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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건에 헌신한 농사꾼 출신 영의정의 궤적-김육의 『잠곡유고』
문학의 풍경 자동차 이력서 진실은 반박당하기 쉽다 낙서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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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초대석
시인의 근황
●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 요즘 근황 중에 얘기할 만한 것이 있다면, 남미로 배낭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 정도가 될것 같습니다. 남미에는 30년 전에 잠깐 다녀온 적은 있습니다.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 프로그램을 마치고 멕시코와 페루에 잠깐 다녀왔었는데, 그때는 너무 짧은 일정이라 지역의 풍광과 인디오의 삶 등을 구체적으로 살피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남미 쪽을 가고 싶다고 늘 생각을 해왔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습니다. 벼르고 벼르다 이제 한 번 실행에 옮길까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초기시에 대하여
● 이제 본격적으로 제가 평소에 궁금해 하던 것이고, 독자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질문드리고자 합니다. 선생님의 연보를 보면 첫 시집 『반란하는 빛』(1970)과 두 번째 시집 『가장 어두운날 저녁에』(1982)의 간격이 12년 정도 나는데, 지금까지 그 이유를 여쭤보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 제가 1968년에 《현대문학》에서 추천 완료를 하였는데, 창작 상으로는 1970년대가 빈 공간입니다. 첫 시집은 1970년에 전봉건 선생님의 권유로 현대시학사에서 내었습니다만, 두 번째 시집은 12년 후에나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제가 대학교수가 되어 스스로 학문적 결핍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수직을 시작한 것은 1973년, 30대 초반에 충남대에서였습니다. 막상대학교수가 되고 보니까 내가 너무 공부를 안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신제 박사가 나오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신제 박사란 건 규정에 따라 개설된 박사 학위 과정에 입학하여 강의를 듣고 학위를 취득한 박사를 말하는데, 요즘 시행되고 있는 박사 학위 제도인 것이죠. 그 이전에 시행된 구제도에는 박사 과정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저와 마찬가지로 석사 학위를가지고 대학에 전임강사로 부임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까 스스로 부족함을 느껴서 서울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충남대에서 매주 서울로 강의를 듣기 위해 다니고, 또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에는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또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제가 박사 과정을 입학한 것이 1974년이고 학위를 받은 것이 1980년인데, 바로 이때 7년 정도의 시간이 창작 상의 공백기로 남아 있게 된 거죠. 1982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에 시가 70여 편 정도 실렸는데, 첫 시집 이후 그때까지 쓴 시가 그 정도였던 셈입니다. 시인이 등단 직후 열심히 활동하여서 문단에 강한 인상을 주고 개성을 돋보이게 해야 이름이 각인되는데, 그때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은 늘 아쉽게 생각합니다.
● 아, 그랬었군요. 그렇지만 그때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쓰신 『한국낭만주의시연구』(1980)라는 좋은 저서가 나왔으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시집의 성격이 그래서 독특한 듯합니다.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은 유사성과 이질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도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 사이에는 연속성과 이질성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인으로서 실험적인 정신을 담으려고 노력한 첫 시집『반란하는 빛』에는 34~35편이 실려 있는데, 그 경향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아방가르드적인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문명비판적 경향입니다. 문명비판적 경향이라는 것은 이른바 신고전주의, 주지주의 등으로 부르는 것이죠. 그때 저는 젊은 시인으로서 실험적인 시에 관심이 있었는데, 당시 제가 관여한 《현대시》 동인은 그것을 내면의식의 탐구라 불렀지요. 제가 지금 보기에 그것은 일종의 쉬르레알리즘(초현실주의)에 기초한 자아의 표출이라 부르는 것이 정확할 것 같아요. 첫 시집에는 그런 아방가르드적인 측면과 주지적인 경향을 지니는 문명비판적 측면이 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측면이 세계관의 측면에서 이질적이지만, 둘 다 현대문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죠. 그때는 그런 미세한 차이를 정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그저 같은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이에 반하여 두 번째 시집은 성격이 다소 달라집니다. 그때 나이도 벌써 40대가 되어서 시에 대한 생각도 깊어졌지요. 실험적인 것만으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감동도 우러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한 거죠.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시의 성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입니다. 그래서 첫 시집의 두 경향 중 아방가르드적인 요소는 극복하고, 문명비판적 요소는 계승을 하게 되었지요.
