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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를 세우는 일의 업(業)

한사람의 삶은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흔히 두드러진 특질을 이내 찾아낼 수 있다. 그런 특질은 어릴 적부터 나타나서 줄곧 삶에 방향성을 준다. 우리가 어릴 적에 유전자들과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생성되고 한 번 생성된 몸과 마음은 거의 바뀌지 않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내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면, 지적 호기심이 가장 두드러진 특질이었다는 것이 이내 눈에 들어온다. 어릴 적부터 나는 당장 쓸모가 없는 지식들을 순수한 호기심에서 얻고 싶어했다. 내가 학교 성적을 높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책들을 읽는 것을 보면, 학교 친구들은 부러움에서 몰이해를 거쳐 불쾌감에 이르는 다양한 태도를 보였다. 남들의 반응들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을 지녔다는 점은 나에겐 다행이었다. 어떤 집단에서 따돌림을 받는 가장 효과적인 행동은 남들이 한담들을 즐길 때 혼자 책을, 그것도 어려운 주제를 다룬 책을, 읽는 것이다.
그래서 내 머리는 늘 쓸모없는 지식들로 어지러웠다. 당장 쓸모가 보이지 않는 지식들을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했다는 점에서, 나는 지식인으로 태어난 셈이다. 조지 오웰의 말대로, 쓸모없는 지식들을 사랑하는 것은 지식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질이다.
하긴 ‘쓸모’라는 것은 상대적이다. 보통 사람들이 “쓸모있는 지식”으로 여기는 것들은 일상생활에 필요하거나 일터에서 쓰이거나 재산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는 지식들이다. 이런 종류의 지식들은 삶에 필수적이므로, 모두 얻으려 애쓰고, 그래서 늘 활발하게 생산되고 유통된다.
그러나 이런 지식들은 지금 존재하는 지식들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가 그 동안 모았던 지식들의 대부분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에는 별로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과학의 빠른 발전 덕분에, 그렇게 쓸모없는 지식들의 대부분은 과학적 지식이다. 이런 지식들은 세상의 근본적 구조와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고, 그런 지식을 더 많이 갖출수록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쓸모가 없는 지식들은 학문적 차원에서 큰 쓸모가 있는 것이다. 사회가 점점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사회의 구조와 움직임에 관한 지식은 사회의 생존과 발전에 점점 필요해지고 있다. 그래서 영국 철학자 시릴 조우드가 지적한 대로, 쓸모없는 지식이 우리 시대보다 더 중요했던 시대는 없었다.
역설적으로, 내가 나의 지적 호기심과 쓸모없는 지식의 큰 쓸모에 대해서 또렷이 인식하게 된 계기는 젊을 적에 선가(禪家)의 종지를 만난 일이었다. “불립문자(不立文字)”라는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내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사람의 천성을 직접 읽어낸다는 선가의 종지는 멋진 학습 방법이다. 한 집단의 지배적 지식 체계가 굳어져서 생기를 잃고 지적 활동이 ‘훈고학’의 특질을 짙게 띠었을 때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 한계를 지녔다.
사람답게 살려면, 사람들은 먼저 지식을 모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문명이 뜻하는 것이다. 사람의 지각은 아주 제약되었고 세상은 그리도 거대하므로, 지식의 발전과 집적엔 근본적 제약이 있다. 이런 ‘지각의 감옥 prison of perception’에서 벗어나려면,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사람의 지각을 늘리는 것이 긴요하다. 망원경과 현미경은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나온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이 세상의 근본적 구조와 움직임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직지인심(直指人心)’에 의존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식에 근본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불립문자’에 회의적이었던 것은 그런 근본적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문(漢文) 문명권에 속했는데, 19세기 이후 유럽의 문명을 중심으로 한 세계 문명 속으로 빠르게 통합되었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받아들여서 소화해야 할 지식들은 엄청나다. 그 과업의 성공적 수행을 통해서만, 우리는 인류 문명의 주변부에서 중심부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불립문자’는 내겐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문자를 세우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받아들였다. 달리 말하면, 나는 전문적 지식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상과대학을 다녔던 내가 기업가나 경제학자와 같은 직업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 전문적 지식인으로 정체성을 삼았다는 사실은 내 가슴에 묘한 감회의 물결을 일으킨다. 그리고 내가 세우려는 문자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문학을 내가 세울 문자를 담는 그릇으로 삼았다.
문학은 갖가지 종(種)들이 나름의 틈새를 찾을 수 있는 거대한 생태계다. 그래서 지식을 주제로 삼은 문학 작품들에게도 선선히 너른 영역을 제공한다. 내가 바란 것은 내가 얻은 지식들을 들을 만한 이야기들로 만들어서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작품들은 대체로 지식인을 화자로 내세운다. 지식인의 눈에만 사회의 구조와 움직임이 제대로 들어온다. 평범한 화자를 내세우는 것은 흔히 좋은 전략이 될 수 있지만, 그런 화자를 통해서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달할 길은 어쩔 수 없이 막힌다. 내가 과학소설(SF)을 여러 편 썼다는 것도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이다. 현대에서 과학과 기술이 워낙 중요하므로, 지식을 주제로 삼은 문학 작품들이 과학소설의 모습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지식을 주제로 삼은 문학의 영역은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문명이 빠르게 발전하고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므로, “쓸모없는 지식들”을 열심히 얻지 않으면, 누구도 문명과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쓸모없는 지식들”을 외면한다. 불행하게도, 작가들은 대체로 그렇게 쓸모없는 지식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잘 하는 재능이 있어서 작가가 되지, 지식이 많아서 세상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늘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다. 원시 시대의 구전된 지식들은 대부분 외우기 좋은 시가의 형태를 했고 중세까지도 글을 아는 문인들은 지식인들의 주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작가들은 으레 지식인들이라는 가정이 깨어졌고 작가들은 점점 지식인 사회에서 밀려났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만일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자신이 문명이나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의 이야기는 바탕과 방향을 잃을 수밖에 없고, 자연히, “소음과 격정 sound and fury”이 된다. 물론 포크너와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손에 의해 그런 “소음과 격정”은 인간의 조건의 어떤 특질을 잘 그려낼 수 있다. 그러나 문학 작품의 태반이 그럴 수는 없다. 독자들은 이미 이 세상이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안다. 실은 그들은 문학 작품들에서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세상을 이해하는 단서들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문학으로부터 발길을 돌린다. 주류 문학 시장이 점점 위축되는 사정엔 이런 요인도 분명히 작용할 터이다.
반면에, 전문가들이 주로 참여하는 장르 소설 분야들은 큰 활력을 보인다. 한 분야에서 넓고 깊은 지식을 갖춘 전문가들이 쓴 작품들은 그 분야의 구조와 움직임을 독자들에게 뚜렷이 보여주고, 그런 탄탄한 바탕 위에서 이야기를 펼치므로,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잘 채워준다. 패트리셔 콘웰의 탐정소설, 톰 클랜시의 군사소설, 로빈 쿡의 의료소설, 그리고 존 그리셤의 법률소설을 떠올리면, 이 점이 이내 또렷해진다.
이런 사정은 과학소설의 경우에 한결 두드러진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은 이미 압도적일 뿐더러 점점 빠르게 늘어난다. 따라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함언들을 드러내는 과학소설은 독자들에게 당장이나 장기적으로나 쓸모가 크고, 당연히, 우리 문학 시장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우리 문단이 과학소설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고 훌륭한 과학소설 작품들이 많이 나온다면, 그것은 문단을 훌쩍 넘어서는 축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