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

웹진 대산문화

한강의 자전거 길

놀랄만한 경험이 사라지면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지금 내게는 유소년기의 체험을 빼놓고는 이렇다 할 추억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게다가 최근엔 십수 년간 시를 쓰면서 몸에 각인된 추억이 거의 언어로 빠져나가버린 듯한 허탈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인지 시를 써도 산문을 써도 언어들이 탈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여름 새벽 계단에 매어놓은 자전거를 꺼내어 올라타고 한강으로 나간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홍은천변이 있는데, 처음엔 장마철이 아니면 말라붙어 있는 이 천변이 한강으로 통한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새벽 네 시, 어둠이 깔린 천변의 자전거 도로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나처럼 운동을 나온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이들은 천변 위로 흐르는 내부순환도로의 교각 아래서 소줏병들과 함께 대책없이 널부러져 있다. 그리고 교각을 떠받치는 틈마다 비둘기들이 서서 잠들어 있다. 교각의 틈에 가득한 어둠 속에서 비둘기들의 다리는 시멘트에 박힌 철심인 양 미동조차 없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천변엔 물이 고여 있고, 그 작은 웅덩이에 한강에서 날아온 오리 두 마리가 주걱 같은 부리로 물을 쑤시며 먹이를 찾고 있다. 모녀간으로도 보이고 부자간으로 보이는 오리 두 마리가 부리로 물을 쑤시며 나아갈 때마다 생겨나는 파문이 나는 왠지 우리 삶의 조건같이만 느껴진다. 살기 위해서 우리 삶은 저런 파문들을 수없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왔을 것이다.
홍은천변을 꺾어 40분쯤 달리면 불광천변이 나온다. 한강은 그 불광천변과 맞닿아 있다. 수량이 많지 않은 천변의 끝에 확 시야가 트이며 나타나는 한강은 ‘망망대해' 같다. 오늘은 한강변에 나 있는 자전거 도로를 끝까지 달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순간 수십 미터 해바라기 길이 나타나고 강변에서 얼굴에 생각을 잔뜩 박아놓고 노랗게 흔들리는 해바라기가 내 머릿속의 무기력증을 조금씩 활기차게 바꿔준다. 달리다보니 어느새 성산대교를 기점으로 하여 20여 킬로미터가 휙 지나가고 자전거는 어느새 중랑천으로 접어든다. 강물에 한 발을 담그고 밀려드는 강물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는 철새떼가 아침 햇살에 눈부시다. 나는 중랑천의 벤치 곁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앉아서, 자전거가 나를 끌어줄 맹인안내견이라도 되는 양 물끄러미 쳐다본다.
벌써 날이 환하게 밝고 천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더 가고 싶지만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이다. 다시 중랑천변에서 한강으로 접어드는 어디쯤에서 사구가 만들어놓은 제법 큰 웅덩이를 발견한다. 풀밭 한가운데로 순한 맹인안내견을 끌고 가듯 자전거에 끈이라도 매달린 양 잡고 간다. 풀밭 아래 놀랍게도 한 무리 거위떼들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헤엄을 치고 있다. 누가 여기서 거위를 키울 생각을 했을까. 문득 어떤 외국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오른다. 한 남자가 집에서 키우는 거위로 몸을 씻는 풍경이다. 소리지르는 거위의 날개가 남자의 등과 겨드랑이를 씻어내릴 때, 그 기묘한 장면에서 왜 나는 환한 삶의 생기를 느꼈을까. 잠시 후 풀밭 아래로 한강관리공단에서 나온 아저씨가 거위를 먹일 사료를 들고 나타난다. 하구 어귀에 거위 사료를 풀어놓자마자 수백 마리의 비둘기떼가 공중을 선회하며 달려든다. 아저씨는 능숙한 솜씨로 풀밭에서 돌멩이를 집어 비둘기떼에게 던진다. 비둘기떼는 아저씨가 돌멩이를 던질 때마다 머리 위를 산회하며 저만치 물러난다. 그들은 먹이를 채갈 기회를 엿보듯 편대 비행을 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하지만 아저씨는 능숙한 솜씨로 그들에게 돌멩이를 던진다. 집에서 기르는 닭처럼 집짐승처럼 느껴졌던 비둘기떼가 머리 위의 공중을 까맣게 덮을 때마다 저들도 야성이 살아 있는 새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나는 한참을 풀밭에 앉아 웅덩이의 거위떼와 아저씨와, 그리고 야성이 살아난 수백 마리의 비둘기떼를 감상한다.
마침내 나는 자전거에 올라탄다. 나를 이끌고 왔던 순한 맹인안내견이 이제 한 마리 조랑말로 바뀐다. 자전거 도로에 접어들어 채찍을 후려갈기듯 페달을 밟자 속도가 붙는다. 나는 서서히 자전거 손잡이를 잊고 페달을 잊고 내 안에 무력하게 남아 있는 추억의 찌꺼기를 씻어내며 바람과 물이 되어 간다. 나는 마침내 혼자 공중에서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