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학기행문

LOVE NEVER FAILS
글쓴이 : 김연덕 날짜 : 19.07.01|조회 : 698


LOVE NEVER FAILS

 

 

나는 전혀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지만, 런던에서 머무는 내내 새벽같이 일어나곤 했다. 첫 공기를 마시며 가만히 테라스에 앉아 푸르게 잠긴 도시를 바라보곤 했다. 기묘하게 솟은 나뭇가지와 굳건한 흰 건물들, 물과 빛과 어둠이 뒤섞인 잔디. 울타리. 조용한 그림자. 성 같기도 꿈 같기도 폐허 같기도 한 이곳에 아침이 조금씩 찾아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뻑뻑한 문고리를 들어올리며 추워 발을 모았다. 그렇게 벽돌이, 계단이, 나무가, 도로와 철제 울타리가 순서대로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면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그리고 내가 간절히 원할 때 끄고 켤 수 있는 스위치를 하나 갖게 된 것 같았고, 그것이 생각보다 손에 꽉 쥐어졌고, 나를 메마르게 하고 두렵게 하던 많은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 따뜻했고 그리웠다. 맨발로 테라스에 나가 무언가 기다렸듯, 무언가 흘려보냈듯 작은 스위치들을 기록해둔다.

 

우리는 긴 초 사이로 서로의 얼굴을 건너다보며 저녁을 먹었다.

우리는 누군가 낮달을 발견하면 고개를 젖혔고

우리는 집집마다 다르게 달린 문고리와 문패를 들여다봤다.

우리는 이층버스를 타고 계단을 올랐다 다시 내려왔다.

우리는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좋다고 했다.

우리는 커다란 박물관 입구에서 첫 농담을 나누었고

차갑고 조용한 그리스 두상들 사이를 걸었다.

나는 로마의 음악(Roman music)을 로맨스 음악(Romance music)으로 잘못 읽었다.

나는 조각상과 조각상 앞의 사람들을 그렸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시대를 한 발 늦게 걷다가

가끔 앉았다.

우리는 들어가도 들어가도 끝이 없는 미술관에서 서로에게 다가가 장난쳤다.

우리는 빗물에 젖은 사자상을 보았다.

우리는 보라색 교복과 하늘색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보았다.

몇몇 아이들이 이쪽을 쳐다보기도 했다.

나는 탄성을 지었다.

우리는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았다.

우리는 계란과 무순만 들어간 단순한 샌드위치를 먹었다.

나는 숙소에서 지하철역까지의 방향을 계속 헷갈려했다.

나는 붉은 전화박스 안에 한 번 들어가보고 싶었다.

나는 다운트 북스 이층에서 야한 시집을 발견했다.

나는 마켓에서 하트 모양 귀걸이를 샀다.

나에게 그것을 판 사람이 “발렌타인데이에 하고 다녀” 말했다.

그 말을 우리 중 몇 사람에게 전해주었다.

우리는 도자기나 커피나 유리를 싸기 위해 시내에서 신문을 몇부씩 챙겼다.

우리는 피카딜리 라인을 자주 탔다.

우리는 때때로 한국의 날씨를 확인했다.

우리는 아직 피지 않은 수선화를 파로 오해했다.

우리는 따뜻한 스콘을 반으로 갈랐다.

우리는 걷는 속도가 다 달랐다.

우리는 먹는 속도도 다 달랐다.

우리는 손이 길고 아름다운 작가를 만났다.

우리는 오래된 극장에 들어가 천국을 뜻한다는 푸른 천장을 올려다봤다.

우리는 경청했다.

우리는 식재료가 뺵빽하게 늘어선 향신료 가게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불 피운 흔적이 남아 있는 난로를 신기해했고

나는 액자와 액자 속 사람들을 창 밖 사람들인 것처럼 구경했다.

우리는 강아지 동상과 기사 동상을 지나쳤다.

우리는 바람부는 템즈 강을 건넜다.

나는 애프터눈티 가게 건너편의 예수상을 확대해 찍었다.

우리는 동 트기 전에 숙소에서 나왔고

우리는 옥스퍼드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잠시 멍하니 있었다.

우리는 백합 문장이 새겨진 우체통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타오르는 봉헌초를 보았다.

나는 내 시에 쓰인 달 기호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폭발하는 시 후반부에 관한 질문도 받았다.

한국시를 번역하는 친구와 서로의 가족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둥글고 높은 천장 아래서 홍차를 마셨다.

우리는 교회 옥상에 올라 펄럭이는 무지개 깃발을 보았다.

옥스퍼드 아지트의 커튼 무늬는 자주색 꽃이었다.

우리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유리가 반짝이다 어두워지다 다시 반짝이는 순간을 일일이 알아채지는 못했다.

우리는 교수만 잔디를 밟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웃었다.

우리는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예배당의 비밀을 곳곳 밝혀 보았다.

우리는 조심스러웠다.

나는 만화경을 들고 친구의 얼굴과 정원의 건축물을 번갈아 돌려보았다.

나는 공룡 뼈대 앞에 다리를 뻗고 앉았다.

우리는 청록색 틴케이스에 담긴 차를 열심히 골랐다.

우리는 횡단보도에 서서 비틀즈를 떠올렸다.

우리는 잠들듯 천천히 돌아가는 관람차에서 공사중인 빅벤을 봤다.

나는 타워브릿지 난간에 기대선 친구들을 그렸고

누군가 그런 나를 찍어주었다.

나는 7파운드를 주고 꽃집에서 제일 크고 흰 장미를 샀다.

나는 그것을 종이로만 싸달라고 했다.

그것이 사랑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그리고

어쩌면 그래서

 

소연.

다은.

은서.

혜리 선생님.

지민 선생님.

 

마지막 날 아침 온통 흰색인 동네에서 길을 잃어 구글맵을 켰다.

길을 잃은 곳에서 볼드체로 적힌 낙서를 보았다.

 

LOVE NEVER FAILS

 

촌스러워도 믿고 싶어지는 것들을 정말 믿게 해주어서 고마워요. 나는 이제 이것을 매일 봅니다.

내내 푸르게 잠긴 내 아름다운 도시, 내 아름다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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