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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건에 헌신한 농사꾼 출신 영의정의 궤적-김육의 『잠곡유고』
문학의 풍경 자동차 이력서 진실은 반박당하기 쉽다 낙서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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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반박당하기 쉽다
글 손아람 ㅣ 소설가. 1980년생
소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소수의견』 『디 마이너스』 등
열두 살 때였다. 아버지 친구에게 선물을 받았다. 손 때가 너절하게 묻은 헌 책. 제프리 아처의 단편소설집이었다. 내가 장난삼아 쓴 엽편소설을 우연히 읽었던 그분은 어린 재능을 꽤나 진지하게 여겼던 것 같다. 나중에 이런 작가가 되면 좋겠다는 식의 축복이 전언으로 돌아왔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다. 매력적인 직업이 아니었다. 그리고 작가가 된 지금, 나는 운명처럼 제프리 아처의 반대편에서 글을 쓴다.
제프리 아처는 소설가이자 영국 보수당 국회의원이었다. 작법은 할리우드 영화처럼 전형적이고 세계관은 후하게 쳐준다면 산업시대만큼 낡았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이 단편집에 실린 「일품요리」는 내 문학관에 아주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 내가 읽어본 최고의 소설과는 거리가 멀지만, 문학이 할 수 있는 궁극의 일이 무엇인가를 나에게 가르쳐준 소설이다. 서가에서 분실한 지는 십 년이 넘었고, 이미 절판된 지도 꽤 오래된 책이지만, 다섯 번은 족히 읽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줄거리는 이렇다.
아들은 친구들처럼 지역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되고 싶다. 머리를 비운 채 일하고 퇴근하면 취미로 요리나 즐기면서 사는 게 꿈이다. 이미 공장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는 고된 생업의 유전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타이어나 바꿔 끼우며 살겠다는 거냐!”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며 아들을 집에서 내쫓아 버린다. 공장 노동자만 아니면 뭐가 되든지 상관이 없다면서. 어머니의 중재에 따라, 아들은 런던에서 1년간 다른 직업을 경험해 보기로 한다. 아들을 기다리는 것은 공장 노동보다 고되고 야만적인 런던의 서비스 노동이다. 아들은 달력을 세며 버틸 뿐이다. 온갖 잡일을 전전하던 아들은 약속된 1년째 날을 얼마 앞두고 호텔 식당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간다. 야채 깎는 일에 급하게 투입된 그의 칼질이 셰프의 눈에 든다.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재능을 인정받고, 요리에 푹 빠져 처음으로 날짜 세는 일마저 잊어버린다. 1년을 채운 날, 그는 집에 돌아가는 대신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수십년이 흘렀다. 아들은 템스 강변에 자기 이름을 내건 고급 레스토랑을 갖게 됐다. 레스토랑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후줄근한 차림의 노인이 찾아온다. 노인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안내하라는 지시를 받은 아르바이트생은 의아함을 떨칠 수가 없다. 아들은 위엄이 서린 목소리로 아르바이트생을 꾸짖는다. “저분이 없었다면 나는 자네처럼 살고 있었을 거야!”
위험한 이야기다. “인생 경험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해라”고 실언했다가 아르바이트 노동조합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던 한 국내 정치인의 발언을 연상시키는. 소설이 아닌 일상 발화라면 보수당 부총재였던 아처 역시 같은 처지를 면치 못했을 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단편이 포착한 삶의 어떤 국면은 묘하게 설득력 있는 진실처럼 느껴졌다. 이후로도 이런 경험을 자주 했는데, 나는 성장주의를 회의하면서도 성공 신화에 매료당했고 강간과 패권주의가 범람하는 무협물을 낄낄거리며 읽는 운동권 학생들과 사이버펑크 혁명 서사에 열광하는 보수주의자들을 왕왕 보았다. 그들은 허구일 뿐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모든 예술, 심지어 가장 보잘 것 없는 예술조차 적어도 가장 보잘 것 없는 만큼 우리의 세계관을 침윤한다고 믿는다.
이 힘은 오로지 거짓말에서 온다. 우리의 일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대놓고 싸지르는 가망 없는 거짓말이다. 그래서 반박의 여지도 없는 거짓말이다. 부정할 가치도 없는 수준에서 규약 된 거짓말은 사람들을 현혹한다. 인간은 진실 그 자체보다 일말의 진실이 어른거리는 듯한 환각 속에서 쉽게 진실과 직면한다. 내가 아는 훌륭한 작가들은 현실과 허구, 진실과 거짓의 범주를 뒤섞어 혼란을 가중시키기를 즐겼다. 문학의 설득법이다. 학자나 기자는 할 수 없는 일. 문학보다 사회면 기사와 과학 논문이 훨씬 자주 논쟁에 휩싸인다. 거짓말에 비하여, 진실은 반박당하기 너무 쉽다는 약점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