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포에 있는 자택에서 만난 홍성원 선생과 필자   © 운영자

한 청년이 있습니다. 청년은 낚시꾼입니다. 낚시를 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강과 바다를 다녔습니다. 청년은 낚시꾼이면서 또한 바다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청년이 바다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바다가 주는 상상력 때문입니다. 청년이 말한 것처럼 바다를 한 번 보세요. 광활한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시선이 멈추지 않습니다. 청년은 시선이 미끄러진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언가 막힘이 있거나 시선을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시선은 당연히 그곳에서 멈출 것입니다. 그러나 탁 트인 바다는 끝이 없으며 마치 한없는 세계와도 같습니다. 생각하기를 원하고 상상하고자 한다면 바다처럼 무한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은 바다를 사랑합니다.
저는 그만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맙니다. 청년은 바다와 낚시 중에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말해달라고 말입니다. 저의 질문을 받은 청년은 웃습니다. 청년이 저에게 말해줍니다. 실제 낚시를 하는 시간은 낚시를 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에 비한다면 아주 짧은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낚시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낚시를 할 수 있는 목적지가 필요하겠지요. 그렇다면 목적지는 어디로 할까? 동해로 갈까? 남해로 갈까? 남해로 간다면 섬으로 갈까? 연안으로 갈까? 섬으로 간다면 큰 섬으로 갈까? 무인도로 갈까? 무인도로 간다면 며칠을 머물 것이며 준비물은 무엇이 있을까? 무인도까지 가는 차편은 어떻게 할까? 무인도에 홀로 남는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때로는 반나절의 낚시를 위해 일주일 이상을 준비하고 이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낚싯대를 드리우기 전부터 설렘과 함께 많은 상상을 청년은 즐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낚시를 하면서 바라보는 바다는 어떻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 또한 무한한 상상이 아닌지요. 청년은 덧붙입니다. 바다와 낚시는 단순하다. 하지만 단순한 것이 상상의 밑받침이면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동경하는 청년에게 상상력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청년은 그 누구보다도 아픈 기억과 과거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청년이 막 청소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청년은 만성 복막염을 앓았고 그래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술 대기 중에 6.25라는 엄청난 비극을 경험합니다. 사춘기 3년을 전쟁과 함께 보낸 것입니다. 그 어린 나이에 말입니다. 청년에게 있어 전쟁은 공포 이상의 공포였습니다.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몸 안에 있는 방어기제가 작동했기 때문일까요? 청년이 사춘기 때 겪은 그 무시무시한 기억은 그만 꽁꽁 얼고 맙니다. 아주 단단하게 냉동되어 청년의 머릿속으로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냉동되어 숨어 있는 줄 알았던 무서운 기억들은 청년이 소설을 쓰면서부터 서서히 해동되었습니다. 머릿속에서 풀려나기 시작한 기억들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집니다. 청년은 풀려난 무서운 기억들을 소설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탄생하는 것이 바로 장편소설 『남과 북』입니다. 『남과 북』은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한국 전쟁을 바탕으로 한 소설 중에 가장 뛰어난 소설 중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  홍성원   © 운영자

 

전쟁을 겪은 사람이 어디 청년 혼자뿐이겠습니까. 청년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억눌렸겠지요. 그러나 청년이 남들과 다른 것은 해동되어 마구잡이로 날뛰는 무서운 기억들을 상상력의 힘을 빌려 뛰어난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에 있겠지요.
청년이 쓴 장편소설들은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들과는 아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평론가의 지적대로 선과 악의 단순한 대립구도를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선에도 악이 있을 수 있음을, 마찬가지로 우리가 흔히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도 선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다른 역사소설들은 영웅적 인물이 소설의 전면에 나서기 마련인데 청년이 쓴 역사소설에는 영웅적이면서 뛰어난 인물이 전면에 있지 않습니다. 청년은 소설 속에서 비범하고 출중한 인물을 그리더라도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현실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보통 사람의 애환과 고뇌를 그대로 갖고 있는 실존적 인물로 만1)듭니다. 그 대표적인 장편소설이 바로 『그러나』와 『먼동』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저는 그 점이 궁금했습니다. 청년이 제게 말합니다. 자신은 완벽한 영웅이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며, 육체를 견딜 정신은 없다고 말입니다. 청년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은 고통보다는 편안함을, 힘듦보다는 쉬움을 추구합니다. 육체의 고통을 정신으로 견디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천하장사라 할지라도 고문과 유혹 앞에선 무너지기 십상입니다.
청년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다른 장편소설들은 실상이나 실제보다는 이데아를 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소설에서는 실상과 실제 그 자체를 담고 싶다. 최남선의 경우 친일 행각을 한 것도 사실이고 또한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것도 사실이다. 완벽한 승리? 혹은 완벽한 패배? 그리고 완벽한 사람? 그런 것은 없다. 일부의 승리, 일부의 패배 그리고 과오 등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컴퓨터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복잡한 존재이며, 도저히 예측하기 힘든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수용해야 한다. 이는 양비론 따위와는 다르다. 양비론에는 단정 지음과 비난 그리고 단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 그 자체에 대한 고찰에는 비난과 단죄 그리고 함부로 단정 짓는 일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고백하건데, 청년이 바다를 사랑하는 것만큼 저도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청년이 쓴 단편소설들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단편집 『주말여행』을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제가 『주말여행』을 사랑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로는 당연히 뛰어난 작품성에 있겠지요. 저는 그처럼 훌륭한 작품들이 한 작품집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박성원  © 운영자

