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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택 거실에서 차현숙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정인 © 운영자 | |
그날 의사는 내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하고 싶은 대로 살고,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가고 오직 자신을 생각하고 사세요.”
굳이 남에게 숨기려고 해서가 아니라 숨겨야 할 사회적 구조와 사람들의 인식 속에 내 오랜 병이 스스로 극단적인 해결로 끝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담담하고 냉철해졌다. 의사의 충고와 바람과는 다르게 책상 앞에서 꼭 끝내야 할 나 자신만의 고유한 두 가지 일이 내겐 있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고 의사는 말하니… 그때 휴대폰이 책상 위에서 요동치고 있다.
나는 시간이 없는 사람답게 폴더를 열었다. ‘너, 누구야?’
“누구세요?”
“아, 네… 저는 대산에서 간행하는 계간지에 있는 사람인데……”
갈수록 좌측 청력이 떨어지고 좌우 청력의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소리를 정확하게 들을 수가 없어 재차 물었다.
“어디라고요?”
“대산……”
‘대산?… 대산이 뭐하는 곳이지……’
아직 기억장애에서 기억의 많은 부분이 돌아오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모르면서도 그냥 아는 체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인터뷰를 맡아주셨으면… 그런데 선생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더라고요. 전화도 연결되지 않고… 힘들었어요.”
“미안해요. 제가… 좀… 사는 일에 바빠서… 그런데 누가 날 인터뷰 하죠?”
“그게 아니라 선생님이 선배 작가를 인터뷰 하는 겁니다.”
“날 인터뷰 하는 게 아니라 누구를 인터뷰 하라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인터뷰의 대상은 누구죠?”
“서정인 선생님이요. 전주에 계신 서정인 선생님을 인터뷰 하고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어 바로 3~4일 후에 30장의 인터뷰 원고를 주셔야 해요.”
서정인… 정인…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지금은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고 무엇보다 인연들의 매듭을 내 스스로 먼저 풀고야 하는 때이다. 사과하고, 사과를 받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해야 하는 인연들에게 전화를 했다. 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하고 한번 만났으면 한다고 말했지만 단 한 통화의 전화도 없다. 그들의 잔혹하고, 비정하고, 비겁한 침묵에 질려버린 나는 용서를 구하고, 나 자신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고 그들을 과연 용서하고 눈을 감을 수 있을까, 하는 증오심에 몸과 마음이 불덩이에 쌓여 괴로워하고 있었다) 정인… 그런 관용의 정에 절망한터라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글이란 읽는 거지 쓰는 거라는 인식이 없는 나는 20대 후반에 우연히 서점에서 이름과 제목이 아름다워 『강』을 샀다. 그 후에 엉뚱하게 소설가가 됐지만… 그의 글은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워 그냥 읽혀지지 않는다. 어느덧 소리 내어 읽게 되고, 읽게 되면 저절로 가락이 나와 웃고, 울면서 노래로 저절로 입 밖으로 부르게 된다. 내게 『강』은 비극적인 인간의 운명 속에서 지문이든, 대화든 그 비극성을 희극으로 재빨리 바꾸는 작가의 통찰력에 눈물을 흘리며 웃게 해주는, 책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시절인연이라…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꼭 만난다는…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지만 한번쯤 만날 거라는 예감은 하고 있었다.
『강』 이후 다른 단편들을 읽긴 읽었지만 기억에 없다. 요 몇 년 전에 나온 『용병대장』을 읽으면서 나는 『강』을 읽을 때와 같으면서도 다른 감정에 빠졌다. 언뜻 보기에 『강』과는 전혀 다른 작품세계로 보이지만 그는 역시 그답게 시간과 상관없이 『강』에서 『용병대장』으로 기어코 자기 세계의 끝과 또 다른 시작을 열고 닫으며열심히 가고 있다.
결국 그는 그이다. 유한한 인간의 생의 비극, 비극적 생의 조건을 『용병대장』에서는 지문을 거의 생략하고 오직 대화로만 이 세계의 삶을 처절하게 희극화시켜 극대화된 비극성을 기어코 보여주었다.
인터뷰에 꼭 필요한 질의서를 몇 개 준비해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폴더를 닫는 순간 질의서 작성 준비가 싫어졌다. 싫다! 그저 내 기억에 각인된 두 개의 작품에 통한 또렷한 어떤 느낌만은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에 그 외에 다른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전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급하게 원주 토지문학관으로 오는 바람에 입을 옷이 없어 터미널에서 만 오천을 주고 원피스를 하나 사서 갈아입었다. 버스는 출발하고 ‘정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있는 곳으로 나는 간다.
