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학기행문

그리고, 남겨질 것들
글쓴이 : 박소연 날짜 : 19.07.01|조회 : 97

 

그리고, 남겨질 것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기고자 하는 것들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아름답거나, 의미 있거나, 가치 있거나,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그러나 사실 아름답다거나 의미 있다거나 가치 있다는 것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사실 사람들이 남겨온 것은 결국 자신들이 아름답거나 의미 있거나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 ‘남겨야 한다’ 혹은 ‘남기고 싶다’고 ‘생각’한 ‘무언가’일 것이다.

 영국 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는 거대했고 그 안에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혹은 그 이후를 살아간 사람들이 남기고자 한 ‘무언가’들이 빽빽하게 전시되어있었다. 높은 천장과 수많은 소장본들은 그 자체로 주는 위압감이 있었고 교양수업에서 보았던 유물과 그림들을 실제로 감상하는 것은 어딘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나는 로제타석과 고흐의 해바라기 앞에서 사진을 찍는 무리에 끼어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해야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조금은 실감 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곧 검색 한 번이면 수많은 고화질의 이미지들이 주르륵 뜨는 시대에 굳이 이렇게 사진을 남겨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어딘가 머쓱해졌다.

 내가 기대했던 런던의 무언가들은 기대만큼 좋았다. 옷감 주름의 결까지 촘촘하게 묘사된 조각상은 아름다웠고 나는 화면의 그림으로는 미처 알지 못했던 고흐의 섬세하면서도 거친 붓 자국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나는 거대한 박물관에서 자주 길을 잃었지만, 길을 잃은 곳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문득, 나 또한 이 여행에서 무엇을 남기게 될 것인지가 굉장히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럽고 당연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나의 기록이 되고, 기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여행 전부터 예정된 줄리언 반스 작가님의 인터뷰와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들과 대담은 내게 막연한 두려움을 주었다. 영어가 원어인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영어로 대답을 듣는다는 것이 내게는 꽤나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님의 따뜻한 눈을 마주하는 순간, 또 옥스퍼드 대학의 학생들이 자신이 번역한 시를 한국어로 읽어주는 순간, 그 걱정들은 모두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작가님은 (본인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 한국어로 질문하는 내 눈을 내내 따뜻하게 바라봐 주셨고 (후에 은서가 거의 고양이가 웅냥냥하는 걸 진지하게 들어준 수준 아니냐고 해서 슬프고 웃겼다.) 옥스퍼드 대학원에서 공부 중이신 학생 한 분께서는 우리를 거의 반나절 동안 옥스퍼드 대학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셨다. 또 장르의 특성상 내가 쓴 글에 대한 질문을 받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옥스퍼드의 학생으로부터 내 글에 대한 질문 또한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무척 기뻤다. 감사한 경험이었다.

 하우스 오브 일러스트레이션에서는 코리타 켄트의 특별 전시회를 보았고, 그 후에는 오랫동안 전시회 소파에 앉아 난민에 관한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그리고는 내내 그 자리에 앉아 내가 이 세계를 둘러싼 구조적 폭력에 대해 어디까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부터가 위선일까를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는 아마 내가 앞으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일상에서 비일상을 발견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말했던 코리타 켄트의 말과 내가 봤던 애니메이션의 장면들을 계속해서 곱씹게 되었다.

 자유시간이 주어진 여행의 마지막 날 오전, 나는 숙소 근처 카페에서 친구에게 편지를 썼고 편지를 다 쓴 후에는 엽서를 보내러 우체국에 들른 후 근처 공원으로 향하던 중 길을 잃었다. 그러나 그때 마침 마주친 노신사분께서 나를 근처 공원까지 기꺼이 데려다주셨고, 무사히 계획대로 공원에 갈 수 있었다. 그분은 공원에 가는 동안 내게 런던에 얼마나 있었는지, 얼마나 머물렀다 갈 것인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묻고는 끝으로 헤어지며 런던이 좋은 기억이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런던에서 마주한 순간들 중 가장 따뜻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세계가 점점 더 좁아짐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게 있어 어른에 가까워진다는 건 내게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고, 익숙한 이야기를 하고, 익숙한 것들을 좋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런던에서 나는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 사람들로부터 다정한 호의를 받았으며 패딩턴이라는 사랑스러운 곰돌이와 코리타켄트라는 작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고, 좋아하게 되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여행 내내 주변인들의 선물을 사던 연덕이는 스스로에게 꽃을 사주었다. 꽃이 시드는 것을 아쉬워하는 우리에게 연덕이는 꽃이 시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에는 당연히 끝이 있이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였을까? 생각보다는 아쉬움 없이 담담하게 여행의 끝을 맞이할 수 있었다. 런던아이 안에서 끝도 없이 넘실거리며 반짝이는 런던의 야경을 보면서, 어쩌면 나는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런던 브릿지를 보러 한참을 걷던 길, 테이트모던에서 마주한 낯선 화가의 초상화, 비행기 안에서 먹었던 컵라면, 숙소에서 맥주를 마시며 나누던 이야기들, 코리타 켄트의 그림, 하우스오브일러스트레이션의 단편 애니메이션들.. 한국에 돌아온 내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고 싶었던 것들은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조금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열흘 정도 머무른 런던은 적당히 쌀쌀하고, 적당히 낯설었지만, 다정했다. 그러나 이 여행이. 온전히 좋을 수만 있었던 것은 당연하게도 함께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런던의 쌀쌀함과 낯섦과 다정을 함께해준 연덕, 다은, 은서에게. 무엇보다 우리를 위해 여행 내내 애써주신 혜리쌤과 지민쌤께 감사드린다. 한국에서 만나게 될 우리는 영국에서의 우리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국에서의 우리가 사라지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우리가 밤새 나누던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유효할 것이고, 그렇기에 나는 이 여행이 내게 남겨준 것들을 기쁘게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여행을 통해 조금은 자란 것 같다. 사실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이다.

 

  

*밴드 넬의 곡 <그리고, 남겨진 것들>을 인용




번호 기 행 문 글쓴이 조회
4 LOVE NEVER FAILS 김연덕 108
3 그리고, 남겨질 것들 박소연 98
2 바나나의 시간 이다은 89
1 영국 기록 일지 장은서 8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