이후의 시적 경향과 시집
● 이제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성격이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이왕 시적 경향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니, 이와 관련하여 이후의 시적 흐름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그 이후 세 번째 시집부터는 문명비판적 측면까지도 지양하고,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실존적 존재론의 문제, 삶과 죽음과 같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문제에다가선 것입니다.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그릇」 연작시입니다. 이 작품들이 실제로 제5시집 『사랑의 저쪽』(1990)에 실렸지만, 창작 시기상으로는 제3시집 『무명연시』와 동시에 쓰였습니다. 존재론적 탐구는 인간의 유한성에 주목하게 되어 필연적으로 허무적 분위기를 띨 수밖에 없습니다. 「그릇」 연작이 보여주는 허무적 실존의식이 그 반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런 허무적 실존의식을 극복하려 노력하다가 불교적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무명연시』는 실존적 존재 탐구의 문제와 불교적 인식을 결합한 실험적인 시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음악성과 이미지 등에도 여러 실험적인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이런 것도 중요한 실험이라 생각하는데, 요즘 평론가들은 이런 실험의식을 잘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웃음). 그 후로 지금까지 불교적 인식에 바탕을 둔 삶의 존재론적 문제 탐구라는 시적 성향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근원적인 것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다소 변형되어 전개되기도 하는데, 제가 쓴 사물시가 그런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사물을 인식 대상으로 하여 사물이 지니고 있는내적 진실을 불교적 세계관으로 해석하는 시가 그런 것입니다.
● 지금까지 선생님께서는 최근의 『바람의 아들들―동물시초』(2014)까지 총 22권의 시집을 내셨고, 총10권의 시선집을 내셨습니다. 이 중에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집이 따로 있는지요.
- 개인적으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시집은 없습니다. 다만 독자들이 많이 사보는 것은 『꽃들은별을 우러르며 산다』(1992)라는 시집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시집에는 특정한 주제로 쓴 시
집들이 있습니다. 앞에 말한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는 대중적이면서 미학적인 시들, 문학전문지가 아니라 대중잡지나 사보에 발표된 시들을 모은 것입니다. 시가 쉽고 서정적이고 또 연가풍이라 대중 독자들이 좋아 하나 봐요. 그리고 『아메리카시편』(1997)은 미국 문명사에 대한 비판을 다룬 시만을 모은 것이고, 『푸른 스커트의 지퍼』(2009)는 생태시만 모은 시집입니다. 그리고 『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는 꽃만을 다룬 시들로 구성되었고, 『임이 부르는 물소리 그물소리』(2008)는 우리 국토를 소재로 다룬 시들을 모은 것입니다.
● 시집과 관련해서 문득 떠오른 것인데, 선생님 시집이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는지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 제 연보를 보면 확인이 되겠지만, 일본어,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체코어로 번역이 되었고,러시아어로는 현재 번역이 완료되어 출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스페인어 번역이 인상에 남습니다.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El Cielo de Dios También Tiene Oscuridaad)』라는 스페인어 번역시집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의추천으로 그의 출판사인 멕시코의 부엘타(Vuelta, 귀향) 사에서 나왔습니다. 또 그의 추천으로 그 자신이 주간인, 스페인어권의 대표적인 문학계간지 《부엘타(Vuelta)》에 「별」, 「사랑」, 「시」 등이 특집으로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 근대시, 단절이냐 연속이냐
● 선생님께서는 시론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들을 내셨습니다. 저는 그 중 우리 근대시가 외국 문학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전통 단절론을 비판적으로 보는 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시조와 같은 기존의 정형시가 잡가나 사설시조 등의 해체 과정을 거쳐 한국의 근대 자유시 형성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 그것인데요.
