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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예한 그래서 공허한 말들의 전쟁, 그 후폭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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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연암의 열하기행길을 따르는 여정 중에 중국 청나라의 옛 수도 심양(審陽)을 들른 이래 그림자처럼 어리어 최근까지 떨치지 못하고 있는 오래고 묘한 소회가 있다. 청태조 누루하치와 청태종 혼타이지의 소박한 왕궁인 심양 고궁을 둘러본 후 필자는 내내 ‘그해’ 전후에 일어난 흔적들을 찾아다녔다. 병자호란 이후 끌려간 수만 명의 조선인들이 팔려 나간 노예시장터였다는 남탑을 찾아 혼잡한 시장 길을 헤치며 반나절 이상을 보냈다. 이어 삼학사(三學士)와 천주교도들의 처형장이었던(지금은 어린이 체육공원이 된) 중산(中山)공원에서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날아다닌다는 까마귀 떼를 보며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김훈의 신작 장편소설 『남한산성』을 보면서 착잡하고 형용하기 어려운 그 감정의 형해를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남한산성』은 병자년 그해 47일 동안 남한산성 안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고통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소설은 비장하고 첨예한 그러나 무기력하게 허공에 흩어져 버리는 공허한 말들로 가득하다. 수십만의 청나라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와 순식간에 서울을 함락하였고 조선 조정은 길이 끊긴 채 허둥대다가 남한산성에 고립된다. 혹독한 겨울 추위와 청의 대군에 둘러싸여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한 산성에서는 무력한 임금을 사이에 두고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와 최명길로 대표되는 주화파간의 논쟁이 끝없이 계속된다. 한 치의 양보 없이 날카롭게 부딪치는 치열한 말들, 그래서 더 공허하고 더 무의미한 말들. 이 첨예한/공허한 말들로 가득했던 남한산성에서의 47일간 벌인 항전의 끝은 인조가 한강 연안의 나루 삼전도에까지 걸어 내려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는 굴욕으로 일단락된다. 그리고 소현세자와 왕족, 수많은 대신들과 양민들이 볼모로, 노예로 끌려가는 더 큰 상처로 이어진다.
그해 이전 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혼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사절로 참석한 조선의 사신 나덕헌과 이곽은 끝까지 꿇어 엎드리는 배례를 거부하는 ‘기개’를 보였다. 이미 명나라를 섬기는 입장에서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의 왕에게 배례를 하는 이군불사(二君不仕)의 유교윤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조선의 임금을 질책하며 왕세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강압적인 서한, 그리고 청태종의 친정으로 이어지는 병자호란이라는 참담한 비극으로 확대되었다.
책임 있는 지식인으로서, 관료로서 그리고 누구보다 당시 청나라의 위세와 힘의 역학구도를 눈으로 생생히 보고 또 잘 알고 있었을 그들은 왜 그랬을까. 강성한, 아니 중원의 패권을 쥐게 될 나라의 황제 즉위식에 축하사절로 가서 국가적 재앙을 무릅쓰고라도 그들은 자신의 지조를 지켜야 했을까. 그 지조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국가의 안위가 거센 폭풍 앞의 등불 같은데 주전과 주화의 논쟁은 왜 그렇게 끝없이 계속되었을까.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한 자기확신과 그에 따라 굽힐 줄 모르는 소신과 기개였을 것이다. 타협하지 않는 말과 행동들은 그들 자신의 입장을 한층 선명하게 하고 다른 사람(당파)들과 구분 지어주는 중요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을 넘어섰을 때 그 말들은 칼이 되고 화살이 되어 온 나라를 휩쓰는 엄청난 후폭풍으로 돌아왔다. 또 지배층인 그들의 허위의식에 기망당하고 치유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고스란히 떠안는 것은 민초들의 몫이었다.
자신의 소신과 지조를 용기 있게 밝히는 것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나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자기최면으로 이어져 더 강경해지고 더 첨예해져서 결국에는 공허하고 무기력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역사는 돌이킬 수 없지만 반복된다고 했던가. 수 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 쏟아지는 말과 말들의 첨예한 갈림과 부딪침을 보며 착잡한 심정은 좀체 가시지 않는다. 이 엄청난 말들이 빚어내는 후폭풍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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