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창작과비평』 봄호에 실린 「깃발」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새롭게 다가올 미래를 향해 내건 깃발이었다. 내게도 그러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처음으로 계급적 입장에서 해석했다 하여 주목받은 이 작품을 그로부터 무려 17년이 지난 작년에 다시 읽었다. 핏빛 찬란하게 펄럭이던 깃발은 이제 박제된 듯 창백했다. 그리고 어느 새 마흔이 넘은 나는 다른 데 생각이 미친다. 작가 홍희담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나고 8년이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 그간의 세월 동안 그녀는 어떤 지옥을 살았을까? 지옥을 견딜 대로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녀가 무언가 써볼 엄두를 냈으리라고 나는 추측한다. 아마 내 추측이 옳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뜨겁게 솟구치는 열정을, 그 격랑의 흐름을 다 지켜본 후에야, 그 열정이 차갑게 식은 후에야 비로소, 세월을 버티며 빛 바랜, 그리하여 영원히 영혼에 각인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내밀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
누가 요구한 것도 아니건만 광주를 자기 문학의 뜨거운 화두로 끌어안은 홍희담은 보기 드문 서울 본토박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편을 따라 해남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서울을 떠난 적이 없다. 「깃발」이나 「이제금 저 달이」와 같이 노동자계급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에서조차 느껴지는 단정한 시선은 그 때문이리라. 너무 평범하고 무난한 것이 불만이었던 문학소녀가 작가 황석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광주로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 등단도 하기 전이었던 황석영의 문학적 재능과 열정을 사랑하여 작가의 아내라는 타이틀을 선뜻 선택한 것을 보면, 어쩌면 광주를 만난 것도 그녀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자기 삶에 결핍된, 혹은 진정한 그 무엇에 대한 추구였을 것이다.
광주에 내려간 것은 78년 겨울, 그때까지 홍희담은 문학에 대한 젊은 날의 열정을 잠시 접어두고 두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았다. 아이들이 자라서 엄마를 덜 필요로 하는 만큼 그녀는 조금씩 광주의 민주화운동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곳이었고,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광주 사람들은 서울 본토박이답게 순진한 그녀를 거부감 없이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1980년 5월이 다가왔다.
80년대의 사람들에게 광주는 일종의 원죄였고 부채감이었다. 그러나 홍희담에게 광주는 원죄 이상의 무엇이었다. 광주는 그녀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가치를 무너뜨린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했다. 그리고 광주는, 그 눈부신 5월의 며칠은 그녀에게 두 번 다시 넘볼 수 없는 천국이었으며 동시에 지옥이었다.

▲  홍희담   © 운영자

 

그로부터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서른다섯의 홍희담은 이제 예순을 넘어섰다. 긴 세월 속에서 광주는 이제 지나간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 속에서 광주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현재이다. 80년 그 눈부신 5월은 그녀의 전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헤집고 공기처럼 그녀의 삶으로 스며들었다. 첫 작품을 쓴 지 무려 15년 후에야 출간된 홍희담의 작품집 『깃발』은 광주가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현재라는 것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홍희담은 역사라는 것은 그 사건의 역사적 의의로만 말해질 수 없다는 것, 역사라는 것은 개인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일상이 되고, 그렇게 변화된 일상으로 인해 세상은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깃발」 이후 홍희담은 고작 다섯 편의 중단편을 발표했다. 잊을 만하면 띄엄띄엄 홍희담은 여전히 광주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또 광주냐고 지겨워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녀의 소설 속에서, 그녀 안에서 광주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지난 25년간 홍희담은 살아남은 자들을, 살아남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깨달았으며, 사람마다 상처를 치유하는 법은 달라도 결국 살아남은 자는 어떻게든 그 생을 견뎌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 소설 속 여자들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성숙한 한 인간으로 키워내고 또 김치를 담근다. 「김치를 담그며」라는 작품 속에서 수연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가막소에 간 것이 무슨 대수냐?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렇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혹은 운명에 의해 죽고 혹은 살아남았던 80년 5월의 광주가 지난 다음에도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수연 할머니는 김치 담그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든 김치를 담가 가족들 배불리 먹이면서, 그 지겹고 무의미한 듯한 일상을 견뎌내면서,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 이 세상을 유지하는 것이 여자이고, 홍희담의 광주는 지옥을 거쳐 여성성, 즉 대지의 건강한 생명력으로 방향을 잡아가는 모양이다.
홍희담은 요즘 일곱 살, 다섯 살이 된 손녀들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잠시 집 밖에 나갈 짬도 없다. 주변에 예술가들이 워낙 많아 그 뒤치다꺼리하느라 정작 자신의 문학을 생각할 짬이 없다면서 그녀는 예순 둘의 나이가 믿기지 않게 맑게 웃었다. 「깃발」의 작가 홍희담이 손녀들과 연극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고 예쁘다는 말에 더없이 행복하단다. 잠시 당황스러웠으나 그 순간 젊은 시절 보았던, 생의 모든 겉치레를 다 버린 듯한 그녀의 사진이 떠올랐고, 일상의 순간순간을 차지게 보내는 그녀의 오늘이 그녀 소설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희담의 소설은 광주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 자기 피와 살로 녹여내는 과정이었다. 그녀의 소설은 단 한 번도 자기표현이라는 욕망의 발로였던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희담에게 소설이란 무엇일까? 묻고 싶었으나 어쩐지 우문인 것 같아 묻지 못했다. 아마 그 답은 그녀의 소설 속에 있으리라. 손녀들과 함께 하는 노년의 일상이 그녀의 영혼을 맑게 깨운 어느 날, 그녀는 아마 다시 원고지 앞에 앉을 것이라 짐작하고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