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철(좌)과 아나톨리 김(우)   © 운영자

1989년 10월 서울에서는 세계한민족문화축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 해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데 힘입어 세계에 흩어진, 특히 중국 소련 등 공산권에 살고 있는 동포 문화예술인들을 초청해 한민족의 일체감과 긍지를 고취시킴과 동시에 북방정책 활성화 의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열린 행사다.
올림픽을 치르기에 바로 앞서 납, 월북문인 해금조치를 취해 그동안 ‘정지용’을 ‘정xx’로 표기해야했던 이념의 장벽을 벗겨나가는 모습을 보이던 당국이 공산권 동포 문인 및 예술인을 대거 서울로 초청한 것이다. 해금조치는 취했으나 남북문학교류는 불허하고, 비록 비공식적으로 출간되긴 했지만 북한문학 작품이 버젓이 대형 서점에서 팔리며 읽히고 있던 때라 공산권 국가에서 온 동포문인들에 대한 관심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한민족문화축전 참석자들의 명단과 약력을 얻어 쭉 훑어보니 중국에서 온 작가 김학철과 소련 동포작가 아나톨리 김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해서 작가 김원일씨와 함께 세 명의 정담(鼎談) 자리를 마련, 한민족의 정체성과 함께 공산권 문학의 현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려는 기획을 세웠다. 세계한민족문화축전에 참가하고 있는 중국과 소련 동포의 일정도 달랐고 숙소도 달랐기에 시간을 맞추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며칠 조정 끝에 아나톨리 김이 묵고 있던 잠실 롯데호텔에서 정담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일흔을 훌쩍 넘은 고령에 한쪽 다리가 목발인 김학철은 검은 인민복 차림에 한점 흐트러짐 없는 꿋꿋한 자세로 아나톨리 김의 숙소로 와 2시간여 정담을 나눴다. 막 50줄에 접어든 아나톨리 김은 콧수염의 청바지 차림에 한국어는 한마디도 못했으나 집안 어른 뵙듯 김학철을 깍듯이 대하며 정담을 이어 나갔다.
1916년 함남 원산 출생, 35년 서울 보성고보 재학 중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을 오는가」에 감명 받아 총을 들고 조국의 봄을 부르려 상하이로 망명, 조선의용대 입대, 41년 태항산 전투에서 일본군 포로가 돼 복역 중 해방으로 풀려나 서울에서 소설 창작활동을 하다 47년 월북, 북한에서 노동신문 기자로 있다 50년 중국에 망명, 창작활동을 하다 반혁명 우파분자로 몰려 10여 년간 투옥. 이런 약력만으로도 김학철은 식민과 전쟁과 이념으로 파란만장한 우리의 20세기를 온몸과 정신으로 통과해온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인,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고려인’ 3세로 1938년 구소련 카자흐스탄 출생, 모스크바 고리키문학대학 졸업 후 73년 단편 「수채화」로 소련 중앙문단에 등단, 80년대 소련 ‘40대 문학’의 기수로 이념에 함몰되지 않는 인간성을 지키려는 문학활동을 펼치며 세계 20개 언어로 번역된 아나톨리 김은 한민족의 수난이나 정체성보다는 엘리트교육을 받고 잘 나가는 소련 작가의 한 사람임이 약력으로도 떠올랐다.
그래서 정담은 한민족의 정체성, 한 핏줄 등등의 민족 감정은 예의상으로 흘렸고 자신들이 체험한 공산권문학의 공과로 들어갔다. 김학철은 자신의 혁명투쟁을 다룬 대표작 『격정시대』를 예로 들며 “이 작품은 보다 나은 세상과 삶을 위한 내 인생역정 및 혁명주의 문학관이 잘 드러나 있고 민족의 자긍심을 위해 씌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문학적 성과는 나 자신도 의문”이라며 정치성이 강해 딱딱하고 읽을 맛이 없는 것이 사회주의 문학이라면서 이제 문학은 혁명이 경시했던 인간의 본성을 파고들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나톨리 김은 한 시대의 혁명과 정치이념을 담당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만큼 문학의 본질, 즉 휴머니즘과 심미성을 적대시했다며 이제 소련에서도 페레스트로이카에 힘입어 문학이 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두 사회주의권 동포 작가는 혁명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시대적, 사회적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또한 그런 정치성이 강한 문학을 문학 본령의 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 정담이 이뤄진 1989년 당시 우리 문학은 노동문학, 분단문학, 민중문학 등을 아우르는 넓은 의미로서의 민족문학의 흐름이 민주화의 시대적 당위성을 띠고 대세의 마지막 격랑을 이루고 있었다. 그해 봄 남북작가회담을 위해 북쪽으로 올라가던 문인들이 당국에 연행돼 무산됐는가 하면 황석영씨가 풀릴 것 같으면서도 아닌 남북관계의 답답함을 확 풀어버리려는 심사로 밀입북한 해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북한의 혁명가극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의 원작소설까지도 마구 국내서 출간돼 읽히던 때였다.
