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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선풍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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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째 쓰고 있는 선풍기가 있다. 내 아이가 태어나던 해의 여름에 샀으니 꼬박 열일곱 번의 여름을 난 셈이다. 아이를 낳고 17년 동안 살면서 이사를 열 번쯤은 했는데 그 중의 두 번의 이사는 또 해외로 나가는 것이어서, 집안의 많은 가구와 물건들이 두서가 없어졌다. 국내에서 이사를 갈 때는 작은 것을 버리고 해외로 이사를 갈 때에는 큰 것을 버렸다. 그러다보니 집안에는 나이든 물건이라는 게 거의 없다. 그런데 도대체 이 선풍기는 어떻게 17년 동안이나 내 집에 머물고 있는 걸까.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버리기가 아까울 정도로 고가의 물건인 것도 물론 아니다. 오히려 이 물건은 간수하기가 성가셔서 늘 골치를 썩인 물건으로 기억된다. 쓰다가 고장난 게 아니라 처음에 살 때부터 문제가 있던 걸 샀던 것 같은데, 이 선풍기가 자기 머리를 잘 간수하지 못했다. 가만히 놔둬주면 문제가 없지만 조금만 무게가 주어지거나 수평을 잘못 잡으면 머리를 툭 떨어트려버린다. 이 문제가 실은 나사 하나만 제대로 조여주면 해결되는 것이란 걸 알지 못하고 작년까지 16년 동안을 그런 모양새로 썼는데, 그래서 내 어머니에게 얻은 별명이 제 머리도 못 가누는 ‘배냇병신'이었다.
16년을 배냇병신으로 살다가 17년째 접어들면서야 튼튼한 신체를 갖게 된 선풍기는 그러나 속으로는 곯을데로 다 곯아버린 모양이다. 이제는 버튼을 눌러도 금방 돌아가지 못하고 한동안을 덜덜거리다가 있는 힘을 다 해서야 날개를 돌리기 시작한다. 그것도 강풍에서나 겨우 그러하다. 그 정경이 때때로 안타까워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쳐다보기도 한다. 얼마나 힘을 들여 날개를 돌리는지, 16년 동안 배냇병신이던 머리를 덜덜 떨기까지 하는데, 이 선풍기가 이제는 기계처럼 여겨지지가 않는다. 온 생을 고단하게 살아온 늙은 노인이 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올라가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선풍기야 저의 존재 의미가 날개를 돌리는 일이었으니 버려지지 않는 한은 그리 살 수 밖에 없는 일이었겠지만, 나는 어쩌자고 이 친구를 이리 혹사시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마도 사소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 안의 선풍기 한 대는 너무나 사소한 것이라 버리지 않을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버릴 생각도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저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 비록 ‘거기'가 계절에 따라 장소를 달리 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필요한 거기에 있으며, 그러면서도 절대로 자기의 가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 이를테면 언제든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 말이다. “저런 건 요새 몇 만원도 안해요.” 그런 대사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생을 전부 바쳐서 얻은 것이 고작해야 ‘저런 것'이라는 지칭어일 뿐인 것이다. 선풍기뿐이겠는가. 있는 힘을 다해 날개를 돌렸으나 한번 날아보지도 못하고 다만 바람의 언저리에서 휩쓸렸을 뿐이라는 생각은, 누구를 향해서인지 모르겠으나, 어떻든 몹시 씁쓸하다.
방송에서 오래된 선풍기의 화재 위험성을 경고한 뉴스가 나온 후부터 아이의 성화가 대단해졌다. 불내기 전에 저런 건 좀 내다버리자는 것인데, 그때마다 나는 얘가 죽으면 난 얘를 묻어줄 거야, 라고 대답한다. 나이든 엄마의 소녀취향이 아이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 그건 어쩌면 선풍기도 마찬가지일 모르겠다. 선풍기가 사람처럼 땅에 묻힌다면, 사람이 죽어 쓰레기장에 던져지는 것만큼이나 모욕적인 일일지도 모르겠거니와 누가 알겠는가. 저 덜덜거리는 바람으로도 어느 날 허술한 벽을 만난다면 그 벽을 박살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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