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강동호_연세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 제5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 수상자. 1984년생.
먼저 고백하건대 유럽에 대해 나는 지독한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일종의 관점이겠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오해를 동반한 맹목이다. 서양에 대한 나의 부러움과 경탄은 맹목적이기에 아름답지 못했다. 보름간의 짧은 여행 동안 나의 맹목이 더욱 굳어질까 두려웠다. 곧 런던에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이 들리자 오금이 저려왔다. 오랫동안 찾지 못한 고향을 방문하는 것 같은 설렘. 한 번도 나의 존재를 심어본 적 없는 저 오래된 대륙을 향해, 왜 이토록 정체모를 미심쩍은 향수가 피어오르는 걸까. 이제는 노스탤지어까지 포박을 당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증상이 여간 심한 게 아니다. 비행기의 창을 통해 바라본 영국의 하늘은 어느새 노을로 물들어 있었고, 도시의 불빛들은 밤을 예비하는 중이었다.
1. 유럽으로의 관문 - 런던
어수선한 국제 정세 덕분에 런던 땅을 밟는 데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입국자들을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그들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눈빛 또한 시간이 갈수록 단단해졌다. 입국 심사를 끝내고 시내에 있는 숙소까지 이동하는 데에 영국의 그 유명한 언더그라운드를 이용하였다. 섬나라의 지하철은 생각보다 낡고 비좁았으며, 사람들로 붐볐다.
런던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런던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은지라,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이 어려 있는 곳들만을 속성으로 둘러보았다. 버킹엄 궁전에서 트라팔카 광장으로,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빅벤까지. 그들의 건물 곳곳에는 세계를 제패했던 작은 섬나라의 한때의 자신감이 오만함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자국 명칭에 위대한(Great)이라는 수식어를 감히 붙일 수 있는 그들의 뻔뻔한 자부심이 우습고도 근거 없어 보였다.
다음은 대영박물관. 익히 들어온 악명 덕분인지, 약탈해온 유물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 과장된 분노가 스며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마음으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낯선 유물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눈앞에 드러난 수많은 종류의 미이라들은 세월의 흔적으로 검게 부식되어 있었다. 영원한 안식을 바랬으나, 결국 이방인들의 탐욕스러운 호기심에 노출이 되어버린 이들의 사후에 연민이 갔다. 하루 종일 이집트관 주위를 서성였다.
저녁에 웨스트엔드에서 관람한 <레 미제라블>은 기대 이하였다. 사상 최장기공연이라는 빛나는 수식어는, 오히려 공연의 늙음만을 두드러지게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배우들은 장기 공연이 가져다주는 만성적 피로에 젖어있었고, 그런 그들의 연기나 노래 역시 평범했을 뿐이다. 공연에 적지 않게 실망한 나머지, 휴식 시간에 조용히 극장을 빠져나와 먼저 호텔로 돌아왔다. 2시간 정도, 피곤에 지쳐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데 문 밖이 소란스러웠다. 소란의 정체는 극장에서 돌아온 친구들인데, 뮤지컬이 끝난 후 런던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오는 길이란다. 그들은 모두 한 움큼씩 취해있었고, 입에서는 맥주의 단내가 피어나왔다. 술자리는 호텔에서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저마다의 문학을 이야기하거나 시를 읊고 그 누군가의 시를 폄하하며, 호사스럽게 놀아댔다. 다음날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야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아두기에 우리는 너무 젊고 호기로웠다. 우리가 부르는 서투른 노래의 음정이 힘 빠진 배우들의 능숙한 노래보다 듣기에 좋았다. 처음으로 ‘문학’ 기행을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2. 예술, 철학 그리고 삶 - 파리
파리의 오후는 서늘하였다. 도시 전체가 안개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는데, 음울한 기운이 여행자의 발뒤꿈치를 잡아채는 것 같았다. 3일간의 맹렬한 이동 탓으로 우리 모두는 도시의 분위기에 맥을 못 추었다. 물론 전날의 숙취 또한 한 몫을 했으리라.