그러나 김학철, 아나톨리 김의 말대로 당시 공산권 국가에서도 혁명주의니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은 시대적 당위성을 다한 문학으로 퇴조하고 있었다. 연변을 중심으로 요령성, 흑룡강성 등에 유입되고 지도하던 북한문학은 더 이상 중국조선족문학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남한의 추리소설, 연애소설 등이 들어와 읽히며 문예지에 연재까지 되고 있다고 밝혔다.
문학의 다양성을 위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김학철은 중국 동포문단이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들어가는 것을 경계하며 ‘사람과 사회를 위해 문학은 봉사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문학정신이 흔적 없이 사라져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런 김학철이 서울을 다녀간 이래 중국 조선족 문단은 급격히 남한화됐다.
필자한테도 “김학철 선생님이 꼭 한번 찾아보라”고 했다며 많은 시인, 소설가들이 찾아왔다.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투쟁을 다룬 소설이나 시 등 귀한 원고를 싸들고 와 출판을 의뢰했으나 1990년대 이후 남한에서는 그런 원고를 소화할 출판사도, 독자도 이미 없었다. 북한이 심혈을 기울인 집체작 『피바다』, 『꽃 파는 처녀』 등도 시대적 감동은 다하고 그 이념적 도식성만 눈에 들어와 식상한 남한 상업주의 문단에서 그들의 ‘순정성’은 그저 촌스럽고 아마추어리즘으로 흘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02년 9월 “부친께서 늘 외우시며 그리워했던 귀하이므로 특별히 모시고자 하니……”라는 초청장이 왔다. 김학철 1주기를 맞아 그의 추모식이 서울에서 열린 것이다. 김학철은 2001년 9월 25일 연변에서 “시신은 화장해 원산행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두만강에 뿌려달라”는 유언과 함께 타계했다. 추모식에서는 조국 광복과 인간다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독립군에 입대하던 첫 마음으로 삭발하고 인민복으로 갈아입고 임종을 맞는 모습과 ‘원산 앞바다 행’이란 꼬리표를 달고 두만강을 떠내려가는 유골함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가 방영됐다.
타계 1년 전 김학철은 우리의 아픈 근, 현대사의 기록을 마지막 권으로 출간하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한에는 더 이상 그러한 책을 출간할 순정한 출판 정신은 물론, 민중 출판의 상업성도 시효가 지난 상태였다. 1989년 이래 얼마간 순정한 혁명의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어졌던 김학철은 그렇게 남한에서 잊혀져갔다.
아나톨리 김을 2003년 여름 모스크바 한 대형서점에서 만났다. 그는 대산문화재단과 러시아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가 공동개최한 한국문학제에 참석하고 있었다. 전임 연구원만 3백여 명에 이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메카라 할 수 있는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에서도 이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동정심에 바탕한 세계적인 보편성’, 즉 보편적 휴머니즘을 다시 문학의 정신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서점의 매장을 쭉 구경시켜주며 아나톨리 김은 대형서점의 매대에 잘 전시돼 세계의 독자들에게 잘 읽힐 수 있는 작품을 구상 중에 있다고 했다.
1989년 가을 김학철과 아나톨리 김이 공산권 해외동포문학을 대표하며 소개될 때 한국문학은 분명 한 시대의 절정, 분수령에 올라와 있었다. 그때 그들은 몸소 겪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공과에 대해 말하면서 문학은 사람과 사회를 위한다는 명분은 결코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문학은 그때 그 분수령에서 이 명분을 저버리고 돈과 자본을 위한 문학이 돼 버렸다. 올 여름 문학 독서시장 역시 그런 작품이 아무런 반성이나 항체도 없이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