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무방과 들병이와 장삼이사들을 만나다-김유정의 실레이야기마을
지식산업의 중심, 출판의 안과 밖 해방 후 상업출판사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네 가지 전략 전집(全集), ‘모두’를 모아 읽게 해주려는 로망 순문학의 죽음과 이야기의 탄생
조선 재건에 헌신한 농사꾼 출신 영의정의 궤적-김육의 『잠곡유고』
문학의 풍경 자동차 이력서 진실은 반박당하기 쉽다 낙서의 기술
수상작 선정｜ 어둠 속에도 빛을 발한 2015 한국문학의 별들 제23회 대산문학상 수상자 인터뷰 수상작 리뷰 시 부문｜타국에서 촉발되는 혈연의식과 간절한 언어 수상작 리뷰 소설 부문｜나는 서 있어 이 이야기 앞에 수상작 리뷰 희곡 부문｜'딱 중간에 서는 인생' 의 연대기이자 현대사 수상작 리뷰 번역 부문｜제3세대 번역가의 탄생
수수바람, 들리세요?
글 조용호 ㅣ 소설가. 1961년생
소설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왈릴리 고양이나무』 『떠나니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꽃에게 길을 묻다』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등
|
아버지에게 드리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첫 편지는 제가 전주에서 하숙하면서 고등학교 다닐 때였으니, 그때가 1970년대 말이었으니, 얼추 40년 전쯤 보낸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당신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리 빨리 가신 후 저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낳아서 벌써 두 녀석 모두 성인이 됐답니다. 위로 큰 녀석이 아들이고 그 아래가 여식입니다. 요즘 아들 녀석은 너무 바쁩니다. 아직 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녀석은 관심 분야에 대한 탐구와 학교 수업까지 같이따라가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녀석과 함께 놀고 싶고 기회만 닿으면 말을 섞고 싶은데짬을 잘 안 내줘요. 그래도 아버지를 대하던 옛날 저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아, 저는 얼마나 무뚝뚝하고 차가운 자식이었습니까? 죄송합니다. 큰절 올립니다. 당신의 그 낭랑한 목소리 한 번만이라도 다시 듣고 싶습니다.
그 겨울밤 마당의 화톳불, 지금도 선연하게 떠오릅니다. 앰뷸런스가 돌아간 뒤 윗목으로 당신의 거구를 옮기고 병풍으로 가렸습니다.
고맙게도 성당에서 교우들이 몰려와 높은 목청으로 연도를 바쳤습니다. 그 연도 소리, 둔중하게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어찌 그리 위로가 되던지요. 죽은 이를 위한 기도라는 게 사실 산 자를 위무하기 위한 것이라는 역설, 정말 실감되더군요. 아버지도 그날 병풍 뒤에 누워서 교우들의 그청아한 연도를 잘 들으셨는지요.
마당에는 화톳불을 피워놓았고 그 위에는 대형 찜통을 올려놓아 콩나물국이 뚜껑을 들썩이며 끓고 있었습니다. 아비를 잃었으니 정상이 아닌 인간이라 하여 팔 한쪽을 끼우지 않고 입은 상제의 옷을 입은 저에게 친척이 그 콩나물국을 퍼다 주면서 먹으라고 강권하더군요. 당신을 보내는데, 입맛은 어찌 그리 슬픔을 받쳐주지 못하던지요. 얼마나 입에 착 달라붙던지, 그날 이후 콩나물국밥은 제 단골 메뉴가 돼버렸답니다. 아버지, 당신은 저에게 슬프지만 한없이 선량하고 낭만적인 남자의 상징입니다. 그런 기질을 저에게도 물려주어 조금 원망스럽기도 하지만요.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려면 모질어야 하는데, 아버지나 저나 유전자 탓을 할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아버지, 제가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썼던 초기 단편소설, 여기 잠깐 인용할까 합니다. 쑥스럽지만, 보셔요.