파리는 런던에 비해 자유로워 보였다. 파리의 첫인상이 그러한 이유는 우리가 처음으로 찾은 곳이 몽마르트르 언덕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공간으로 유명한 낭만적인 몽마르트르 언덕. 그런데 정작 예술가라고 불리는 그들의 솜씨는 예술적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모자라 보였다. 그러나 이방인의 이죽거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예술가로 칭하며 한가롭게 그림을 그리던 거리의 화가들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이곳을 명소로 만드는 요소는 이젤에 놓여 있는 그림의 수준이 아니라, 함께 모여 예술을 즐기는 자유스러움과 낭만 그 자체에 있었다.
글의 초반부에 나의 서양에 대한 맹목적 편견을 고백했는데, 그 편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 지성사이다(고로 나의 진정한 편견의 유럽유람기는 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20세기 지성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수많은 사상가들과 문인들의 시선, 그리고 발자국이 파리의 이곳과 저곳에 묻어 있었다. 수많은 지식인들을 양산해낸 파리의 대학에서부터 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던 카페까지, 사유와 예술의 발자취는 계속 이어져있다. 그중 내가 가장 아끼던 곳은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였다. 에펠 탑에서 개선문 그리고 샹젤리제로 이어지는 파리 시내 투어의 정석 코스를 끝내고 1시간 가량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욕망으로 가득한 소비적인 이 거리가 싫어 택시를 타고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몽파르나스 묘지로 향했다. 몽파르나스는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함께 잠들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묘지 입구에서 받아든 지도를 읽으며 사르트르의 묘를 찾았다. 한때 실존주의를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키며 비판적 지식인으로 높게 추앙받았던 사르트르의 묘는 묘지의 입구 근처에서 보부아르와 함께 한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조금은 소란스럽기도 했던 그의 생전에 비해 사후의 삶은 소박하고도 외로웠다. 묘 위에는 말라붙은 꽃송이들이 놓여있었고, 짧은 편지글로 보이는 종이쪽지들도 붙어있었다. 아마 그를 잊지 못한 여행객들의 헌화인 모양이다. 한때의 스승이 어느새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렸는데도, 그의 남루한 안위가 오히려 보기에 평화로웠다.
다음날 찾은 루브르 박물관은 정말 광대했다. 콩코드 광장에 서있는 오벨리스크를 지나 철골과 유리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입구를 통해 루브르의 심장으로 들어섰다. 일요일이라 사람들이 더 붐볐다. 박물관의 광활한 공간에는 수많은 예술품들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예술은 일종의 욕망이다. 루브르는 욕망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 수많은 욕망들을 속성으로 받아들이려다가는 탈이 난다. 왜 루브르를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1주일이 필요하다고 하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단순히 작품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욕망의 아우라를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능한 많은 것을 보고 싶어 하던 나의 욕심으로 결국, 과부하가 걸려 루브르 관람을 중도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도,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리기 위해, 마켓에서 와인과 안주거리를 샀다. 가게에서 페트병에 든 싸구려 와인을 발견하고는, 누군가 소주 대병과 꼭 같다면서 깔깔댔다. 지나가던 프랑스인이 그런 우리를 보고 머쓱해하는 걸 보고, 우리는 경박스러운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 밤, 모두가 게걸스럽게 먹고 마셨다. 어떤 이는 안주로 산 치즈에서 똥내가 난다며 인상을 찌푸렸고 다른 이는 그런 치즈를 잘도 받아먹었다. 맹렬히 먹었으니 사온 술이 일찍 동이 났고, 술이 없으니 술자리도 일찍 파했다.