두 번째 이유로는 한 작가가 썼다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다양한 작품의 장르에 있습니다. 「프로방스의 이발사」는 추리적 기법을 이용하여 개인의 살인과 광기로 가득 찬, 예를 들면 전쟁이나 인종 청소 같은 집단 살인의 근본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괴질」에서는 사람 같은 원숭이가 등장하여 체계나 체제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고 있습니다. 「사공과 뱀」에서는 불륜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느끼는 중년여성을 등장시켜 밀도 높은 심리묘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즐거운 지옥」은 모더니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과 재창조를 통해 모더니즘의 정수를, 「늪」에서는 두 명의 젊은 과외교사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현대적 기법이라 할 수 있는 미니멀리즘의 진수를, 「무전여행」과 「주말여행」에서는 실감 있는 인물들과 사건을 통해 리얼리즘적인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한 경향성에 파묻히기 쉬운데, 어떻게 한 작가의 글에서 이처럼 다양한 기법과 작법들을 독자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세 번째 이유로는 그 시대성에 있습니다. 평론가 이남호의 말처럼 청년이 쓴 소설은 지금 읽어도 아마 충격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청년이 『주말여행』에 수록한 단편소설들을 쓴 시기는 대부분 1960년대입니다. 1960년대라고는 하지만 『주말여행』에서 보여주고 있는 문제의식이나 독자에 대한 접근방식들은 시대를 떠나 있습니다. 아마 소설에 나타나는 돈의 가치 정도만 현재로 환산한다면 불과 두어 달 전에 발표된 젊은 작가의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믿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이러한 소설들을 썼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저는 청년을 실제로 만난 적이 서너 번 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저의 고백을 차마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이 자리를 빌려 고백을 합니다. 부디 저의 결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왜 홍성원 선생에게 제가 자꾸만 청년이라고 말하는지 궁금한 분들이 있을 테지요. 그렇습니다. 홍성원 선생은 1937년생입니다. 그러니까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지요. 그러나 저에게만은 영원히 청년입니다.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한평생 오직 문학만을 고집해온 청년 중에도 가장 파릇파릇한 청년입니다.
 

▲     © 운영자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청년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소설가의 길을 걸은 다음부터 소설 쓰는 일 외에는 전문적인 일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언제나 생활은 불안정했으며, 가까운 미래조차 설계를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 부분에 대해 청년에게 물어보니 청년은 웃으면서 말하더군요. 불안정 자체가 생활화되었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청년이 쓴 단편소설 중에 한 구절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아마 「해를 기다리는 갈매기」에 나오는 구절일 겁니다. 여기에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직업은 생활을 낳고, 생활은 질서를 낳고, 질서는 관습을 낳고, 관습은 다시 말들을 낳는다.”
저는 청년에게 다시 태어나도 소설가가 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내심 긍정적인 대답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청년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단 한 번의 곁눈질도 없이 오직 소설가의 길만 걸었기 때문이니까요. 청년은 항상 따뜻한 미소로 저를 대했지만 이번만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 없다는 투로 “글쎄…”라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 순간 제 가슴은 무너질 것처럼 아팠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그렇겠지요.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단편소설 하나를 완성시켜도 최저임금 수준도 안 되니까요. 한평생 글만 써온 터라 아마 다른 작가들이 겪는 고통의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고통을 겪지만 청년 같은 진정한 작가들이 어디 그렇겠습니까? 돈보다는 작품의 완성도를 더 생각하는 법이지요.
 

▲   홍성원  © 운영자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끝없는 활력을 지닌 청년이 얼마 전에 큰 수술을 받은 다음부터 몸이 너무 말라 있었습니다. 청년이 큰 수술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함박웃음을 지은 채, SUV 차량을 말 그대로 터프하게 몰고 나타날 것만 같았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한답시고 몇 년 만에 청년을 만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육체를 이길 정신이 없다는 청년의 말처럼 청년의 육체는 힘들어 보였습니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청년에게 누군가의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전화를 받은 청년은 제가 예전에 본 모습 그대로, 아니 제가 보지 못했던 청년의 진짜 청년시절로 금세 되돌아가 있었습니다. 청년은 통화를 하는 내내 활발하게 떠들고, 웃고, 낄낄거렸습니다. 얼굴과 몸 또한 굵어지고 빛을 발했습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누구와 통화를 하기에 다시 청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말입니다. 청년의 통화가 끝났을 때 제가 누구와 통화했는지 물었더니 청년은 “응, 정현종”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청년을 다시 청년처럼 되돌리는 것은 문학친구이며, 저처럼 문학공부를 하는 후배들이라는 것을. 저는 안심되었습니다. 청년은 아직까지 너무도 건강한 청년입니다. 청년의 곁에 문학이 있는 한 청년은 영원한 청년입니다. 그리고 저는 압니다. 육체를 이길 정신이 유일하게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청년의 열정입니다.
선생님, 청년이라 부른 것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어쩌겠습니까. 살 떨리는 제 고백처럼 저에겐 언제나 청년이니까요.
끝으로 청년의 당선소감을 그대로 옮기고자 합니다. 이 글은 청년이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면서 쓴 당선소감인데, 활달하며 호탕하고 때론 당돌하기도 한 청년 정신의 모습이 그대로 담긴 것 같아 여기에 전문을 옮깁니다. 여러분들도 분명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L양.
암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오. 어머님, 삼촌 그리고 승자(昇子), 이렇게 옆에서들 퍽이나 기뻐해주더군요.
백골부대 육번 사무실 뒤 골방이 산실이었소. 낳아놓고 보니 내 아들 같지 않아서 혼자 실소도 해보았소만 개구멍받이로 버리는 셈치고 우량아 심사에 업혀 보냈더니 이게 의외로 꼴보다는 튼튼했던 모양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