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어느새부턴가 어느샌가부터

함부로 사랑해버린 기억들이 있다. 나는 특히나 여행을 할 때 그런 기억들을 안게 된다. 얼음물 아니면 뜨거운 차만 내어주는 곳에서 미지근한 온도를 유지하며 여행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들, 그러니까 당신들의 다정 덕에 우리는 미지근함을 유지하며 여행할 수 있었다. ‘함부로’라고 말하는 이유는 아쉬움 때문이다. 여행이 끝나고 캐리어를 찾으며 이제 같은 숙소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아쉬움, 하루를 갈무리하며 조잘조잘 떠들던 순간들이 한순간에 무(無)로 돌아가는 듯한 아쉬움…… 공항 게이트를 지날 때 “한겨울 밤의 꿈같아”와 같은 얘기들을 웃으면서 나눴지만, 나는 사실 그게 무섭고 두려웠다.

 어렸을 때 캠프만 다녀오면 집에서 숨죽여 울곤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헤어진 사람들과의 추억이 사무치게 그립고,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여린 마음 때문이었다. 성인이 된 나는 예상과 달리 공항에서도, 집에 와서도 울지 않았지만 이렇게 글을 쓰며 기행을 곱씹어 보고 있다. 

화창한 햇볕과 거세게 부는 바람들이 기억난다. 스치듯 눈인사를 주고받은 상점 점원들이 기억난다. 발이 푹푹 빠지는 깊게 쌓인 눈과 그 탓에 자꾸만 미끄러질 뻔했던 이의 소맷자락을 잡아줬던 것이 기억난다. 밥 먹을 땐 조용하면서도 걸을 땐 신나게 담소를 주고받았던 것들 다 자리 잡힌 기억들이다. 밤이 되면 서로의 방 초인종을 눌러 침대 맡에서 신나게 문학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우리 모두는 생각보다 문학을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사랑까지는 모르겠다. 그냥 문학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 재미가 있었다.

기행에서 문학관을 방문했다. 와타나베 준이치 문학관, 근대문학관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 문학 살롱과 묘지도 방문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일본의 문학관들은 대량의 서적과 다양한 기록들로 자취를 남기고 있었으며, 우리는 모르는 활자들을 어플로 번역하며 어렴풋이 그 글들을 읽어나갔다. 사진을 찍을 수 없어 남은 사진은 없지만,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작가들의 얼굴과 책들만은 정적인 이미지로 남아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묘는 오래된 묘비석과 대비되는 생기있는 꽃들과 맥주캔이 인상 깊었다. 여전히 그의 작품을 읽고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히라노 게이치로 소설가와는 흐린 날씨에 만남을 가졌다. 그는 비록 법학을 전공했지만 우리들과 문학 전공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나눴다. 한국의 대학생 문화에 대해서도 알려드렸다. 소소한 음주문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그는 나에게 언젠간 그것을 작품에 꼭 쓰라고 하였다.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중요한 철학 중 하나인 ‘분인주의’ 얘기를 들을 땐 많이 공감이 갔다. 다양한 자아를 만들며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꼭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일터에서의 나는 집에서의 나와 달라서, 일터에서 우울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집에서까지 그 우울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쉽사리 분리되지 않는 자신을 그렇게라도 분리하며 덜 상처받고 살아가자는 말을 하고 싶으신 것 같았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맛있는 코스 요리도 먹었다. 뜻깊은 만남이었다. 도쿄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인터뷰와 담소를 통해 내 마음속의 날씨는 환하게 개고 있었다. 

실제로 비가 멎어들었고, 우리는 쿠온 출판사가 운영하고 있는 ‘책거리’에 갔다. 쿠온 출판사는 일본에 한국문학을 번역해 출판하며 한국문학을 일본에 활발히 알리고 있는 출판사이다. 실제로 책들은 전문이 일어인 것과 전문이 한국어인 것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 권의 책에 두 개의 언어라니. 매우 매력적이었다. 따뜻한 차를 나눠 마시며 책꽂이에 꽂혀있는 국내 서적들을 감상했다. 타지의 언어로 가득한 곳에서 한글을 보니 왜인지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 중 누군가의 책이 나온다면 쿠온 출판사에서 번역을 해주어 일본 독자들에게도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슬며시 해보았다. 

