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장면은 10박 11일간의 문학기행에서 나누었던 대화들을 재구성 한 것으로, 실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의 인물과 아주아주 관련이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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