우리 남매는 부모님 대신 할머니와 같이 산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야트막한 산이 마을 뒤로 병풍처럼 서 있는 광막한 들판의 끝머리쯤에 자리 잡고 있고, 우리 집은 이 마을에서도 제일 높은 지대에 있다. 아침에 일어나 마루에 나서면 들판이 지평선을 드러내며 끝없이 펼쳐진다. 마루에 서면 비가 들어오는 모습도 보인다. 지평선 하늘가가 시커멓게 뭉개지기 시작하면 예외 없이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그 들판에서 회오리바람으로 굴러온다. 물뿌리개로 화단을 조금씩 축여가듯 그 빗줄기는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들판을 가로질러 순식간에 마당까지 밀려온다. 한없이 잇닿은 지평선 너머에는 그림자처럼 산맥이 하나 아득하게 누워 있다. 집 뒤편 황토 고구마밭 언덕 너머로는 철길이 지나간다. 그 철길 위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끔씩 다녀간다. 그들은 열차를 타고 북쪽으로 한 시간가량 내달리는 소도시에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따로 살고 있다. 북쪽으로 달려간 기차가 다시 내려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마루 위에 우두커니 앉아서 그 열차의 끝 간 곳을 떠올리곤 한다. 외줄기로 놓인 철로를 따라간 열차가 어디를 돌아서 다시 오는 것인지 신기하다. 지평선 너머 아득한 산맥 뒤편에 우리 동네를 지나가는 철도와 잇닿은 길이 있을 것만 같다. 그 들판을 가로질러 몇 날이고 걸어가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딴 세상이 나올 것 같은 꿈을 꾸곤 한다.
「수수바람」이라는 소설입니다. 아버지도 기억나시지요? 우리가 들녘마을에 살 때, 아버지는북쪽 소읍의 기차역 하역노동자로 일했습니다. 가난한 시골 들녘에서보다는 훨씬 부가가치가 큰 노동이었지요. 그 하역판에 들어가기 위해 쌀을 수십 가마니씩 주어야 했다니 짐작할 만합니다. 저는 지금도 북행열차에서 던져주시던 사탕봉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들녘마을에 다니러 오셨다가 다시 올라갈 때면 아무런 가게도 없는 그 마을을 떠나 십여 리 길을 걸어간 작은 역에서 산 사탕을 철로변 언덕에 앉아 배웅하는 남매를 향해 던지시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차창 너머로 던져준 것은 누가 무어래도 눈물겨운 부정이었습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저에게 산처럼 거대하고 웅장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그 단편에 이어나갔습니다.
달빛이 환한 밤 아버지가 불쑥 마당으로 들어선다. 장대 같은 키 뒤편으로 긴 그림자를 거느리고, 수수모가지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마당에서 헛기침을 한다. 제일 먼저 잠에서 깬 건 역시 할머니다. 할머니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커다란 아버지 손을 부여잡고 방으로 들었다. 아버지는 시커멓게 물들인 군용잠바에다 통이 넓은 양복바지 차림이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 위로 달빛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노모의 안부를 챙길 겸, 필요한 물건을 대처에서 배달할 겸 이런 식으로 불쑥 찾아들곤 한다.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두세 달에 한번꼴로 내려와서 열흘가량 살림을 꼼꼼히 챙기며 시어머니를 도와주고 간다. 아버지는 오늘도 밤을 새우고 나면 새벽 기차를 타러 나갈 것이다.
족장으로서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듬직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목소리는 타고난 것이었습니다. 낭랑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듯싶습니다. 당신의 노랫소리는 지금도 귀에 선연합니다. 하역판에서 노동조합 총무부장으로 신임을 받아 같이 일하는 이들의 궂은일을 살피고 노동의 의무에서 면제된 처지에서도 팔을 걷고 그들을 도와서 당신은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런 당신, 따스한 감성의 당신에게 찾아온 ‘사랑’은 원죄와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당신이 그렇게 소읍을 돌며 각혈을 하다가 서둘러 떠난 후, 웬 여인이 할머니가 홀로 지키던 집에 찾아와 당신의 영정 앞에 망연히 앉아 있다 갔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이 가신 지 30여 년 만에 굿판을 벌이듯 장편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로 써낸 뒤에서야 비로소 어느 정도 슬픔에서 헤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제 정리해야 될 듯싶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어려서 당신을 많이 원망하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당신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도정을 걸어갔을 뿐입니다. 평생 식솔들을 위해 노동을 하다 어느 순간 당신의 지친 몸에 스며든 감정이 그리 급격한 내리막길을 준비할지는 미처 모르셨겠지요. 제가 지금도 원통한 것은, 그때 서울에서 대학이랍시고 다니는 아들이 내려갈 때마다 무슨 말이든 붙여보고 싶어 하셨던 당신을 외면했던 사실입이다. 아버지의 삶,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슬픔을 그때 조금이라도 들어두었더라면 이리 애통하진 않겠지요. 아버지, 그 낭랑하고 청아한 목청으로 부르시던 ‘불효자는 웁니다’, 다시 듣고 싶습니다. 당신이 살다가신 나이보다 훌쩍 더 살아버린 불효자, 아버지 목소리를 그리며 웁니다, 아버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