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순정함, 모어의 순정함,시의 순정함 - 윤동주 시인과의 가상 인터뷰
균형과 조화의 삶을 찾아서 - 행복한 의사를 위한 인문학
특집을 기획하며｜우리 시대 문학 상상력의 코드들 ①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소설 속에는 그것이 산다, 그리고… ②무엇이 우리를 웃프게 하는가- 소설 속 우리 시대 아이러니의 대표 형상들 ③‘혼자’만의 자리 ④탈조선의 어떤 감각,‘싫어서’라니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시 「조용한 일」 중 변용
‘대전발 0시 50분’을 오르내리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첫 번째｜일기,그 비밀의 방 두 번째｜알렉시예비치와 김종삼이 기록한 것 세 번째｜글과 리듬 네 번째｜드라이
제24회 대산문학상,한국문학의 풍성한 수확을 향한 출발 제24회 대산문학상｜예 / 심 / 평 2016 대산창작기금｜자유로움과 도발과 섬세함,젊은 작가들과의 조우 2016 대산창작기금｜수혜소감 및 심사평
장맛비가 이어주는 매듭, 님 웨일스와 김산과 이상(李箱)
프리웨이 5번, 워노-원,그리고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
플리즈 콜 미
편혜영 ㅣ 소설가,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72년생
소설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밤이 지나간다』
『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선의 법칙』 『홀』 등
잠시 후 소리가 잦아들고 사위가 들어왔다.
사위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시작했다. 그간 말하지 않은 걸 짐작하게 하는 울음이었다. 시끄러운 이웃과 배려 없는 소음들,볕이 들지 않는 좁은 아파트, 추접해진 살림살이 때문에 로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로는 묵묵히 사위와 울음을 나눴다.
전화는 로 혼자 있을 때 걸려왔다. 당연히 받지 않았다. 딸과 사위에게 걸려온 전화일 테고 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일 테니까. 자동응답기가 돌아가고 부재중임을 알리는 딸 내외의 장난스러운 음성 안내가 이어졌다. 메시지를 남기라는 신호음이 들리기 전에 대부분 전화를 끊기 마련이었다. 남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용해서 전화가 끊긴 건가 싶었는데 잠시 후 또박또박 힘주어서 플리즈 콜 미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는 그 전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랜만에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반가웠던 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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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걸어달라고 할 뿐, 번호를 남겨 놓지 않아서였다. 누구일까. 어디로, 어떻게 전화를 걸라는 말일까. 애당초 딸과 사위를 아는 사람이라면 음성메시지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휴대전화를 이용해 통화하면 될 테니 굳이 어색한 영어 발음으로 메시지를 남겨둘 이유가 없을 것이다.
로는 전화를 걸어 달라던 또박또박한 음성을 되새기다 혹 메시지의 일부를 놓쳤나 싶어서 녹음된 것을 다시 들어보고자 했다. 자동응답기를 재생하려고 버튼을 이것저것 눌렀고, 그러는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버튼을 잘못 눌러 녹음된 메시지를 전부 삭제해버린 것이다.
저녁에 면세점에서 일을 마친 딸이 돌아왔을 때 로는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딸은 그래요? 하고 굳은 표정으로 대꾸하고는 그만이었다. 하루 종일 관광객에게 시달리느라 지친 얼굴이었다.
딸은 로에게 집에 돌아오면 입을 다물고 쉬고 싶을 뿐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로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딸은 옷을 갈아입다 말고 갑자기 미친년, 하고 이 가는 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면세점에 다녀간 손님들을 욕하기 시작했다. 립스틱 다섯 개를 연이어 발라보라고 시키고 그냥 돌아간 여자, 사용설명서의 불어를 죄다 번역해보라던 여자, 로에게 물을 한 잔 갖다 달라고 시킨 여자, 합산된 금액을 깎아달라고 조르던 여자가 딸이 말하는 미친년이었다. 로는 딸의 얘기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 쳤다. 딸은 요즘 자주 그런 얘기를 했다. 관광객으로 파리에 온한국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함부로 대하는지, 그들이 허영심으로 얼마나 허튼 곳에 돈을 쓰는지, 생김과 말투가 익숙한 사람이 점점 싫어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하는 얘기였다.