나는 점심 등 인터뷰로 들어가기 전의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빨리 둘만의 공간으로 가 둘만의 시간 속에서 담화를 하고 싶었다. 세상은 술래놀이 하기에 얼마나 많은 재미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가.
그는 술래이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 그렇다. 그는 영원한 술래이다. 나 또한. 대산 관계자 역시…
서) 어디로 가서 인터뷰를 하면 좋겠어요? 집은 더워서 번잡하고, 내가 요 근처에 따로 아파트 하나를 빌려 거기서 일을 하는데.
대산) 조용한 카페가 낫지 않을까요?
차) 선생님 아파트로 가요. 네?
결국 자택으로… 그는 아파트를 먼저 몇 번 말했지만(원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현실적인 선택은 자택으로 빠르게 옮겨 갔다. 음, 이것이 서정인이라는 한 인간의 존재구나. 일부러 아무 준비 없이 ‘서정인이라는 한 존재의 내적 세계’를 수용하게 내 자신을 열어 놓은 상태라 그의 사소한 선택이나, 말 등등은 내게 놓칠 수 없는 의미와 상징을 갖고 있다. 인터뷰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는 술래 한계를 어디까지 정했나? 있는 나와 있고자 하는 나와 있어야 할 나, 등등의 수많은 자신을 어디가 꼭꼭 숨겨 놓았나? (여기서 자신이란 우주의 거울이다. 겨자씨 한 알에도 우주가 담겨져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인간이란 존재의 거울은 얼마나 엄청난 우주인가. 그 거울 안에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자신 안에 있는 수많은 인간뿐 아니라 걸어 다니는 거울로 타인들은 자신의 거울 속에서 무얼 보았는가, 에 대한 술래의 재미……) 찾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가족이든 사회든,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모조리 던져 버리고 이탈자가 되어 생의 끝까지, 그것으로 안 된다면 죽음 이후의 세계 속에서라도 영원한 술래가 될 만한 존재인가? 아닌가? 정말 찾을 마음은 있는가? 현실에서든, 아니면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에서든… 작든, 크든,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술래의 역할에도 대가가 따른다. 그는 대가에 대한 지불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 등등의 영혼의 메스가 이미 그를 향해 가고 있다. 겹겹의 자기 보호막을 해체시키고 그의 원형을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을까, 가 2시간 안팎의 시간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다.
삼십 년 넘게 살아왔다는 단독주택이다.60~70년대의 전형적인 이층 양옥집이다.
그는 세월과 상관없는 만년 청년이다. 그것도 수려한 외모의 활력과 생기가 넘쳐나는 청년이다.
차) 몇 년 전엔가 선생님의 『용병대장』을 이틀을 밤낮으로 꼬박 읽으면서 너무 재미있어서 침대에서 데굴데굴 굴렸어요.
서) !… 그랬습니까? 처음 듣는 말이다. 아, 희망이 있다!
차) 주위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하지 않던가요?
서) 다들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해서……
차) 그렇다면 제가 재미있게 읽은 것은 아마 제가 그리스 자연철학을 공부하고 그쪽으로 여전히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 같아요.
서) 아, 낙관적이다. 그런 사람이 더 있겠지…
차) !… 그럼요, 선생님. 몇 년 전에 아무 계획 없이 지중해 쪽을 잠깐 돌아봐서 그런지 요 몇 년 간 나온 책 중에서 『용병대장』이 저에겐 제일 재미있었어요. 아부가 아니라 진짜로요.
서) 지중해 쪽을 돌아봤다고? 혹시 『용병대장』에서 뭐 틀린 게 없었나요?
차) 글쎄요. 읽은 지 오래 되서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읽을 당시에 소설 속 인물의 공간이 잘못된 게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게 기억나요.
서)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유럽을 특히 이태리를 배낭 하나 매고 전철로, 버스로, 도보로 다니면서 일일이 현장답사를 얼마나 철저하게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지명이 틀렸다는 겁니까?
차) 제 착각인 것 같습니다.
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
차) (순간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시칠리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던데 어땠어요?
서) 대단히 아름답다. 이태리 곳곳의 자연환경 자체도 아름답지만 로마제국 때 만든 성벽 하나도 예술입니다. 지금 선진국이라는 서유럽인 영국, 독일, 프랑스 등등의 나라들은 로마 제국 때는 완전히 야만인에 미개한 종족이지 않았느냐?
