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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의 목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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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12월부터 봄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마음속에서 봄바람이 살랑이던 지난 3월 초,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어긋난 보도블록을 잘못 디뎠다. 아마 내 발걸음은 그때 지면에서 살짝 떠올라 있었을 것이다. 발목이 안쪽으로 확 접히는 순간, 부러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초 사이 발목은 거짓말처럼 부풀어올랐다. 기다시피 집으로 돌아와 얼음주머니를 올려놓았다. 발목을 삔 게 처음은 아니었다.
며칠 침을 맞고 절뚝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면 저절로 낫곤 했다. 다음 날 일어나니 심상치가 않았다. 발목이 물풍선처럼 부풀어있었다. 난생 처음 정형외과엘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진료실로 들어가니 판독기 위에 내 발 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내 몸의 일부였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의 왼발 뼈. 발목에서 발가락을 향해 이어진 가늘고 긴 다섯 개의 뼈. 애잔해라, 저것이 사십 여 년 동안 내 몸을 싣고 다닌 뼈구나.
의사선생님은 새로운 임상사례라도 찾아낸 듯 흥분했다. 아니, 삔 것 가지고 이렇게 심하게 골절된 건 처음 봅니다. 어쩌다 이랬어요?
대답을 원하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원인을 더듬어 보았다. 몇 가지 일을 몰아서 했던 외출이라 발걸음은 종일 허둥지둥 했다. 오랜만에 귀국한 지인과의 점심약속이 있었고 은행을 들렀고 돌아오는 길엔 장을 보아 오느라 왼 손엔 우유와 과일이 든 커다란 비닐봉투가 들려있었다.
걸어오면서 전화통화를 하느라 발밑을 살펴보지 않았다. 전화통화를 하지 않았다면, 점심약속이 없었다면, 장을 보지 않았다면, 다리를 삐지 않았을까. 그렇게 따지자면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봄이잖아요.
복숭아뼈 가운데와 새끼발가락으로 가는 뼈에 실금이 보였다. 깁스를 해야 한다고 했다. 차가운 석고를 감고 환자용 신발을 신고 나오니 당연한 듯 목발을 쥐어주었다. 이럴 수가.
겪어보지 않은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게 인간인가. 목발을 딛고 다니는 일상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 넓지도 않은 아파트 안에서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종종거리며 걸어다닌 줄을 처음 알았다. 하소연을 했더니 엄마는 그랬다. ