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우리나라가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을 맡게 되었다고 했을 때 중국과 일본 문화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유럽에 알리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라는 데에 우리 문화계는 쉽게 동의할 수 있었다. 비록 인터넷 등 각종 통신시설의 발달로 도서 장터로서의 위상이 예전만 같지 못하다고는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여전히 100여개가 넘는 국가에서 7,200여개의 출판사가 참가하고 30만에 가까운 인원이 방문하는 세계 최대의 도서박람회이기 때문이다.

  이번 주빈국 행사 프로그램이 문학 쪽에 치우쳤다는 일부의 일리있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김우창 조직위원장의 설명처럼 문학은 여전히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이고 또 출판의 본령이 여전히 문학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므로 한국의 주빈국 행사는 문학 분야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문학의 본령이 작가에 있다는 사실 역시 당연하므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10명이 닷새에 걸쳐 낭독회를 갖는 프랑크푸르트 문학의집 행사는 이번 주빈국 문학프로그램의 백미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황지우 조직위 총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책이 아니라 작가라는 아이콘이 그 나라 출판문화의 핵심이고, 작가를 우상화하면 독자들은 책을 들게 마련이며, 도서전은 닷새면 끝나지만 직접 만나본 한국 작가들에 대한 독일인들의 인상은 깊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오랫동안 세심한 준비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단의 실무진들은 행사 직전까지도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현장에서 직접 준비할 수 없는 물리적 거리감으로 인한 어려움과 즐겁고 만족스럽기보다는 황당하고 실망스런 기억이 더 많았던 그간의 해외에서의 한국문학 행사들이 떠올랐기 때문인데, 집채만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가득 메운 한국의 작가들과 행사 스태프들을 보면서 필자는 우리끼리 청중품앗이를 하면 남들 보기에 아주 부끄러운 꼴은 면하지 않을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앞서 오랫동안 세심한 준비라고 했는데, 재단은 올 초부터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는 번역가 박경희 씨를 현지 코디네이터로 위촉하고 낭독회가 열리는 문학의집 회원들과 대사관, 영사관, 프랑크푸르트대학, 프랑크푸르트 최대 규모의 후겐두벨을 비롯한 주요 서점과 박물관, 카페 등에 행사 프로그램을 배포하고, 유력 주간지 ‘프랑크푸르트 저널’과 프랑크푸르트시 홈페이지에 행사 광고를 수록하는 등 인력(人力)과 금력(金力)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로 최고 권위의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유력 주간지 ‘디 차이트’, 베를린 소재 문학잡지 ‘로제 블래터’ 등에 행사를 소개하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하늘이 항상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은 아니고 공든 탑도 무너질 때가 있는 법이다. 특히나 박람회장과 동떨어진 문학의집에서 저녁 8시에 열리는 한국문학 낭독회의 성패는 좀처럼 가늠하기 어려웠다. 첫날 낭독회 시간에 맞춰 구름처럼 몰려드는 청중들을 보며 재단 직원들과 행사진행요원들은 비로소 확실한 성공에의 예감에 환호성을 올렸고 이같은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은 이후 낭독회 내내 100여 석에 달하는 행사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복도에 서서, 또 낭독회장 바깥에 의자를 놓고 앉아 한국 작가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는 독일인들의 열성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러고도 빈 공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던 상당수 독일 청중들의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보며 앞서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청중품앗이, 즉 상대적으로 좌석에 여유가 있는 다른 한국문학 낭독회로 이들을 안내하고 싶다는, 우리네 농번기 때의 그것만큼이나 좋은 의미에서의 품앗이에 대한 강한 욕구를 느꼈다.

  청중들의 수도 수이지만 청중들의 면면이나 낭독회장의 진지한 분위기에 있어서도 여태까지의 해외 낭독회를 훌쩍 뛰어넘는 바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청중 동원에 성공적인 낭독회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상당수가 교포나 유학생인 경우가 많았고, 그것도 아니면 행사를 유치한 현지 대학이나 기관에서 동원한 청중들이기가 십상이었는데 이번 낭독회의 청중들은 누구의 강요나 부차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한국 문학의 맛과 깊이를 느끼기 위해 자발적 열성을 가지고 참석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한국 작가들의 번역서나, 각자 포도주 한 잔이나 생수 한 병씩을 들고 두 시간 동안의 낭독회 내내 독일 배우들의 낭독과 한국 작가들의 설명에 음미하듯이 몰두하는 그들의 진지한 표정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낭독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분석해 본다면 다음 몇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사전 홍보의 중요성인데 이에 들인 노력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다음으로는 작가들의 평면적 배치가 아닌, 낭독회 별로 소주제를 선정하고 이 주제와 어울리는 한국 작가들이 참가하도록 해 독일 독자들의 흥미를 배가시킨 점을 들 수 있다. 아직 외국 독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한국 작가들이 많지 않은 현실을 감안할 때 이같은 방식은 앞으로의 해외 낭독회에서도 중요하게 참고되어야 할 사항으로 생각된다. 또한 한국 작가들의 낮은 인지도를 보완하기 위해 토마스 브루시히나 우베 콜베 같은 저명한 독일 문인과 언론인들을 사회자로 초빙하고 이들에게 사전에 해당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충분히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수준 높은 문답이 오갈 수 있도록 한 것도 주효했다. ‘한국 문학, 아주 특별한 만남 Koreanische Literatur - eine besondere Begegnung’이라는 제목 아래 5일 동안 열린 낭독회의 날짜별 소주제와 참가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날짜	주제	참가작가	사회
10월 19일(수)	실존의 그늘-미로에서 길찾기 Auf der Suche nach dem Weg durch das Labyrinth	오정희(소설가) 이승우(소설가)	루트 퓌너 (Ruth Fuehner, 언론인)
10월 20일(목)	역사적 트라우마와 시적 상상력 Historische Traumata und poetische Vorstellungskraft	고 은(시인) 황지우(시인)	우베 콜베 (Uwe Kolbe, 시인)
10월 21일(금)	거대담론에서 개인으로 Vom Metanarrativ zum Individuum	황석영(소설가) 신경숙(소설가)	토마스 브루시히 (Thomas Brussig, 소설가)
10월 22일(토)	유토피아를 꿈꾸는 문명 - 절망에서 희망 찾기 Der Traum von Utopia - Aus der Verzweiflung Hoffnung schpfen	정현종(시인) 최인석(소설가)	이리스 라디쉬 (Iris Radisch, 언론인)
10월 23일(일)	소설의 소통 혹은 새로운 모색 Die Kommunikation des Erzhlens oder Eine neue Suche	이문열(소설가) 김영하(소설가)	마르틴 모제바흐 (Martin Mosebach, 소설가)

여기에 더해 이국문화 혹은 고급문화에 대해 독일인들이 보인 적극적인 수용 자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낭독회를 참관한 독일인들이 문화적 고소득층이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괴테와 카프카와 귄터 그라스를 배출한 나라의 국민들답게 그들은 자신들에게 낯선 나라의 문학을 접하는 데 있어 감탄할 만한 진지함과 열의를 보여주었는데 그들이 연출한 행사장의 열띤 분위기는 한국 땅에서 한국 작가들을 대하며 한국 청중들이 만들어 내는 그것보다 감히 윗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문화사대주의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독일인들이 한국인들보다 이국문화와 고급문화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박람회장을 활보하고 다니는 세계 각국의 여성들 중 한국 여성이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 만큼이나 자명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자동차나 핸드폰을 몇 대 더 판다고 해서 쉽게 얻어질 수 없는, 오랜 문화적 전통과 역량이 뒷받침될 때만 획득 가능한 것이리라.

끝으로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요인 한가지. 거의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독일 현지에서 행사 준비와 홍보에 자기 일처럼 열성적으로 매진해 준 아름다운 한국 여인 박경희 씨와 수준 높은 독일 문화인 마티아스 아우구스틴 부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성공은 지난한 일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