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글_박소희 서울예술대학교 미디어창작학과 1학년.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자

  분명 오늘이 지나있었는데 다시 오늘이었다. 도착해서 핸드폰을 껐다 켜자 이미 지났다고 생각한 2월 7일 저녁으로 나는 돌아와 있었다. 여덟 시간의 시차만큼 다시 허락된 것이었다. 새로 주어진 시간이 흐르기 시작할 동안 나는 비행기 안에서 뭘 했을까. 그저 앞좌석에 붙은 스크린으로 우리가 낯선 땅 위를 지나는 것을 지켜보았고, 조금 낯선 맛의 기내식을 그렇지 않은 척하며 삼켰고, 글을 약간 읽거나 잠들어있었을 뿐이다. 새로 얻은 시간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통째로 새로 얻은 삶이더라도 많이 다를 것 같지 않았다. 

  로마에 내렸다. 되게 주황빛이다. 이 도시의 첫 인상이었다. 저녁의 로마는 충분히 어두웠고 연주황색 가로등들은 그 어둠을 충분히 몰아내고 있었다. 거리의 색감이 마음에 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짐을 풀고 다시 나와 포근한 듯 차가운 밤공기 속을 걸었다. 조명으로 더 아름다워진 성 베드로 광장에 갔고 몇 마디 말을 하거나 하지 않았고, 아직 조금 서먹한 채로 우리는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찾은 피자 가게는 현지인의 추천을 받아 간 곳이었다. 피자와 이름이 긴 몇몇 메뉴들이 나왔다. 짰다. 이곳 사람들의 소금 사랑에 이때부터 익숙해졌어야 한다고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피자에 피클을 곁들여 먹지 않는다는 것도 미리 알았어야 한다고 역시 후회하고 있다. 피클을 달라고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온갖 단어와 손짓을 동원하며 했던 노력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이탈리아에서는 피자에 절인 올리브를 함께 먹는다는 것을 알아냈을 땐 기뻤지만, 마침내 소통에 성공한 점원이 한가득 가져다 준 올리브 역시 짰다. 그래도 열심히 먹었다. 이 식사가 추억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음날 햇살 아래에서 캄피돌리오 광장을 걸었고 콜로세움을 가까이서 보았고 옛 신전 터에 밑동만 남을 기둥들을 내려다보았다. 무너진 제국의 무너진 기둥에 계속 관광객이 찾아왔고 사진을 찍고 동전을 던졌다. 외롭지 않은 폐허였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오는 것은 저들의 역사가 화려했기 때문인가, 그래서 저들의 몰락도 감상적이고 화려하게 느껴지기 때문인가, 아니면 단지 아직까지 보존된 그 시대의 흔적이기 때문인가. 궁금했지만 딱히 묻지는 않았다. 트레비 분수 앞에서 뒤돌아 동전을 던졌으니 나는 다시 로마에 오게 될 테니까, 이런 질문들은 그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전설을 아주 믿지는 않았다.  

