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날의 김영승 시인    © 운영자

언제나 그랬지만
갈수록 개인의 영역이 축소되고 말살되는
시대에 있어서 결코
한 개인의 노래만은 아닌 극복해야 할
자조적 실존의 비극적 아름다움 -

상대적 가치로 환산되어
어쩔 수 없이 고도화된 미개한
정태적 표현양식으로 몰수된
그 모든 개별적 사례에 대해서

- 졸시 「반성·序」 앞 부분
 

나의 데뷔작을 말하면 흔히 「반성·序」 외 3편의 시를 말하는데 나의 데뷔작은 그냥 그 「반성·序」 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 3편의 시’는 처음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발표될 당시는 지금 그 문제의 시집 『반성』에 수록된 작품과는 그 연작시 번호가 달라 도대체 몇 번인 지는 그 『세계의 문학』 1986년 가을호를 찾을 수가 없어 확인이 참 어렵다.
가끔 가령 「반성 608」 할 때 그 ‘608’은 뭐냐고, 그 번호는 무슨 숨은 의미가 있는 거냐고, 무슨 간첩들의 난수표 같은 그 수상한 번호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그냥 일련번호라고 나는 또 대답을 해준다. 그러니까 「반성」에 붙은 그 번호는 「반성 1」부터 「반성 1302」까지의 그냥 일련번호이다.
지난 2001년 문예진흥원에서 남북한 문인들의 통일문학전집을 발간한다고 했을 때 발표 당시 최초본과 상이한 개작이 있으면 각각 명시해줄 것을 요청하여 그 「반성·序」 외 3편의 시의 그 3편의 그 달라진 번호에 대해서 밝혀주었었는데 어떻게 밝혀주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통일문학전집이라는 것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도 아직은 잘 모른다. 재수록료는 분명 받은 것 같은데 말이다. 다 반성할 일들 뿐이다.
당시 나는 인천시 간석동 고 손칭호 씨 댁 단독주택의 반지하의 방에 사글세로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었다. 방세는 계속 밀려 구박이 심했었는데 일단 그 상금으로 방세라도 내고보자는 생각으로 나는 당시 ‘오늘의 작가상’이라는 공모에 투고를 하게 되었다. 상은 소설가 강석경이 『숲속의 방』으로 받았고, 나는 떨어져 그 반지하의 사글세 방이 털속의 방이 되어버렸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작품이 본심에는 올라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실리게 되어 소위 데뷔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이다.
‘오늘의 작가상’에 투고할 시를 고물 타자기를 빌려다가 다 치고 나니 아무래도 나의 그 졸시 「반성」 연작을 세인들이 조금은 백안시, 사갈시, 해괴하게 볼 가능성도 있다 여겨지어 나는 부득불 방어기제가 발동, 더 비극적인 발상을 하게 되었는데, 그 「반성」 연작의 세계를 총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조명해 줄 어떤 ‘얼굴마담’이 필요하다고 여겨져, 즉각 진실로 한 20여분 만에 그 기나긴 장강(長江)의 시 「반성·序」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 투고할 40편인가 50편인가의 시 앞에 덧붙였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 「반성·序」라는 시는 없어도 좋을 시였을 지도 모르고 없었을 수도 있었던 시였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반성·序」는 「반성」이라는 사생아의 사생아인 것이다.
시가 너무 이상하다, 시가 어쩐지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문학 수련에서 나온 게 아니라 한 백수의 생활에서 나온 표피적인 스케치로 여겨지면 어쩌나 하는 역시 자조(?)에 울며 겨자먹기로 덧붙인 것인데, 쓰고나니 쓰길 잘한 것 같아 그냥 고개를 끄떡이며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반성·序」에서 우리가 받는 놀라움은 최인훈의 전통 소설양식을 파괴한 「총독의 소리 」 「주석의 소리」가 우리에게 준 당혹감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그는 전통적 시 문체인 감각적 이미지와 정서적 언어 대신 건조하고 딱딱한 관념어, 그것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철학도의 용어들을 대담하게 선택했다. 이것은 산문으로 된 서문을 행과 연으로 갈라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처음부터 우리의 선입관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 김준오, 「한국 모더니즘의 현단계 /모더니즘과 마르크시즘의 만남」, 『현대시사상·1』(고려원, 1988) 중에서

내 연작 졸시 그 「반성」을 따스한 눈길과 가슴으로 발견한 사람은 문학평론가 이남호(고려대 교수, 국문학)이다. 그는 진실로 내 졸시에 대한 감식안을 갖고 있는 탁월한 비평가이며 그 자체로 시인이데, 또 한 번 진실로 그런 의미에서 그는 내 인생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그 아득한 절망의 벼랑에서 그가 나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이후로도 아주 오래도록 그냥 이런 저런 자족적인 시나 쓰며 자조하다가 그러한 ‘자조적 실존의 비극적 아름다움’같은 일몰, 내 인생의 장엄한 최후를 조금은 더 일찍 서둘러 맞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