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재단과 교보문고는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새로운 소통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작가와 함께 하는 낭독회 ‘낭독공감’을 연중 정기적으로 실시한다. 그 첫 행사로 소설가 박완서와 연극배우 김지숙이 함께 하는 낭독회가 지난 2월 22일 새로 오픈한 교보문고 잠실점의 문화휴식공간 ‘티움’에서 열렸는데, 그 행사의 사회자 홍순철 씨로부터 참관기를 받아 싣는다.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창백하게 일렁이던 카바이트 불빛……” 마이크를 타고 원형 이벤트 홀을 울리는 박완서 선생의 목소리는, 어린 시절 배가 아프다고 칭얼거릴 때 당신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눕히고 배를 어루만지며 들려주시던 할머님의 뜻 모를 주문과도 같았다. 그 주문에 걸려 사람들은 책을 주시하거나, 허공을 바라보거나 혹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고운 분홍빛의 재킷을 입고 독자들 앞에 나선 박완서 선생의 모습은 그 존재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안이었으며 감동이었다.
“어리광 좀 작작 부려 이 새끼야. 안 보이면 안 보이는 척 하라고. 장난치지 말고 생긴 대로 살란 말이야……”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새끼’를 연발한 연극배우 김지숙 선생의 낭독은 한편의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소설 속에서 첫사랑과 이별을 선언하는 부분을 낭독하는 그 순간, 김지숙 선생은 책 속의 ‘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장면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몰입의 아름다움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을 것이다. 김지숙, 그녀는 진정한 프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낭독의 또 다른 매력을 선사했다. 낭독공감을 통해 ‘글’의 매력은 감정을 실은 ‘말’의 매력에 완전히 압도당했고, 그것은 문학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 교보문고 잠실점에서 '낭독공감' 첫 행사로 열린 박완서 낭독회.© 운영자

 

아직까지 우리에게 너무나도 낯설게만 다가오는 낭독회, 낭독회는 유럽에서 먼저 시작된 전통을 자랑하는 행사이다. 신간이 출간되거나 출판 관련 행사가 있을 경우, 작가들은 으레 자신의 책을 들고 대중들 앞에 서는 것을 의무이자 영광으로 생각해왔다. 우리에게는 왜 이러한 전통이 생겨나지 못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우리의 암울했던 역사에서 찾고 싶다. 식민지배, 전쟁, 장기간의 독재와 민주화운동으로 점철된 현대사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것에 익숙한 삶을 살았다. 우리에게는 낭만과 자유가 없었고, 그것을 즐길 만한 광장문화도 존재하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행사들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에게는 이제야 비로소 그런 날이 온 것이다.
문학이 위기를 맞았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박완서 선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무대에 선다는 것이 쑥스럽긴 하지만 작가가 직접 나서서 독자와의 만남을 시도한다면 결국 독자들이 책으로 돌아올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하였다. 선생은 제대로 맥을 짚고 있었다. 작가들은 문학의 위기에 대해 신세한탄하기 전에 먼저 과감히 무대 위로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자신이 쓴 책을 들고 전국을 순회하며 직접 독자들 앞에 나서는 작가들의 용기와 진지함은 인터넷을 비롯한 다른 멀티미디어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멀티미디어, 컨버전스, 와이브로 등 온갖 신기술이 책의 생존을 위협하는 시대에 맞서 문학 르네상스를 꿈꾸는 작가들의 무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독일어로 낭독회를 ‘포어레중(Vorlesung)’이라고 한다. ‘앞’을 의미하는 포어(Vor)와 ‘읽음’을 의미하는 레중(Lesung)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이다. 단어 그대로 작가가 독자들 앞에서 자신의 책의 일부를 읽어주고, 독자들은 근거리에서 직접 작가의 목소리를 듣는다. 언뜻 이것이 무슨 특별한 행사이고 어떤 대단한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 이번 ‘낭독공감’ 행사를 통해서도 확인했지만 - 낭독회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의 벽을 허물어준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진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펑키 스타일의 옷을 입은 20대 청년이 박완서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님 작품 속에 유부녀인 주인공이 다른 남자와의 불륜을 꿈꾸는 장면이 나오던데, 만약 선생님이 지금 젊은 세대라면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으세요?” 그러자 좌중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선생은 한참을 둘러 시대 상황과 순결과 임신에 대한 생각을 얘기한 후, 한마디를 툭 던졌다. “요즘 연인들이 부럽긴 해요. 일단 임신에 대한 두려움이 없잖아요.” 20대와 70대 간에 세대공감이 이루어진 셈이다.
낭독공감, 그것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허상이나,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두고두고 유혹이 될 것 같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150여 명의 진지한 눈길 속에서, 사회자로서 나는 커다란 아쉬움과 동시에 그리움을 발견했다. 바로 소중한 시간이 너무 훌쩍 지나가 버린 아쉬움, 또 다른 낭독공감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다음에는 어느 작가가 어느 자리에서 독자들과 대화하고 소통의 장을 마련할 것인가? 독자들은 작가들의 목소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