지브리 미술관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가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들의 스케치들이 벽에 전시되어 있었고 수천 개의 깎인 연필들이 양동이에 담겨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연필을 깎고 다듬었을까 하고 말이다. 도쿄도미술관에서는 에곤 실레 전을 보았다. 에곤 실레는 사람의 몸을 가장 자신의 시각으로 잘 담아내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나온 소녀 그림과 마른 몸의 자화상은 인체를 보이는 그대로 거침없이 그려내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나는 선물해주고 싶은 이들을 생각하며 에곤 실레의 그림엽서 몇 장을 골랐다.

나는 여행에서 꽤 오랜 날들을 존댓말을 고수했다. 그 태도가 누군가를 서운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존댓말을 고집하던 건 그만큼 이 관계가 깨어질까 하는 마음에 소중하게 다루고 싶어서였다. 결국 화수목금토 중 토에 놓았다. 놓고 나서 우리는 좀 더 가까워졌을까. 야, 너, ―씨, ―님 이런 호칭보다는 서로의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그 점이 좋았다. 이름 각자에 그 사람이 담겨 있었다. 아무런 호칭도 붙지 않은 이름들은 다정해졌다. 그 이름의 주인들이 다정했던 걸까. 

일본, 멀지만 가까운 나라. 그곳에서 우리는 멀지만 가깝게, 어쩌면 가깝지만 멀게, 미지근하게 이 여행을 향유한 것 같다.

‘어느새부턴가’가 좋아 ‘어느샌가부터’가 좋아? 

언제였는지 기억 안 나지만 혼자 고뇌하고 종종 생각하던 나만의 문제였다. 

가현과 나는 전자를, 주연과 여름은 후자를 택했다. 

전자를 택하든 후자를 택하든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진지하게 고민하고 대답해주는 이들과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무심코 찾아온 축복 같았다. 가끔 어떤 순간들은 너무 행복해서 코끝이 찡하고 아려왔다. 

나는 최근에 본 한 영화에서 ‘다정해져! 그게 이기는 거야’와 같은 대사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 영화를 다시 한 번 봤다. 우리들은 이겼을까. 나는 모르겠지만 같이 여행했던 이들은 이긴 것 같다. 내 눈엔 그들이 승자로 보였다. 조금은 빠른 걸음, 그리고 느린 걸음, 보통의 걸음들이, 그 발자국들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기쁜 일이 생겼을 때, 같이 기뻐해주던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봤지? 좋은 일이 있으면 이렇게 같이 기뻐해주는 거야.” 머리로만 알고 있는 도덕같은 것인데, 실제로 발화하고 행하는 이들이 있다니. 하나 더 배웠다. 

나는 매번 사람에게 많은 정을 주지 말자고 다짐했다가 실패한다. 정이 많을뿐더러 사람을 쉽게 좋아하고 좋아할 이유 또한 잘 찾는다. 그래서 이번 기행 또한 함부로 사랑해버린 기억들이 있다. 필름 카메라 프레임 속 담기는 아기자기한 가정주택, 하얀 눈이 흩날리는 설원, 누군가의 예쁜 원색의 목도리, 누군가의 애정이 담긴 키링, 누군가에게 꼭 필요했던 발바닥 파스까지. 그대들에게, 다시 한 번 다정해주어 고맙다. 나에겐 아직 많이 부족하고 아득한 다정을 조금은 배울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 나도 다정하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 이끌어주시고 앞장서서 다양한 곳으로 인도해주신 대산문화재단 선생님들 또한 정말 감사하다. 열심히 뛰어다니던 뒷모습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수상자 한 분이 코로나 상황으로 같이 기행에 갈 수 없었는데, 꼭 다음에 어떤 기회로든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기행 동안 내가 조금 더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여유를 만들어준 모두에게 고맙고, 편안한 밤을 보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글을 읽을 사람에게 묻고 싶다. 어느새부턴가? 어느샌가부터? 무엇을 택하든, 당신은 어느새부턴가 어느샌가부터 누군가의 다정에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