- 그런데 그 논의에 대한 반응은 생각보다 크게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제 전공이 현대시 분야이고, 그 논의의 핵심인 잡가, 사설시조 등은 고전문학 분야라서 학문 간의 벽 때문에 제 논의자체가 읽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문제를 다시 말하자면 시의 전개를 세계사적으로 볼 때 각국의 큰 흐름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모든 시는 정형시에서 자유시로 발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원래 시는 노래로 불렸고, 그 노래의 가사가 시 아닙니까. 노래는 정형성을 지닐 수밖에 없으니 시는 원래 정형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에서 처음으로 자유시(vers libre)라는 말이 사용된 곳이 프랑스입니다. 프랑스의 라마르틴이 최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자유시는 모든 운율과 형식을 완전하게 부정하고 자유롭게 쓰는 시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정형시에 어느 정도 파격이 있는 시를 지칭하는 것이지, 정형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유시에는 정형과 운율이 있는데 그것을 어느 정도 벗어나서 쓴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형시와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유시를 거쳐 현재 우리가 말하는 완전한 자유시, 산문시로 이행되는 것입니다. 다시 간단하게 말하자면 처음의 시는 정형시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의 자유시처럼 형식적으로 파격이 시작되고 그 파격이 점점 심화되면서 완전한 형태의 자유시, 산문시로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전세계적으로 동일한 패턴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시의 형식에 있어서의 이런 역사적 전개가 우리의 경우에도 유사하게 일어난다는 것이 선생님의 주장이신 거죠?
- 그렇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도 유사한 단계를 거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우리말로 이루어진 시 장르의 대표는 시조인데, 시조는 정형시 아닙니까. 이런 정형시에서 현대의 완전한 자유시로 가기 위해 그 이행 과정으로서 율격의 형식 파괴가 당연히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설시조입니다. 사설시조가 한국에서 부르는 명칭이라서 그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세계사적 관점으로 볼 때 이것은 프랑스의 자유시와 같은 것입니다. 그 자유시를우리 식으로 부르자면 사설시조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사설시조라는 정형시의 파격을 거쳐서 근대 자유시, 산문시가 되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유럽에서 근대화가 먼저 일어나고 동양이 뒤늦게 근대화에 합류하면서, 서구 문명의 영향이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오해라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이미 서양에 자유시가 있었고 그것이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근대의 자유시가 되었는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그 변화가 너무나 급속하게 이루어져 마치 단절된 것처럼 보일 뿐이죠.
● 선생님께서는 이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매체의 변화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신데요.
- 예, 이런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매체의 변화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시는 매체적 관점에서 볼 때 음성 전달에서 시각 전달로 변화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서양에서도 시는 처음에 노래나 낭송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귀부인의 후원을 받은 문인들이 살롱에서 시를 낭송했던 사실이 그 예가 됩니다. 그러던 것이 눈으로 읽는 방식으로 변화됩니다. 이 변화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의 등장에 따른 책의 상품화입니다. 이런 변화가 서구에서는 16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에 확립되지요. 이런 활자매체의 등장은 자유시의 발생과 겹칩니다.우리의 경우도 사설시조에서 근대시로 이행하는 시기와 매체의 변화 시기가 겹칩니다. 1900년대 초기에는 문학을 유통시키는 활자 매체 같은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시조 같은 경우도 노래로 불러지지 않고 활자로 읽히는 것은 1920년대 전후 아닙니까. 문학잡지나 시집 발간 등 활자매체가 본격화되면서 사설시조에서 근대시로의 이행이 일어납니다. 음성 매체에서 시각 매체로의 변화가 사설시조에서 근대시로의 이행과 겹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새로운 형식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것을 단절이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 그럼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되는 최남선의 신체시 같은 것도 다르게 평가될 수밖에 없겠지요?
