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박희수_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 당선. 1986년생
길들은 얽힌다. 하나의 길이라 생각하면 서로 다른 풍경들이 펼쳐졌다. 다른 길, 이라 말하기엔 길 위를 떠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언제나 어두웠다. 젖은 길, 이라고 말하면 몰려오는 구름들. 10년만의 폭설이래요. 피카딜리 서커스에 쌓인 죽은 눈들은 매우 어두워지며 질척거리는 진창을 만들었다. 거기를 헤치며 우리는 숙소로 들어갔다. 차가운 공기. 스이도바시(水道橋)에서 파리 북역(北驛)으로 길이 흘러가며 구름들이 부드럽게 파도처럼 몰려와 차곡차곡 쌓였다. 지중해다, 누군가 그렇게 외쳤고 마르세이유의 해변으로 검푸른 바다는 거세게 몰아와 해변에 흰 포말을 튀겼다. 비말(飛沫)이란 단어가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데, 그건 왜……. 묻지 못한 질문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해소되고는 했다. 불필요한 호기심으로 설국문학기행 참가자들을 바라봤던 기억, 신주쿠의 어둠 속으로 히라노 씨는 사라졌고 우린 그 건물에 잠시 머물며 일처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환해지며 긴자(銀座)에서 여우비가 뿌렸다. 녹은 은처럼 보였다. 눈이 다시 더 왔다. 눈은 하늘의 숨구멍이 모두 열린 듯 하얀 고름처럼 줄줄 쏟아졌다. 여섯 명의 침묵, 우리 방에 왔던 사람들은 어색해서 힘들다, 고 말하고 나갔다. 당사자인 나는 어색하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이슈마엘은 페쿼드 호로 가는 먼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바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책장이 넘어가며 떼제베는 마르세이유에서 점점 파리로 변해갔다. 꿈 속에서 바라본 풍경이 꿈을 깨고 바라보는 풍경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때의 묘한 이질감, 그러나 사실 꿈을 꾼 적도 잠에 빠진 적도 없었다. 몽상에 빠진 책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서가 사이를 오갔다. 동경대생들이 말을 잊고 무언가를 열심히 공책에 받아쓰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룬 사진집을 하나 골라들어 자리에 앉았다. 저자는 일본사람이었고 젊었을 때 가자지구 문제에 대항해 이스라엘에서 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고 했다. 총알은 쉽게 머리를 뚫었고 피의 길이 흙의 길 위에 뿌려졌다. 경락 위에서, 아홉 번 돌려 보(補)하더라도, 여섯 번 돌려 사(捨)하더라도, 다친 다리는 낫지 않았고,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길보다 현저히 줄어들어갔다. 숙소에서 나와 밤의 까페에서 음료를 한잔씩 마시며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추(醜)에겐 고결함도 특별한 악의도 없는 법, 산이 되지 못한 언덕들이 프로방스의 하늘 아래로 허물어져 갔다. 한발도 움직이지 않고서, 결코 걸을 수 없는 먼 거리를 사라져 보는 길. 비행기는 하늘의 감옥, 수면할 시간, 어둠은 머리 위로 내리고, 흔들거리는 페퀘드의 선창에서 이슈마엘은 일등 항해사 스타벅에 대해 길고 자세하게 묘사하는 중이었다. 우리들의 이름은 장 클로드이거나 장길도이거나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었다. 김혜경 선생님은 자주 난처하다는 듯 웃으셨다. 마르세이유 테제베 역에서 끊어지는 우산의 길, 그 길까지 따라오며 서로 다른 낯선 하늘들을 가로막았지만, 하늘엔 경계를 칠 울이 없었다. 실패한 빠리 꼬뮌, 쓰러지는 사람들의 이미지, 장 발장은 하수구 속으로 내려가고, 더 어두워지고, 모든 게 끝이 나자 갑자기 다시 밝아졌고 그렇게 뮤지컬은 그냥 연극이었다. 우리들이 연극인 것처럼. 웃는 표정을 지을 수 있어서 모두들 웃고 다녔고 웃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서로 속으로 생각했다. 센 강의 어두운 물결은 빛을 반사하는 도중이었다. 때는 밤이었고 수차를 젓는 물살이 강변의 조명들 속으로 천천히 녹아들어가며 입을 맞췄다. 터너의 화폭에선 하늘과 철로와 증기를 뿜으며 달려가는 기차가 모두 하나의 화음 속으로 용해된 상태였다. 색채가 조금만 미세하게 달라져도 그게 어떤 지점을 두드린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좁은 지하철이 지나가는 지하의 갱도, 낯선 이국어가 울리고, 문이 열렸다. 지친 표정의 사람들이 들어오고, 머무르고, 다시 나갔다. 어떻게 냄새나는 카레를 먹니? 쓰레기들. 그러나 그런 음식들이 바로 그들의 피였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다르게 생각하기엔 회색 하늘 아래에서 우리의 살결은 서로 구분될 수 없었다. 화폭 위에서 색채들은 다투기보다는 서로 차이를 지운다. 조상(造像) 위에서 면의 섬세한 결을 따라 부서지는 빛이 일종의 파도인 것처럼. 용서하라, 노트르담 생 미쉘에 매달린 신의 형상, 천천히 유액처럼 흘러들어오던 빛, 바깥은 여전히 진눈깨비가 내리고,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 속으로 지하수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여러 가닥의 실이 만나 노끈을 이루고 다시 노끈 끝은 여러 가닥으로 풀려나간다. 인천공항으로 돌아오자 이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길들은 얽힌다. 그러나 얽힌 길들은 모두 자신의 길을 간다. 여행 위로 뜬 풍경이 여행 밑으로 가라앉은 풍경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