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을 여행 중인 쿤체 시인 내외. 양평을 지나던 중에. © 운영자

 

시인이 조용한 사랑으로 돌아보며 그려가는 삶의 장면들, 사물의 모습들은 깊고 따뜻한 성찰이 스미면서, 하나하나 뚜렷이 떠올라 제 아름다움을 얻는다. 전체 4부 가운데 제 3부가 기행 시편으로, 그 중 12편이 한국에 대한 시들이다. 기행 시편이라지만, 그저 여행의 인상이 아니라 시를 통해 만난 사람들, 만나게 된 시의 이야기, 시에 대한 생각들을 담고 있다. 어떤 핀란드 시인에게 독일은 횔덜린이고 노발리스, 릴케이듯, 쿤체 시인에게 핀란드는 한 시인의 시구를 통하여 시 속으로 들어온다. “자기가 무엇이었겠느냐고, 그가 말했다 / 독일이 없었더라면 / 그러면서 그가 뜻하는 건 / 횔덜린, 노발리스, 릴케 // 웃던 사람들에게 그 말은 / 웃음을 막는다” (「푸아드 리프카」). 시인은 한국 역시 그렇게 시를 통해 만난다. 한문학을 전공한 독일인이 번역한 한계 많은 시 번역서를 들고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한국 시조의 핵을 짚어낸다. 이율곡의 시조 「고산구곡가」의 제 1곡 “관악이 어드메뇨”를 읽은 시인은, “송간에 녹준 놓고 벗 오는 양 보겠노라”는 율곡에게 「메아리 시조」로 화답한다.

술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안에 든, 단지여서가 아니라
숲 안에 든, 숲이어서가 아니라
시안에 든
무언가에 나 끌리네
이 나라로, 산이
그림에서처럼 펼쳐져 있다는.

기꺼이 시인의 세계 속
저이가 되어 보려네
시로 인해
시인의 벗이 된다는.
- 「메아리 시조」 전문

“시로 인해 / 시인의 벗이 된다는” 곳 - 율곡에 의해 한국은 그런 나라가 된다. 시인은 “녹수 흘러감”을 탄식했던 황진이의 시조를 읽고서, 또 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갓 나온 시집을 읽고서, 왜 물 빛깔은 초록이라고도 푸르다고도 하는데 슬픔의 빛깔만은 같은가 묻는다. 그렇게 시인은 이 시조의 나라를 찾아온다.
잠깐 머무른 한국, 시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한옥의 휘어진 지붕 추녀이다. 지붕 내림마루를 따라 늘어선,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가는 삼장법사의 행렬에 눈길이 머문다.

지붕들에는, 불경을 가지러가는 길 위에 있는
스님
원숭이
용
돼지
이야기 속 인물들

종종걸음으로 내림마루를 따라
세상의 네 방향으로 가고 있다

모든 길은 부처님에게로 이어진다

살짝 휘어 오른 추녀
끊긴 것 같아라
부처님 미소에
- 「서울, 궁(宮)」

구도(求道)의 행렬에 가닿은 시인의 눈길은 참으로 부드럽다. 아득히 사방으로 나아가는 듯한 내림마루 위의, 불경을 찾아 가는 “길 위의” 인물들. 그 시선은 지금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현대 서울 거리의 모습, 여기서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하는 시인의 눈길에는 핵심을 꿰는 날카로움이 서려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래 보인다,
길 위에 있다, 그리고
젊다 그리고
길 위에 있다, 그리고
날씬하다 그리고
길 위에 있다

귀에는 핸드폰을 대고, 그들은 서로에게 맹세하고 있는 듯하다
하나는 다른 이를 위해 창조되었노라고
하지만 길 위에 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 「서울의 거리 모습」 전문

너나없이 꿰인 듯 핸드폰에 매달려 귀를 대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사람들 - 시인의 눈에 비친 우리네 모습이다. “길 위에”라는 한 말마디에 어제와 오늘의 한국, 한국인의 두 얼굴이 선명하게 잡힌다. 오늘 한국의 수많은 교회 십자가들과 광고판들은 또 다른 대조를 이룬다. “밤의 고층블럭들 위 / 기독 십자가들, 네온 불빛 가장자리를 두르고 / 빨강으로, 노랗게, 하얗게, 디즈니- / 천국, 열려있다 / 24시간”(「서울의 선교」 전문) 그렇지만 시인은 커다란 서점을 가득 채우는 책 읽는 사람들을 다정하게 바라본다. 서서 앉아서 또 갓난쟁이를 안고 책을 읽고 있는, “그들 언어의 먼 우주에 가있는” 그 사람들이야 말로 “도(道)에” 이르려는 “길 위에” 있는 사람들 같다(「메가메트로폴리스 서점」). 공휴일, 광화문 교보문고의 인상이다.
그리고서는 시인 자신이 “길 위에” 선다. 시인의 마음을 끌었던 것, 율곡의 시에서 “그림같다”던 산야(山野)를 찾아 나선다. 오밀조밀한 논, 첩첩 산, 능선, 서려오는 어둠. 그러나 시인은 이 풍경이 “그림”만이 아닌, 노고의 땀이 밴 “수고의 터전”임도 함께 본다. 시인의 나라를 찾아가는 자신의 길에 펼쳐진 모든 것을 담은 시는, 말없이 성의를 다해 운전을 해준 이름 없는 한 한국인을 위해서, 그 이름을 담아 남긴다. 젊은이인 사람을 “노 명인”이라고 깍듯하게 부르며(「노 명인과의 드라이브」).
산야를 지나,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에도 닿는다. 그러나 율곡이나 사임당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고, 그 집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 키에다 사람만큼의 수명을 가졌다는 검은 대나무, 오죽(烏竹)에 눈길이 머문다. (「오죽」) 눈길이 잘 가닿지 않는 곳을 향하는 것은 사람의 목숨과 사람의 뜻에 시인의 사유가 머물곤 하기 때문일 것이다. 목숨에 관한 생각들은 한국인에게는 잘 알려진 정몽주의 시를, 선죽교에서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시조를 방불케 하는 압축된 몇 행에, 그러나 시취 어린 현대어에 담아낸다.