딸은 유학 중에 만난 알제리계 남자와 석사 과정을 마친 후 결혼했고 주저없이 박사 과정 진학을 포기했다. 전적으로 돈 때문이었다. 로 역시 학비를 대줄 형편이 아니어서 딸에게 더 나은 선택이 있을 거라고 권하지 못했다. 딸은 면세점에 취직했고 한국인 관광객에게 화장품을 팔았다. 종종 로에게도 화장품을 보내 주었다. 로는 공부만 하던 딸이 물건을 팔기 위해 이런 저런화장품을 손님 요구대로 바른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딸이 보내준 화장품은 결코 쓰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어느 날 친구들에게 자랑 삼아 화장품을 꺼내 들었고 쓰지도 않은 것을 선심으로 나눠주곤 했다. 친구들은 딸이 파리에서 계속 공부하고 있는 줄 알았다. 로가 거짓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기 싫은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로는 욕실로 들어서는 딸을 뒤따랐다. 딸이 입을 다문 틈을 타서 남자 목소리에 대해 얘기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음성,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한 영어 발음, 결단을 내린 듯한단호한 말투 같은 것에 대해서.
딸이 욕실 문을 닫으려다 말고 로를 쳐다보았다. 딸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요새 다시 담배를 피우는 걸까. 팔자주름이 도드라져 부쩍 나이 들어 보였다.
장난 전화야. 뻔하잖아요.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는데 딸이 문을 닫았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는 딸이 벗어놓은 흠집 난 구두를 가지런히 놓아 두고 깃에 때가 묻은 셔츠를 세탁 바구니에 넣었다.
장난 전화가 아니야. 목소리가 얼마나 침착했는데.
샤워를 하고 나온 딸이 미안했는지 메시지를 들어보겠다고 했다. 로가 실수로 지워버렸다고 다시 말하자 딸이 이번에도 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로는 당황해서 거짓말이 아니라고 변명했다.
광고 전환가 봐요. 카드 회사나 자선단체 같은 데서 무작위로 거는 거요. 일부러 장난 치고 싶어서 전화를 거는 사람일 수도 있고요. 음란전화요. 요새 그런 전화가 가끔 와요.
딸이 로에게 달라붙어 으흐흐 하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로를 웃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퉁명스럽게 군 게 미안해서 그러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야.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어.
로가 딸을 떼어내며 말했다.
그래야 사람을 홀리죠. 도움이 필요없는 척 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법이에요. 믿음직스러워 보여야 물건을 팔 수 있고 돈 많고 한가한 여자를 꼬실 수도 있죠.
녹음된 목소리를 들어보면 누군지 알 수 있었을 텐데.
괜찮아요, 엄마. 신경쓰지 마세요. 우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휴대전화로 걸었을 거예요. 꼭 통화해야 한다면 다시 전화할 테고요.
딸의 말이 맞았다. 전화는 다음 날 다시 걸려왔다. 로는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시끄럽게 모터가 돌아가는 가운데 벨 소리에 이어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로가 늦었다. 받으려는데 그새 전화가 끊겼다. 어쩌면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애당초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청소기 모터 소리는 초인종 소리나 전화벨 소리를 삼켰고 그 때문에 종종 헛소리를 듣기도 했다.
로는 아무 것도 녹음되지 않은 자동응답기를 계속 돌려보았다. 겉잡을 수 없는 실망감에 빠져 들었다. 남자의 전화를 받지 못해서인지, 애당초 전화가 오지 않아서인지, 울리지도 않은 전화가 왔다고 착각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슬픔과 두려움이 뒤엉키는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런 감정을 느낄 때면 언제나 그러했듯 로는 부엌으로 갔다. 싱크대 아래쪽 커다란 후라이팬 뒤에 술이 있었다. 주물 부위가 시커멓고 손잡이가 불에 눌려 추접하고 만질 때마다 기름 때가 묻어 끈적거리는 후라이팬을 치우고 술을 꺼냈다. 로는 후라이팬을 닦아주려다 포기했다. 한국으로 돌아
가기 전에 새로 사줄 생각이었는데, 부엌을 둘러보며 더러워서 닦느니 사는 게 낫겠다 싶은 것을 꼽아보니 한이 없었다.