- 지금까지도 우리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자유시의 효시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체시는 자유시로 가는 과정에서 생긴 일종의 수구 세력의 반동적인 시 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체시는 정형시의 일종으로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장르입니다. 그러니 생명력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최남선이 신체시를 강조한 것은 우리나라에는 중국의 한시, 일본의 하이쿠 등과 같은 완전한 정형시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열등의식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시조조차 완전한 정형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추구한 것이 근대적 의미의 자유시가 아니었다는 것은 최남선뿐만 아니라 이광수의 4행시, 김억의 격조시 등 자유시 주창자 대부분이 정형시로 회귀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조언
● 마지막으로 요즘의 젊은 시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그런 것을 이야기하려면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좀 복잡해질 것 같네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은 크게 두 가지인 것같습니다. 하나는 난해한 시인데, 흔히 포스트모던한 시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평론가는 미래파라 부르기도 하지요. 다른 하나는 서술적인 시로서, 일상생활의 에피소드나 극적인 장면을 간단하게 이야기 형식으로 쓰는 시입니다. 이 두 시적 경향은 우리 문단을 30년간이나 지배해온 문단 권력과 연결됩니다. 전자는 ‘문학과지성’ 계열의 문학적 지향과 연계되어 있고, 후자는 ‘창작과비평’ 계열의 그것과 맥이 닿아 있지요. 문학과지성 계열은 외국문학 전공자들이 주축이 되어 서구 아방가르드문학을 문학의 전범으로 삼았고, 창작과비평 계열은 민중주의에 바탕을 두며 리얼리즘문학을 그 전범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가 지나쳐 전자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분별할 정도의 실험으로 전락하였고, 후자는 민주화가 어느 정도 정착한 우리시대에서 이념의 상실과 함께 이야기만 남게 되어 이념 없는 민중시가 되어 버렸지요.그래서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시의 본령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시의 본령은 넓은 의미의 자연, 대상이라고 하는 것에 내재한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것은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총체적 진실을 말하는 것이죠. 과학적 진실은 논리적 진실, 이성적 진실이라서 부분적인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감성으로 보는 진실은 총체적 진실입니다. 우리가 대상을 감성적으로 바라보면 앞뒤, 위아래가 모순이 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모순 중에 일부만 취하지 않고 그 자체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지요. 삶과 죽음의 문제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둘을 연속적으로, 총체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바로 시의 본령은 이처럼 대상 속에 있는 총체적 진실을 시적 형상화를 통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시인들이 시의 본령으로 돌아와서 우리 시단을 더욱 빛내주기를 바랍니다.
● 선생님, 오랜 시간 동안 좋은 이야기 들려주시어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건강하시어 좋은 시와 글을 많이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오세영 시인과의 대화
글 박현수 ㅣ 시인, 평론가,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66년생
시집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위험한 독서』 등
오세영 ㅣ 시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42년생
시집 『사랑의 저쪽』 『바람의 그림자』 『아메리카 시편』 『마른하늘에서 치
는 박수소리』 『무명연시』 『벼랑의 꿈! 』 『밤하늘의 바둑판』 『바람의 아
들들』 등, 저서 『시론』 『한국 현대시 분석적 읽기』 『한국낭만주의시 연구』 『시쓰기의 발견』 등
은산철벽을 꿰뚫는 명쾌한 시적 안목
- 오세영 시인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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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근황
●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 요즘 근황 중에 얘기할 만한 것이 있다면, 남미로 배낭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 정도가 될것 같습니다. 남미에는 30년 전에 잠깐 다녀온 적은 있습니다.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 프로그램을 마치고 멕시코와 페루에 잠깐 다녀왔었는데, 그때는 너무 짧은 일정이라 지역의 풍광과 인디오의 삶 등을 구체적으로 살피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남미 쪽을 가고 싶다고 늘 생각을 해왔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습니다. 벼르고 벼르다 이제 한 번 실행에 옮길까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초기시에 대하여