  에리 데 루카 작가님과의 만남은 여러 의미로 인상적이었다. 글로 접한 그가 강인하고 고독한 이미지였다면 현실의 그는 강인하되 부드럽고 온기어린 느낌이었다. 나는 그의 책 속에서 고독과 인간에 대한 실망과 그럼으로써 다시 짙어지는 고독을 읽어냈었다. 실제로 마주본 작가님은 사람에 대한 믿음과 자유를 귀하게 생각하는 분이었다. 작가님의 그러한 태도가, 작품과의 불일치가, 그의 글을 더 신뢰하게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로마는 아름다웠고 그래서 좋았고 그래서 동시에 싫었다. 싫다기보다는 불안했다. 나는 좋아하던 것에 쉽게 싫증을 내는 삶이었으므로 이마저도 언제 싫어질지 알 수 없었다. 여행은 새로움이고 새로움이야말로 권태의 한 면일 거라는 생각에 조금씩 힘이 실리고 있었다. 그즈음 우리는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향했다.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새로운 도시로 가는 동안, 이제 떠나는 도시에서 갔던 장소들의 이름과 먹었던 음식의 이름들을 떠올렸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몇 번 웅얼거려 봐도 쉽게 잊어버렸다. 낯선 언어는 내 입술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애써 외우지는 않았다. 도망가는 것들을 쉽게 보내는 태도는 오래전부터 습관처럼 내게 묻어있었다. 나라와 시간과 풍경이 바뀌어도 나는 아마 지독히도 나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결국 돌아오면 몇 가지 장면들로만 기억되므로 모든 여행은 유기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곳곳에 떠다니는 장면의 파편들 사이를 선을 그으며 따라갈 때, 지나간 여행은 다른 방식으로 새로워지곤 했다. 파편이었지만 파편적이지는 않았다. 장면의 조각들, 풍경의 조각들을 가장 많이 남긴 도시가 내게는 피렌체였다. 두오모 전망대와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던 전경, 계속해서 찾아들던 바람과, 묵직하고도 맑게 도시를 울리던 성당의 종소리, 가죽으로 만든 물건들의 질감. 어쩌면 내가 피렌체를 가장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은 두오모와 미켈란젤로 언덕을 올랐던, 그래서 하루에 두 번이나 피렌체의 풍경을 오래 바라봤던 날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다와 하늘로 어둡게 찰랑이는 곳, 이것이 베네치아의 첫 인상이었다. 저녁 일곱 시가 넘어 닿은 기차역 바로 앞에서는 어두운 바닷물이 잔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비가 많이 왔다. 물에 젖어 반짝거리는 도시. 어디에나 바닷물이 차올라있었고 자박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낮이 되자 이 도시는 물을 흠뻑 묻혀서 그린 수채화 같았다.

  배를 타고 베네치아를 이동하는 내내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배의 진동, 배가 정류장에 부딪히듯 닿을 때의 그 덜컹거림과 충격을 느꼈다. 바다와 배, 충격, 부딪힐 때마다 드는 생각—그것은 어떤 죽음들, 너무나 강력해서 우리의 세월 속에서 지울 수 없게 되어버릴 봄의 죽음들을 계속 환기했다. 이 멋진 도시에서 나는 자주 불안했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여행자이므로 나는 며칠만 지나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것이었고, 이곳에 와서도 저곳에서의 일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듯했다. 저곳의 모든 것들이 나의 뼈이자 자전축인 것 같았다. 너무도 당연한 그 사실을 꼬박 열세 시간을 비행하는 먼 땅에 와서야 겨우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도시를 불안으로만 기억하기에는, 그림보다도 그림 같은 풍경과 유리 공예품과 가면이 품고 있는 섬세한 화려함이 아름다웠었다. 아름다움과 불안이 계속 교차했다.    

  타지에 있을 때면 이곳에 다시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역시 습관처럼 들었다. 그래서 모든 여행은 늘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그래서 애틋하거나 안타까워지곤 했다. 여행을 여행으로 완성하는 것은 아마 그 생각일 것이다. 이탈리아의 세 도시를 거치는 내내 그랬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내심 기대하긴 했지만, 나는 어쩌면 이곳에 다시 오지 못할지 모르고 이들과 다시 올 기회는 정말이지 없을 것 같다. 의지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 보이기도 한 그 일은, 의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어서 도리어 작은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이 생경하고 아름다운 공간과 시간이 또 어떤 작고 부드러운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여행지에서는 평범한 하루도 여러 번 소중한 순간이 되었고, 그건 사실 내게 너무나 익숙한 나라에서도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다시 환기시켰다.

  여덟 시간이나 차이가 나는 두 시간 사이의 공간에서 나는 자주 헤매는 기분이었다. 이곳과 저곳의 시간을 함께 가늠해야만 안정이 되었다. 그래야만 어쩐지 모든 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다른 여행들이 그랬듯 이 여행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떤 감각 혹은 흔적을 내게 남겨놓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예측이 빗나가듯 그 감각 또는 흔적은 아마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만 남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