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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미로 속으로… - 이인성의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프랑스어 번역 단상

이인성의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6년, 내가 아직 파리에서 유학생으로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누보로망’ 작가로 유명한 알랭 로브그리예의 작품에 깊이 빠져있었고, 여러 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매번 그의 텍스트는 야속하게 그새 또 모양새가 변해버린 듯하여 텍스트의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어떤 일을 계기로 이 작품을 만나게 되었고, 한국에 이런 작품이 있구나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는 내가 번역에 뛰어들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던 때였음에도, 이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다. 한국어가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극단에서 벌어지는 그 글쓰기 탐구를 다른 언어로 옮길 때 원래의 제 빛이 과연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한국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해 선택한 첫 작품이 그의 첫 소설인 『낯선 시간 속으로』였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은 내게는 하나의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나는 한국문학작품 3권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이른바 ‘번역가’가 되어 이렇게 번역 후기를 쓰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번역가’라는 말이 내게는 좀 머쓱하다. 사실 나는 번역을 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인 번역자에게 작품을 매개하고 그의 번역이 잘 이루어졌는지 감수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을 따름이다. 내가 원하는 만큼 일구어내었는지는 감히 자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모든 작품은 저마다의 특성이 자아내는 독특한 난점들이 있어서, 어느 작품이 번역하기 더 쉽고 더 어렵다는 말을 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의 번역에서 어려웠던 점은 단어 하나하나의 무게를 재는 것 이상으로, 고도로 계산된 문체 실험을 프랑스어에 적합한 형태로 옮기는 일에 있었다. 모순과 역설 사이로 생각이 다각적으로 얽히고설킨 극도의 만연체에서 생각의 단층을 분해하는 간결체, 너무나 시적이고 낭만적인 어조에서 주정뱅이의 분방한 어투나 칼날 같은 냉소, 극히 이성적인 어조에서 광기어린 횡설수설, 논리적 유창함에서 억압된 영혼의 어눌한 말더듬기, 진지한 내적 고뇌에서 말장난의 유희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을 구성하는 52개의 짧은 장들은 수도 없이 어조를 바꾸었다. 온통 ‘나’로 가득한 그의 소설이 역설적으로 나, 너, 그로 분열되어 어떤 정체성으로 고정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만큼이나 그의 어조는 하나의 일관된 목소리 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문체나 어조 가운데 나를 특히 당황하게 한 것은 바로 만연체였다. 한국어에서 만연체는, 더구나 한 페이지가 넘게 늘어지는 기다란 문장은 정말 지옥 같다. 그러나 주어와 동사가 문장의 양극단에서 감싸는 한국어 문장의 구조와는 달리 분석적 성격이 짙은 프랑스어는 만연체를 한국어만큼은 두려워하지 않는 편이다. 프랑스어는 생각 타래를 풀 듯, 단어들을 차례로, 분석적으로 이어나가야 한다. 게다가 한국어의 경우는 절과 절사이의 논리적 연결 고리나, 문장과 문장 사이의 논리적 연결이 중요한 반면, 프랑스어의 논리는 오히려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 방식에 달려있고 절이나 문장의 연결 논리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 같다. 콜론이나 세미콜론이 웬만한 등위접속사 구실은 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한국어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만연체가 드러내는 생각의 꼬불꼬불한 굴곡이 프랑스어로 옮겨졌을 때 몇 개의 절로 매듭지어진 구조화된 문장으로 변해버리는 것을 어떻게 막을 길이 없었다. 결국 우리가 찾은 타협책은 우선 만연체와 간결체를 가능한 한 선명하게 대비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연체의 경우, 되도록이면 원 문장의 단위를 존중하되, 그 속에 내포된 ‘생각의 중층’을 절로 중첩시키자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해야 할 작업은 미로 같은 긴 문장 속의 지름길과 우회로의 교차점을 찾아 생각의 매듭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면 공역자는 원래의 문장 단위를 유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될 경우 문장을 둘 혹은 많게는 세 개로 나누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의 최종 텍스트를 처음 읽어준 프랑스 지인의 말에 의하면, 만연체의 효과가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내가, 아니 우리가 결국 도달하려는 곳은, 그것이 비록 대략적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할지라도, 두 언어 텍스트가 하나의 생각, 하나의 느낌으로 만나는 곳이다. 표면적으로 금방 드러나는 의미상의 오류들은 토론을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가 느끼는 것을 내 공역자도 느끼는지, 그리고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그의 예리한 직관이 느끼는 것을 내가 원 텍스트에서 다시 느낄 수 있는지 그것을 늘 문제 삼는다. 그런 만큼 우리의 토론은 종종 수다로 이어지기가 일쑤다. 두 언어 사이에서 생각과 감정이 상응하는 듯한 느낌이 솟아오르는 순간, 나는 그 말들에 대한 직감으로 흥분됨을 느낀다. 아마 그 맛에 번역을 하는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번역자의 독서가 근본적으로 비평가의 독서와는 달라, 번역자는 최선의 번역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반복하는 수차례의 독서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서 생성되는 의미 효과를 모두 작업의 여백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번역이 진행되는 동안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은 모두 침묵으로 지워버리고, 번역자는 작품에 대해 결국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여백으로 내몰린 독자로서의 담론이 침묵으로 억압되어버리긴 하지만, 텍스트에 대한 그만의 내밀한 반응으로 이루어졌을 표현 선택이나 새로운 통사 형태에 의한 생각의 구조 변화를 통해 번역자가 원 텍스트를 모태로 자신만의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을 번역하도록 허락해준 작가 이인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제공하는 기초 작업대를 신뢰하고 그 위에서 당신 자신의 직관에 세심하게 귀 기울이며 번역에 전력을 다해준, 내 스승이자 이 작품의 진정한 번역자인 장 벨멩 노엘에게 깊이 감사한다.
※ 필자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장-벨멩 노엘 공역)의 번역을 마치고 출판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