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학기행문

바나나의 시간
글쓴이 : 이다은 날짜 : 19.07.01|조회 : 88

 

바나나의 시간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숙소 근처 24시 마트에서 바나나 한 송이를 샀다. 채도 높은 노란색에 각각의 크기도 고른 모범적인 바나나였다. 숫자도 다섯 개뿐이어서 좋았다. 여섯 명의 일행 중 바나나를 먹지 않는 내 몫을 뺀 숫자였다. 그러니까 바나나에게 있어서 나는 포식자가 아니라 관찰자였던 셈이다.

 첫 아침에 바나나 세 개가 먹힌 걸 봤다. 정확히는 숙소에서 나오기 전 식탁에 덩그러니 놓인 바나나 두 개를 봤다. 게으른 관찰자인 나는 누가 먹는지 볼 생각 없이 차가운 샌드위치를 중세 시대 농노처럼 감긴 눈으로 먹었다. 남겨진 바나나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숙소 앞에는 공원이 있었는데 쇠창살 모양으로 된 울타리가 입구 없이 전체를 둘러막았다. 넝쿨을 시선으로 헤집고 안을 들여다보면 흔한 미끄럼틀이나 산책을 위한 인도도 없었다. 건물보다 큰 나무들만이 즐비했다. 스산하고 음침한 게 버려진 공원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학적인 장소로 보였다. 굳이 들어가서 사건을 겪는 문학 속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아 들어가 볼 생각을 결코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옆을 따라 걷다가 모퉁이에서 꺾으면 상가가 줄 서 있고 어제 들렸던 마트가 있었다. 거기에서 길을 건너면 역이 있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자주 먼 곳으로 나갔다. 박물관으로 가기도 했고, 줄리언 반스 작가를 만나러 가기도 했고, 옥스퍼드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패딩턴 역으로 가기도 했다. 오이스터 카드를 놓고 와 도로 숙소로 돌아가기도 했다. 역 안에 설치된 이상한 현대 작품을 보면서 징그럽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역의 이름을 내내 외우지 않은 건, 당사자가 아니라 관찰자로서 여행하겠다는 내 자존심이었다. 바나나를 먹지 않으면서 지켜보듯, 여행에 들뜨지 않은 채 지켜보겠다는 식의.

 3인칭 전지적 시점의 방식을 내재하게 된 건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부터의 내 오래된 버릇이었다. 내게 닥치는 불행을 보면서도 이 일에 명확한 복선이 있었음을, 어떤 사람이 내게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 사람의 욕망과 그에 대한 왜곡된 표출임을 되새기면 나는 괜찮아졌다. 이 여행에서도 나는 그런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 무엇에게도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적당히 경이로워하고 적당히 불편해하고 적당히 영국에서의 일상을 보내던 중, 어느 아침은 일찍 일어나 일 층 식당으로 올라왔다. 전날의 설거지거리를 씻고 가만히 식탁에 앉아있으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커튼을 거둬 밖을 보니 대형 버스에서 어린아이들이 우르르 내리고 있었다. 열린 공원 안쪽으로 끊임없이 들어갔다. 나는 이 층 거실로 올라갔다. 테라스에서 그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웃음소리가 무척이나 맑고 선명했다. 테라스에 앉아 공원의 새로운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 후부터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옥스퍼드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나서 당황스러웠다. 인물의 심리를 묘사할 때처럼 내 슬픔이 나오기까지의 경로를 샅샅이 살펴봤다. 마땅한 이유는 많았지만 나에게 와닿는 핍진성은 없었다. 설명되지 않는 마음에게 지친 채 숙소로 돌아와 테라스에 앉았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불쑥 깨달았다. 나는 이곳과 이 사람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거구나. 이미 일정은 6일 차, 남은 건 3일뿐이었다.

 그 이튿날 새벽에 나는 테라스가 있는 이 층 거실에 홀로 앉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여행 도중 산 선물을 포장했다. 맨 위층까지 올라가 방마다 선물을 놓으면서 내려왔다. 선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 일찍 홀로 나섰다. 자유 시간이었기에 여행 중 처음으로 혼자가 되었다. 유명한 체인점에서 아침으로 먹을 메뉴를 고르다 어떤 영어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든 순간 기나긴 답장이 와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걸 본 순간 조금 울었다. 아무리 3인칭을 유지하려고 해도 나는 1인칭으로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타자로 살기 위해 노력해왔던 인생이 역으로 당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오던 삶이었다. 여기에서는 나를 보호할 필요가 없었다. 나를 헤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길을 잃었다. 복선조차 없는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난 문학 속 등장인물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데이터 신호가 잡히지 않는 넓은 공원에서 한 시간 삼십 분 동안 헤맸다. 이곳에 온 걸 후회하기에는 예쁜 풍경이었으므로 섣부르게 걸은 나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버스를 타 인근 역에서 내렸지만 모이기로 한 약속 시각까지 숙소로 갈 수 없었다. 결국, 일행들에게 연락하여 나 혼자 이동해 다음 일정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역 개찰구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한참이나 나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마냥 기다리는 경험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나는 개찰구만을 들여다봤다. 일행 중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닮은 앞머리가 보이면 다급하게 일어섰다가 그 아래 이국적인 얼굴에 실망하며 도로 앉았다. 다리가 저릴 때쯤 다 같이 올라오는 일행들이 보였다. 나는 내게 불친절하게 굴었다가 자신과 같은 인종에겐 호의적으로 굴었던 역무원에게 내 일행들을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봐, 이 사람들이 내 일행이야. 난 혼자가 아니라고. 모두 나오자마자 둥글게 나를 감싸 섰고 역 바깥에는 햇빛이 환했다. 누군가 나를 껴안았고 누군가 고맙다고 했다. 정신없는 반가움 속에서 나는 계속 웃었다. 한 번도 안 울어본 사람처럼. 아니, 생각해보니 한 번도 울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때 그 순간처럼 웃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정정한다. 나는 울어본 적이 많은 사람처럼 웃었다.

 일정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니 바나나 두 개는 그새 사라졌었다. 지난날 내가 바나나 두 개에 대해서 아무도 먹지 않아 새까매졌다고 흘리듯 말하니, 누군가가 바나나가 가장 맛있을 때라고 일러줬다. 누군가 바나나가 가장 맛있을 때 그걸 먹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나나가 찬란하게 노랗던 청년기부터 맛있게 어둡던 노년기까지의 생을 맛보지는 않았더라도 그 평생을 끝까지 지켜봤다. 어두운 날의 공원과 밝은 날의 공원의 다른 모습을 지켜봤다. 첫날의 초승달이 마지막 날의 하현망 사이의 달이 될 때까지 단단하게 아무는 걸 지켜봤다. 그렇게 그곳을 떠나왔다.

 돌아와 내가 있었던 곳의 주소를 지도에서 검색해 역의 이름을 찾아봤다. 생경한 발음과 낯선 표기법의 주소지만 나는 분명 그곳에서 머물렀다. 몇 번 울고 그보다 더 많이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 함께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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