● 이제 본격적으로 제가 평소에 궁금해 하던 것이고, 독자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질문드리고자 합니다. 선생님의 연보를 보면 첫 시집 『반란하는 빛』(1970)과 두 번째 시집 『가장 어두운날 저녁에』(1982)의 간격이 12년 정도 나는데, 지금까지 그 이유를 여쭤보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 제가 1968년에 《현대문학》에서 추천 완료를 하였는데, 창작 상으로는 1970년대가 빈 공간입니다. 첫 시집은 1970년에 전봉건 선생님의 권유로 현대시학사에서 내었습니다만, 두 번째 시집은 12년 후에나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제가 대학교수가 되어 스스로 학문적 결핍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수직을 시작한 것은 1973년, 30대 초반에 충남대에서였습니다. 막상대학교수가 되고 보니까 내가 너무 공부를 안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신제 박사가 나오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신제 박사란 건 규정에 따라 개설된 박사 학위 과정에 입학하여 강의를 듣고 학위를 취득한 박사를 말하는데, 요즘 시행되고 있는 박사 학위 제도인 것이죠. 그 이전에 시행된 구제도에는 박사 과정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저와 마찬가지로 석사 학위를가지고 대학에 전임강사로 부임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까 스스로 부족함을 느껴서 서울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충남대에서 매주 서울로 강의를 듣기 위해 다니고, 또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에는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또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제가 박사 과정을 입학한 것이 1974년이고 학위를 받은 것이 1980년인데, 바로 이때 7년 정도의 시간이 창작 상의 공백기로 남아 있게 된 거죠. 1982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에 시가 70여 편 정도 실렸는데, 첫 시집 이후 그때까지 쓴 시가 그 정도였던 셈입니다. 시인이 등단 직후 열심히 활동하여서 문단에 강한 인상을 주고 개성을 돋보이게 해야 이름이 각인되는데, 그때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은 늘 아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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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랬었군요. 그렇지만 그때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쓰신 『한국낭만주의시연구』(1980)라는 좋은 저서가 나왔으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시집의 성격이 그래서 독특한 듯합니다.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은 유사성과 이질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도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 사이에는 연속성과 이질성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인으로서 실험적인 정신을 담으려고 노력한 첫 시집『반란하는 빛』에는 34~35편이 실려 있는데, 그 경향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아방가르드적인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문명비판적 경향입니다. 문명비판적 경향이라는 것은 이른바 신고전주의, 주지주의 등으로 부르는 것이죠. 그때 저는 젊은 시인으로서 실험적인 시에 관심이 있었는데, 당시 제가 관여한 《현대시》 동인은 그것을 내면의식의 탐구라 불렀지요. 제가 지금 보기에 그것은 일종의 쉬르레알리즘(초현실주의)에 기초한 자아의 표출이라 부르는 것이 정확할 것 같아요. 첫 시집에는 그런 아방가르드적인 측면과 주지적인 경향을 지니는 문명비판적 측면이 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측면이 세계관의 측면에서 이질적이지만, 둘 다 현대문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죠. 그때는 그런 미세한 차이를 정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그저 같은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이에 반하여 두 번째 시집은 성격이 다소 달라집니다. 그때 나이도 벌써 40대가 되어서 시에 대한 생각도 깊어졌지요. 실험적인 것만으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감동도 우러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한 거죠.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시의 성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입니다. 그래서 첫 시집의 두 경향 중 아방가르드적인 요소는 극복하고, 문명비판적 요소는 계승을 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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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시적 경향과 시집
● 이제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성격이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이왕 시적 경향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니, 이와 관련하여 이후의 시적 흐름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그 이후 세 번째 시집부터는 문명비판적 측면까지도 지양하고,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실존적 존재론의 문제, 삶과 죽음과 같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문제에다가선 것입니다.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그릇」 연작시입니다. 이 작품들이 실제로 제5시집 『사랑의 저쪽』(1990)에 실렸지만, 창작 시기상으로는 제3시집 『무명연시』와 동시에 쓰였습니다. 존재론적 탐구는 인간의 유한성에 주목하게 되어 필연적으로 허무적 분위기를 띨 수밖에 없습니다. 「그릇」 연작이 보여주는 허무적 실존의식이 그 반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런 허무적 실존의식을 극복하려 노력하다가 불교적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무명연시』는 실존적 존재 탐구의 문제와 불교적 인식을 결합한 실험적인 시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음악성과 이미지 등에도 여러 실험적인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이런 것도 중요한 실험이라 생각하는데, 요즘 평론가들은 이런 실험의식을 잘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웃음). 그 후로 지금까지 불교적 인식에 바탕을 둔 삶의 존재론적 문제 탐구라는 시적 성향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근원적인 것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다소 변형되어 전개되기도 하는데, 제가 쓴 사물시가 그런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사물을 인식 대상으로 하여 사물이 지니고 있는내적 진실을 불교적 세계관으로 해석하는 시가 그런 것입니다.
● 지금까지 선생님께서는 최근의 『바람의 아들들―동물시초』(2014)까지 총 22권의 시집을 내셨고, 총10권의 시선집을 내셨습니다. 이 중에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집이 따로 있는지요.
