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조성면_평론가, 평택대 국문과 겸임교수. 1966년생. 평론집 『대중문학과 정전에 대한 반역』 등
1980년대는 흔히 질풍노도의 뜨거운 시대로 규정되곤 한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와 같이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온갖 사회적 모순이 폭발하고 격렬하게 대립했던, 나아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뜨거운 이념의 시대가 바로 80년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대체로는 옳지만 부분적으로는 그르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절망의 시대를 적극적으로 넘어서려는 변혁의 운동과 함께 현실의 바깥에 놓여 있었던 ‘단(丹)’이니 ‘기(氣)’니 ‘도(道)’니 하는 동양적 신비주의 내지 전통적 정신주의가 우리의 눈앞에 전경화한 초월의 시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중들의 ‘사회변혁’에의 열망과 ‘내적 망명’의 충동이 꽈배기처럼 뒤엉킨 시대가 바로 80년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초월에 대한 대중적 열풍의 중심부에 『단』(김정빈, 1984)과 『한단고기』(임승국 역주, 1986)와 같은 베스트셀러들이 놓여 있다.
대개의 베스트셀러나 대중소설들이 그러하듯 이들 역시 아주 같지도 않으면서도 전혀 다르지도 않아야 한다는 공식과 강력한 대중적 친화력을 보여준다. 대중들의 흥미를 끌만한 신비한 초능력과 도가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단』은 『전우치전』이니 『홍길동전』이니 하는 고전소설들과 맥락상의 동일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 익히 보아왔던 역사적 상상력을 반복하고 있는 『한단고기』는 광활한 대륙을 호령하던 고대사에 대한 향수를 적절하게 자극하면서 ‘홍익인간’ 등 호소력이 큰 민족주의적인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단』은 평생 동안 선도(仙道) 수련을 해온 우학도인 곧 봉우 권태훈 옹의 구술을 토대로 재구성된 이른바 장편실명소설이다. 주인공 우학도인이 단학선법, 축지법, 비홍검(飛鴻劍) 등에서 일가를 이룬 삼비팔주(三飛八走)와 같은 이인(異人)들을 만나 교류하고 수련했던 자전적 경험담, 무려 칠백 년 동안 수도했다는 중국의 왕진인과 자신의 스승인 일송진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 백두산족에 닥쳐온 3천 년의 대운과 1999년에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등의 신비한 예언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일종의 한국형 판타지라 할 수 있다. 형식주의 문학이론가인 토도로프(T. Todorov)는 판타지를,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자연법칙과 합리적인 상식에 길들여진 독자들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망설임(hesitation)을 불러일으키는 장르로 규정한 바 있다. 주지하듯 판타지는 산업혁명과 근대 시민사회의 도래와 함께 본격화한 장르로서 근대적 동화이며, 낙원을 상실한 근대인들을 위한 위안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읽는 동안만큼은 신나는 모험과 여흥을 제공해주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황당무계하고 터무니없어서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하는 심리적 갈등과 망설임을 준다는 점에서 확실하게 『단』은, 고전소설의 현대적 변용이며 일종의 장르 판타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단』은 ‘소설’임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소설’로서 수용될 여지가 있지만, 『한단고기』는 역사서이며 ‘사실’임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적잖은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고대사를 다시 써야한다는 쇼비니즘적인 열광에서부터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냉소적인 침묵과 학계의 일각에서 터져 나온 격렬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들이 바로 그러하다. 『한단고기』(桓檀古記—역자는 ‘환’자를 ‘한’으로 읽는다)는 1911년 계연수(桂延壽)란 미지의 인물에 의해 편찬된 역사서로 『삼성기』, 『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등 네 권의 사서를 묶은 책이다. 주요 내용은 단군 이전의 역사를 다룬 것들로 천지창조와 한민족 기원 그리고 ‘환웅천황’, ‘치우천황’ 등 주요 제왕들의 치적과 역사적인 사건들이 기술되어 있다. 요컨대 은나라 보다 훨씬 앞선 전쟁의 신으로 추앙되는 치우천황 때에 청동기와 같은 문명이 있었고, 기원전 2182년 ‘을보륵’이란 인물이 제3세 단군인 ‘가륵’의 명을 받아 오늘날의 한글과 거의 동일한 고대문자인 ‘가림토(加臨土)’이름의 글자 38자를 만들었으며, 따라서 우리 민족사는 9천2백 년에 육박한다는 등 기존의 통설과 상식 - 역자에 따르면 그것은 한반도에 갇혀있는 협소한 반도사관이며 주체성을 상실한 식민사관에 불과하다 - 을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주장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무장한 판타지는 이후, 한국 최초의 SF만화 『라이파이』로 유명한 원로만화가 김산호의 『대조선제국사』를 비롯해서 중견의 인기만화가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로 이어지는 등 동시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어떤 문학작품이나 텍스트를 동시대 역사적 현실과 상동성(相同性)을 갖는 구조물로 보거나 사회의 본질적인 한 국면을 반영하는 현상으로 읽어내는 문학사회학적인 독법을 빌리자면, 이는 전망없는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일종의 병든 낭만주의요, 신비주의이라 할 수 있다. 사회 곳곳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민주화에 대한 대중적 갈망을 무력으로 억누르면서 철권을 휘둘렀던 동시대의 끔찍한 현실을 떠올려보면 대중들 사이에 불어 닥친 이 같은 퇴행적 열망을 전혀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병든 낭만주의와 신비주의는 사회문화적 병리현상이다. 물론, 병든 낭만주의가 세계의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는 없다는 사실 앞에서 절망하고 고뇌하고 방황하는 경향을 띠는 것에 비해 신비주의는 육체와 현실의 논리를 괄호쳐버리고 세계의 밖에서 완전무결한 영적 삶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믿는 초월주의이며 내적 망명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일제강점기와 같은 특수한 역사적 국면에서 민족적 신화나 단재의 『조선상고사』와 같은 민족주의와 이를 종교적 신념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민족종교들의 이념은 대단히 유의미한 것이었지만, 사회변혁을 향한 대중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던 동시대 상황에서의 그것은 자칫 현실에 절망한 대중들을 쇼비니즘적 열광과 신비주의와 같은 집단적 마취 상태로 몰아갈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동아시아적 신비주의와 문화를 매개로 한 이같은 ‘초월’과 ‘변혁’에의 열망이 절망의 현실에 대한 적극적 부정이라는 문화사회학적인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며, 덧붙여 환경오염과 빈부문제 등 한계에 직면한 서구적인 근대의 기획과 문명모델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면서 동시에 인류를 새로운 정신문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해서만큼은 세심한 주목을 요한다. 동아시아의 정신주의와 전통적인 지혜를 담고 있는 지난 1980년대 중반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였던 『손자병법』 『단』 『한단고기』 등이 갖는 현재적 의미는 바로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