충성을 맹세했던 왕에게 충성 지키며, 떠났다
현인은 모반자를, 제 살인자의 시선을 피했다
말 거꾸로 타고 다리 건너며, 휘두르는 칼 밑으로 들며, 노래 속으로 들며.
- 「옛 문체로 쓴 한국의 옛날 일」 전문

그리고 옛 이야기에서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시에 배여 있는 절망들을 읽는다. 독일에서 번역이 갓 출간된 황지우의 시를 읽는다. (「절 너머」) 또한 쿤체 시인은 독일 분단을 가장 혹독하게 몸으로 겪었으며, 온갖 핍박을 당한 끝에 결국은 동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분단된 한국을 찾아오면서 그 현실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씁쓸한 현실을 옛 조선의 오순의 한시 「관가정(觀稼亭)」을 빌려서 담아 본다. 「분단국을 위한 쓴 시조」를 써 본다.
사람의 목숨에 오래 많은 생각이 머문 듯, 여주군 걸은리라는 조그만 곳에서 한차례 더 낭독회를 하기로 했던 날에, 시인이 불쑥 고려장에 대해 묻기에, 그 지역에 있는 고려시대 폐사지 뒤 산자락 고려장 터를 찾았다. 나이 든 사람을, 외국인을 안내할만한 곳일까 싶었지만, 잠잠히 앞장을 설 수 밖에 없다. 지게에 얹힌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가는 길에 길 잃지 않도록 진달래꽃을 따서 띄엄띄엄 흘렸다는 이야기를 해 드린다. 형제들 몰래 어머니를 뒷방에 숨겨 밥주발을 넣어주며 봉양했다는 아들의 이야기도 해 드린다. 덤불숲을 헤치며 걸어가던 길과 들었던 옛 이야기는 고스란히 「그렇지만 옛 노래 속에서」라는 한 편의 시에 담긴다.

스스로의 기억에마저 숨겨진
산속 외진 곳, 거기로
예전에 아들들은 등에다
늙은 어미, 꼬부라진 아비를 지고 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길을, 한 그릇 밥이
너무도 귀해, 아들들은 이 삶에서부터 내려놓았다
짐을, 내려놓았다
어미아비를 땅에다가,
하늘에다가

땅에다 “짐”을 내려놓아 버린 것은 동시에 “하늘에다가” 부려놓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어서 어머니의 사랑을 담은, 아들의 사랑을 담은 사연까지 고스란히 담아 가는 듯하던 시는, 끝에 가서 무거운 망치를 땅땅 두드리듯 무서운 끝맺음을 한다.

이 노래 천년 전을 돌아보네
이 노래 천년 후를 내다보네

혹시 시인이 짐작했던 것일까. 천년 후가 아니라 벌써 오늘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이야기가 한국에서 벌써 떠돌고 있다는 것을. 한국만의 문제겠는가. 한국의 옛 이야기 하나를 통하여 시인은 시대의 문제를 날카롭게 제시한다.

시인이 한국에 온 사연도 특별하다.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서울 국제문학포럼에 모시고 싶어서 두 차례나 초청을 했을 때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집으로 찾아가서, 당신 시를 아끼는 학생들이 시를 듣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당신 학생들이 내 시를 듣고 싶어 한다면야 가야지요” 하더니 왔다. 사례와 예우를 받는 초청 작가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를 아끼는 사람들을 위한 시인으로서, 자비를 들여 조용히 잠깐 다녀갔다. 그의 시를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한 낭독회가 마련되었다. 2005년 가을의 일인데, 감동적인 자리였다. 수많은 질문이 나왔고, 시인의 더없이 성의 있는 대답이 이어졌다. 그리고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에 있는 조그만 카페에서 또 한 차례 작은 낭독회가 열렸다. 먼 곳까지 찾아왔던 청중들은, 갈 길이 멀건만 밤늦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린 소년의 질문에 한없이 진지하게 답변을 해가던 노시인 내외의 다정한 모습은 누구에게든 지워질 수 없게 각인된 듯했다. 시가 무엇인지, 시인이 무엇인지를 눈으로, 마음으로 본 듯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