- 개인적으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시집은 없습니다. 다만 독자들이 많이 사보는 것은 『꽃들은별을 우러르며 산다』(1992)라는 시집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시집에는 특정한 주제로 쓴 시
집들이 있습니다. 앞에 말한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는 대중적이면서 미학적인 시들, 문학전문지가 아니라 대중잡지나 사보에 발표된 시들을 모은 것입니다. 시가 쉽고 서정적이고 또 연가풍이라 대중 독자들이 좋아 하나 봐요. 그리고 『아메리카시편』(1997)은 미국 문명사에 대한 비판을 다룬 시만을 모은 것이고, 『푸른 스커트의 지퍼』(2009)는 생태시만 모은 시집입니다. 그리고 『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는 꽃만을 다룬 시들로 구성되었고, 『임이 부르는 물소리 그물소리』(2008)는 우리 국토를 소재로 다룬 시들을 모은 것입니다.
● 시집과 관련해서 문득 떠오른 것인데, 선생님 시집이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는지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 제 연보를 보면 확인이 되겠지만, 일본어,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체코어로 번역이 되었고,러시아어로는 현재 번역이 완료되어 출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스페인어 번역이 인상에 남습니다.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El Cielo de Dios También Tiene Oscuridaad)』라는 스페인어 번역시집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의추천으로 그의 출판사인 멕시코의 부엘타(Vuelta, 귀향) 사에서 나왔습니다. 또 그의 추천으로 그 자신이 주간인, 스페인어권의 대표적인 문학계간지 《부엘타(Vuelta)》에 「별」, 「사랑」, 「시」 등이 특집으로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 근대시, 단절이냐 연속이냐
● 선생님께서는 시론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들을 내셨습니다. 저는 그 중 우리 근대시가 외국 문학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전통 단절론을 비판적으로 보는 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시조와 같은 기존의 정형시가 잡가나 사설시조 등의 해체 과정을 거쳐 한국의 근대 자유시 형성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 그것인데요.
- 그런데 그 논의에 대한 반응은 생각보다 크게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제 전공이 현대시 분야이고, 그 논의의 핵심인 잡가, 사설시조 등은 고전문학 분야라서 학문 간의 벽 때문에 제 논의자체가 읽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문제를 다시 말하자면 시의 전개를 세계사적으로 볼 때 각국의 큰 흐름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모든 시는 정형시에서 자유시로 발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원래 시는 노래로 불렸고, 그 노래의 가사가 시 아닙니까. 노래는 정형성을 지닐 수밖에 없으니 시는 원래 정형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에서 처음으로 자유시(vers libre)라는 말이 사용된 곳이 프랑스입니다. 프랑스의 라마르틴이 최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자유시는 모든 운율과 형식을 완전하게 부정하고 자유롭게 쓰는 시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정형시에 어느 정도 파격이 있는 시를 지칭하는 것이지, 정형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유시에는 정형과 운율이 있는데 그것을 어느 정도 벗어나서 쓴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형시와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유시를 거쳐 현재 우리가 말하는 완전한 자유시, 산문시로 이행되는 것입니다. 다시 간단하게 말하자면 처음의 시는 정형시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의 자유시처럼 형식적으로 파격이 시작되고 그 파격이 점점 심화되면서 완전한 형태의 자유시, 산문시로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전세계적으로 동일한 패턴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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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형식에 있어서의 이런 역사적 전개가 우리의 경우에도 유사하게 일어난다는 것이 선생님의 주장이신 거죠?
- 그렇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도 유사한 단계를 거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우리말로 이루어진 시 장르의 대표는 시조인데, 시조는 정형시 아닙니까. 이런 정형시에서 현대의 완전한 자유시로 가기 위해 그 이행 과정으로서 율격의 형식 파괴가 당연히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설시조입니다. 사설시조가 한국에서 부르는 명칭이라서 그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세계사적 관점으로 볼 때 이것은 프랑스의 자유시와 같은 것입니다. 그 자유시를우리 식으로 부르자면 사설시조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사설시조라는 정형시의 파격을 거쳐서 근대 자유시, 산문시가 되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유럽에서 근대화가 먼저 일어나고 동양이 뒤늦게 근대화에 합류하면서, 서구 문명의 영향이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오해라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이미 서양에 자유시가 있었고 그것이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근대의 자유시가 되었는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그 변화가 너무나 급속하게 이루어져 마치 단절된 것처럼 보일 뿐이죠.