3. 소피아의 한국학 도서관
‘지혜’라는 뜻을 지닌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호텔로 향하는 차창을 통해 드러난 시내의 전경은 유럽 중에서도 특히 이국적이었다. 동유럽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에 더해, 과거 공산주의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우리는 곧 시내로 향했다. 그동안 살인적인 물가에 혀를 내두르던 우리는 이곳의 싼 물가에 호들갑을 떨었다. 파리에서는 바게트 몇 조각밖에 살 수 없는 돈으로 한가득 푸짐한 저녁상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이곳이 진정한 여행지의 블루오션이라느니 어쭙잖은 찬사를 남발했다. 먹고 죽자는 정신으로 시작된 우리의 식사는 결코 점잖지 못했지만, 오랜만의 풍성한 만찬이었다.
다음날, 소피아 대학의 한국학과를 방문했다. 한국학과 건물은 대학 본관에서 차로 10분 정도 가야하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한국학과 건물은 최근에 지은 것이라서 작고 아담했으나, 매우 정갈했다. 학과 도서관은 대학 도서관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작았지만, 이 책들이 발칸 반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 같았다. 우리는 하루 종일 한국학을 공부하는 불가리아 학생들과 시내를 둘러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이 1학년 학생들이었기에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데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우습게도 우리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두 한국을 궁금해 하고 부러워하면서도 자신들의 나라를 사랑할 줄 아는 건강한 사람들이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도 않고, 문화와 역사의 두께 역시 다른 유럽에 비해 두텁지 못했지만, 건전한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일구어내며 살아가는 이 나라의 젊음이 마음에 들었다. 성장에 대한 꿈이 오히려 자신의 터전을 짓누르는 일이 없기를 빌면서, 소피아를 뒤로 하고 뮌헨으로 향했다.
4. 헤겔을 닮은 ‘철학자의 길’ - 뮌헨과 하이델베르크
독일은 나에게 칸트, 괴테 그리고 베토벤의 나라로 기억되는 곳이다. 그래서 유럽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독일을 택한다. 독일은 이탈리아나, 프랑스처럼 고전 문명의 외형적 찬란함을 꽃피우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정신사에서 이룩한 지난한 여정들은 눈앞에 현현하는 것 이상으로 위대하다. 나는 그들의 무거움과 지난함이 좋다.
바이에른 주의 중심도시인 뮌헨은, 2차 대전의 폭격 때문에 건물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던 곳이다. BMW의 본사가 있는 이 도시의 면면은 깔끔하면서도 부유했다. 뮌헨에서 통역과 안내를 맡아준 차원석 씨에 따르면, 이곳에서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주변 조경과의 어울림을 위해 도시개발 전문가에게서 허가를 받아야한단다. 그 같은 행정적, 법적 절차 덕분에 뮌헨의 시가는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질서정연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독일인들의 철저함에 새삼 소름이 돋았다. 나치 시대의 과오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묻어난 뮌헨 대학도 인상적이었다. 학생들이 뿌렸던 삐라들을 거리에 새겨놓은 독일인들의 각성은 세심하였다. 우리는 전혜린의 수필집을 통해 잘 알려진 슈바빙 거리도 거닐었다. 그녀의 글 속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우울해지던 그 거리가 현실에서는 매우 밝고 아름다워, 오히려 낯선 감이 없지 않았다.
독일에서 두 번째로 찾은 도시는 하이델베르크였다. 뮌헨이 새롭게 복구된 도시라면 이곳은 보다 옛것의 냄새를 강하게 간직하고 있는 땅이다. 도시의 왼편으로 네카어 강이 흐르고 도시 너머 산등성이 쪽에는 하이델베르크 성이 폐허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중세의 풍경이다. 카를 테어도르 다리를 건너서 언덕진 곳을 향해 조금 걷다보면 헤겔이 자주 산책했다던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 이어져 있다. 철학사에는 종종 근대와 현대를 나누는 기점을 헤겔이 죽은 1831년으로 본다. 철학사에서 이토록 위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헤겔을 나는 그의 의도적인 난해함과 지나친 보편주의 덕에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헤겔을 흉내 내며 그가 즐겨 찾은 산책로를 따라 철학적 산책을 감행하였다. 산책로는 헤겔 철학처럼 몹시 가파르고 구불구불했다. 어느 정도 걷다가 경사가 완만해진다 싶을 때 하이델베르크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철학자의 길은 헤겔 철학의 난해함과 보편주의적 스케일을 그대로 닮았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하이델베르크의 밤이 유럽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우리들의 마지막 만찬은 맥주와 문학으로 또 한 번 격식 없이 유쾌하였다.