차) 선생님, 참 대단하세요. 그렇게 배낭 하나 메고 가이드도 없이 『용병대장』에 나오는 공간을 혼자 다니면서 일일이 현장검증을 하시다니…
서) 몇 달 전 한국의 문인 몇 명이 독일문화원의 초청으로 독일에 갔을 때도 하루 시간을 빼서 나 혼자 전절을 타고 버스를 타고 베를린을 다녀왔어요. 같이 간 문인들이 믿지를 않대. 참, 차현숙씨는 지중해 연안의 나라 중에 어느, 어느 나라를 다녀왔어요?
차) 이집트, 터키, 그리스를 갔다 왔어요. 저는 그리스가 좋았어요. 하지만 터키도 다시 한 번 꼭 가보고 싶어요.
서) 난 터키만은 못 갔어요. 그런데 꼭 터키를 가고 싶어요. 거기서 한 육 개월만 살다 왔으면 좋겠어요.
차) 그러세요, 선생님. 물가도 싸고 한 달에 50만~60만 원이면 의식주가 다 해결되요. 터키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초대 대통령은 왕족들과 귀족들을 죽이거나 하지 않고 한때의 문명국의 후손답게 오리엔트 특급열차로 왕족들은 50년, 귀족들은 30년 동안 터키 땅을 밞을 수 없는 망명을 보냈는데 보석이나, 보물 등 국가적 재산은 일체 가져가지 못하게 해서 터키는 다른 나라에 비해 그 나라의 보물이나 국보급 유물들이 그나마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그뿐만 아니라 유적지들도 다 제자리에 있어서 꼭 한번 가볼 만한 곳이에요. 테베와 트로이 문명의 흔적도 보고요. 저랑 같이 갈까요?
서) 아, 아, 아니… 이젠 힘에 부쳐서…
차) 그럼 패키지로 가세요. 오히려 힘 안 들고 꼭 봐야 할 것들은 다 볼 수 있어요.
서) 음. 그럼 패키지로 가야겠군. 한 3백만 원이면 되지 않나?
차) 그럼요. 따로 쇼핑을 하지 않는다면 충분해요.
인터뷰 시간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사진을 찍던 대산 관계자가 눈에 보이게 불안해하고 선생님도 당혹스러운 얼굴이다.
서) 교수로 있을 때는 못써서 못썼는지, 아니면 시간이 없어서 못썼는지 많이 쓰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퇴임을 하고 나니까 역시 시간이 있어야 쓸 수 있더라고요. 그런데 외적 강제성이 없으니까 마냥 시간이 흘러가서 작품을 도저히 완성하지 못해. 역시 마감이라는 발등에 불이 필요해. 필요해… 차현숙 씨는 언제 등단했죠? 몇 권의 책을 냈죠?
차) 1994년도에 고려원에서 내는 『소설과 사상』이라는 계간지로 등단했어요. 작품집 2권과 장편 2권 쓰고 내년에는 책을 좀 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준비하고 있어요.
서) 십 년 동안 4권이면 아주 많이 썼네요.
인터뷰의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하지 않고 인간의 고유한 광기나, 인간이란 존재는 크기가 다른 두 개의 바퀴를 가지고 태어나 인생이라는 길을 삐거덕 하면서 굴러가는데 특히 예술가는 현실의 바퀴가 비정상적으로 작고, 자신이란 고유한 바퀴가 크게 태어난 존재인데 선생님은 크기가 다른 바퀴의 균형을 어느 쪽으로 잡고 영혼의 균형을 유지하나요? 사회적 구조든, 가족 구조든 그 안에서의 가장의 역할, 아들의 역할, 교수로서의 역할을 송두리째 집어 던지고 오직 자신만의 고유한 술래의 역할만 하고 싶다는 광적인 욕구를 한 번쯤 현실에서 실행해 본 적은 없나요? 인간의 고유한 광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등의 이야기로 인터뷰시간을 꽉 채웠으니…
서) 언제부터 문학을 했는지, 동기는 무엇인지, 감명 받은 책은 뭔지, 뭐 그런 걸 왜 묻지 않죠?
차) 글쎄요…
뭐, 특별난 이유는 없지만 그냥 그런 정보를 내 원고에서 독자들에게 주고 싶지 않다. 『강』과 『용병대장』을 읽었던 독자에게는 두 책을 책상에 놓고 다시 한 번 『강』과 『용병대장』을 시간의 끊김 없이 읽기를 권하고 싶고, 아직 읽지 않는 독자라면 그렇게 꼭 한 번 읽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가능하면 책 앞에 저자의 이력, 책 뒤의 해설, 작가후기를 아예 가위로 잘라 버리고 오직 작품만을 통해 작품 고유의 숨은 말들을 듣고, 생각하고, 그 섬세한 영혼의 떨림을 느끼기를 바란다. 독자도 술래다. 재미있는 술래잡기를 한 번 이 두 권의 책 속에서 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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