● 선생님께서는 이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매체의 변화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신데요.
- 예, 이런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매체의 변화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시는 매체적 관점에서 볼 때 음성 전달에서 시각 전달로 변화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서양에서도 시는 처음에 노래나 낭송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귀부인의 후원을 받은 문인들이 살롱에서 시를 낭송했던 사실이 그 예가 됩니다. 그러던 것이 눈으로 읽는 방식으로 변화됩니다. 이 변화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의 등장에 따른 책의 상품화입니다. 이런 변화가 서구에서는 16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에 확립되지요. 이런 활자매체의 등장은 자유시의 발생과 겹칩니다.우리의 경우도 사설시조에서 근대시로 이행하는 시기와 매체의 변화 시기가 겹칩니다. 1900년대 초기에는 문학을 유통시키는 활자 매체 같은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시조 같은 경우도 노래로 불러지지 않고 활자로 읽히는 것은 1920년대 전후 아닙니까. 문학잡지나 시집 발간 등 활자매체가 본격화되면서 사설시조에서 근대시로의 이행이 일어납니다. 음성 매체에서 시각 매체로의 변화가 사설시조에서 근대시로의 이행과 겹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새로운 형식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것을 단절이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 그럼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되는 최남선의 신체시 같은 것도 다르게 평가될 수밖에 없겠지요?
- 지금까지도 우리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자유시의 효시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체시는 자유시로 가는 과정에서 생긴 일종의 수구 세력의 반동적인 시 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체시는 정형시의 일종으로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장르입니다. 그러니 생명력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최남선이 신체시를 강조한 것은 우리나라에는 중국의 한시, 일본의 하이쿠 등과 같은 완전한 정형시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열등의식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시조조차 완전한 정형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추구한 것이 근대적 의미의 자유시가 아니었다는 것은 최남선뿐만 아니라 이광수의 4행시, 김억의 격조시 등 자유시 주창자 대부분이 정형시로 회귀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조언
● 마지막으로 요즘의 젊은 시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그런 것을 이야기하려면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좀 복잡해질 것 같네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은 크게 두 가지인 것같습니다. 하나는 난해한 시인데, 흔히 포스트모던한 시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평론가는 미래파라 부르기도 하지요. 다른 하나는 서술적인 시로서, 일상생활의 에피소드나 극적인 장면을 간단하게 이야기 형식으로 쓰는 시입니다. 이 두 시적 경향은 우리 문단을 30년간이나 지배해온 문단 권력과 연결됩니다. 전자는 ‘문학과지성’ 계열의 문학적 지향과 연계되어 있고, 후자는 ‘창작과비평’ 계열의 그것과 맥이 닿아 있지요. 문학과지성 계열은 외국문학 전공자들이 주축이 되어 서구 아방가르드문학을 문학의 전범으로 삼았고, 창작과비평 계열은 민중주의에 바탕을 두며 리얼리즘문학을 그 전범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가 지나쳐 전자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분별할 정도의 실험으로 전락하였고, 후자는 민주화가 어느 정도 정착한 우리시대에서 이념의 상실과 함께 이야기만 남게 되어 이념 없는 민중시가 되어 버렸지요.그래서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시의 본령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시의 본령은 넓은 의미의 자연, 대상이라고 하는 것에 내재한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것은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총체적 진실을 말하는 것이죠. 과학적 진실은 논리적 진실, 이성적 진실이라서 부분적인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감성으로 보는 진실은 총체적 진실입니다. 우리가 대상을 감성적으로 바라보면 앞뒤, 위아래가 모순이 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모순 중에 일부만 취하지 않고 그 자체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지요. 삶과 죽음의 문제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둘을 연속적으로, 총체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바로 시의 본령은 이처럼 대상 속에 있는 총체적 진실을 시적 형상화를 통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시인들이 시의 본령으로 돌아와서 우리 시단을 더욱 빛내주기를 바랍니다.
● 선생님, 오랜 시간 동안 좋은 이야기 들려주시어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건강하시어 좋은 시와 글을 많이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