5. 끝나지 않은 귀향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유럽을 둘러본 이후에도 유럽에 대한 나의 편견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유럽은 내게 매력적인 곳이다. 어떤 부분은 나의 편견만큼 대단했고, 어떤 면에 있어서는 기대 이상이었다. 물론 실망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았으나, 전반적인 나의 오해에 큰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글의 말미에서 뒤늦게 고백하건대, 나는 한 번도 유럽을 타자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유럽에 대한 맹목적 동경 뒤에는 그들과 나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무의식이 도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책을 통해 배운 그들의 역사가 곧 나의 역사였고, 그들의 철학이 내가 근거로 삼아야하는 사유의 시발점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타자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엉뚱하게도, 거창한 생각에서부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음식에서였다. 여행의 막바지로 가면서 우리의 식탁은 풍성해졌다. 특히 독일에서는 현지의 전통 음식이라 할 수 있는 것들만을 집중적으로 탐했었는데, 어느 때부턴가 입안에서 이물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한국 음식을 찾지도 않고, 오히려 현지 음식만을 고집했던 내가, 아무리 맛있게 차려진 요리가 있더라도 쉽게 입에 물렸다. 심지어는(촌스러운 이야기지만) 속이 더부룩했고 몸에 힘이 나지 않았다. 나의 심신을 상쾌하게 만들어줄 고국의 음식이 간절했다. 그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유럽을 진정 타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 나는 그 곳에서 속하고 싶어도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아차린 것이다.
정신은 대자(對自)를 통해 자기로 회귀하는 운동성을 지닌다는 헤겔의 말은 옳은 모양이다. 보름간의 짧은 머무름 동안 유럽은 나에게 거대한 타자였다. 어디 보름뿐이었을까. 사실, 유럽을 고향처럼 여겼던 나의 맹목은 눈물나게 신파스러운 환상이었으니. 내가 진정으로 살고 있던, 혹은 살아야 할 곳은 이 땅의 볼품없고 남루한 역사 위였던 것이다.
가난한 이 땅의 현실을 생각하며 함석헌 선생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때 나는 눈물을 통해 투영되는 이 땅의 역사를 고민하던 그의 모습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랬던 내 생각은 이제 조금씩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철지난 민족주의나 편협한 국가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와 문학(이야기) 그리고 역사. 우리를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들을 오히려 가까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들만의 삶의 문맥을 잊고 산 지 너무 오래되었다. 잃어버린 그 문맥을 찾아야겠지만, 그 문맥은 저들(서양)을 향한 구애의 몸짓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외부로 향하고 있던 시선을 자기에게로 돌리는 일. 그것이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은 문제의식이자 과제이며, 기대 이상의 소득이리라.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맹목의 탈을 떨쳐내며, 그렇게, 때늦은 귀향길에 들어섰다.
15일간의 여행이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덕분이다. 순수한 삼례의 시인 상웅 형, 재기 넘치는 왕언니 혜진 누나, 생각이 깊고 따스한 경화,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영수, 그리고 우리의 안위를 살펴주시느라 수고해주신 전성우 선생님까지. 이들이 없었다면 여행이 참으로 시시했을 것이다. 새삼 감사하다는 말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다.

| 번호 | 기 행 문 | 글쓴이 | 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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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끝나지 않은 귀향 | 강동호 | 7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