술은 사위가 남겨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로가 새로 사둔 것이었다. 사위의 것은 이미 로가 마셔버렸다. 그저께 사서 넣어둔 것인데도 술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오늘 마신다면 또 사다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사위의 취향도 썩 훌륭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술은 슈퍼에서 쉽게 살수 있는 싸구려 브랜디 중 하나였다. 로는 늘 한 병만 샀다. 그러다 보니 사위 몫으로 사다 둔 술을 매번 축내는 꼴이 되었다. 로는 술에 관한 한 짜게 굴었다. 많이 사다 두면 다 마셔버릴 테니까. 하지만 원할 때면 언제든지 술 마시는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 사위가 술이 줄어든 것을 알아채기 전에, 딸이 술 냄새를 맡기 전에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로가 온 후로 딸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 때가 많았는데, 그러면 로는 한동안 긴장해야만 했다. 드디어 술 얘기를 꺼내는구나 싶어서였다. 로는 변명거리를 마련해뒀고 한국에 돌아가면 끊겠다는 다짐이나 각오도 거리낌없이 할 생각이었다.
요새 사위는 술을 마실 틈도 없이 바빴다. 아침 일찍 나갔고 밤 늦게 돌아왔다. 피곤에 전 표정으로 로에게 인사 삼아 몇 마디 건네고 잠자리에 드는 게 고작이었다. 로가 사위를 애틋하게 여기는 건 그 때문이었다. 술을 마실 틈도 없이 바쁘다는 것. 원할 때는 언제든지 마실 수 있어야 했다.
로는 그런 경우를 잘 알고 있었다. 잠을 자려고 마시기 시작한 술이 일상을 망치고 그로 인해 삶 전체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일 말이다. 그럼에도 로는 기꺼이 술을 선택했다. 술은 그녀가 온종일 잠을 자든 소리 죽여 울든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잠을 자는 일을 도왔고 우는 일을 도와주었다. 술은 로에게 얼마든지 자도 되고 슬퍼해도 좋다고 말해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일단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묘한 생동감이 생겨났다. 다시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그 순간이 짧다는 게 문제였지만. 조금 더 마시면 금세 실망감에 사로잡혔다. 처음 마실 때와 달리 술은 어떤 것도 기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술에 취하면 사정은 더 나빠졌다. 환멸이나 슬픔, 곧 맞닥뜨릴 비극 같은 것이 반드시 로를 찾아왔다.
그런데도 로는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자신의 진짜 문제를 모두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계속 술을 마시는 한, 사람들은 술 외에 다른 화제를 떠올리지 못했다. 로가 어떻게 하면 술을 끊을 수 있는지 신경 썼다. 술을 마시지 않을 때의 로를 격려했고 술을 마실 때면 조언하고 충고하고 걱정했다. 모두 술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만 마셔라, 끊어라, 몸에 좋지않다는 식의 판에 박힌 얘기들이 오갔다. 그게 좋았다. 사람들이 술 말고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 오직 로만이 지금 벌어지는 일의 이유가 술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평소와 달리 사위가 오후에 도착했다. 어렴풋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사위가 로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술을 마시다 보면 어떤 시간들이 완벽히 사라져버렸다. 사위가 현관에서 거실에 있는 로 앞까지 걸어오는 시간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시간들이 점점 늘었다.
곱슬거리는 머리가 장난스러워 보였는데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어서인지 사위는 몹시 강압적으로 보였다. 로는 테이블에 놓인 것들에 그제야 눈을 돌리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병을 감추기 위해서였지만 이미 늦었다. 사위는 놀라는 기색 없이 로에게 앉아서 쉬라는 제스처를 취한 후 테이블에 있는 것을 치우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빈 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는 등 부지런히 움직였다. 로가 마시고 있는 것을 보았을 텐데도 그것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로와 눈이 마주치자 다정하게 웃어주기까지 했다. 사위는 선했고 동정심이 있었고 차별을 혐오했고 정치적인 균형 감각이 있었다. 유일한 단점은 로와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위는 고등학교에서 시간제 교사로 문학을 가르쳤다. 날마다 수업이 있는 게 아닐 테고 정규직처럼 출근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로가 여기에 머문 일주일 가량 사위는 매일 아침 일찍 나가 밤 늦게야 돌아왔다. 아마도 로가 집에 편히 있도록 시간을 준 것이리라.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가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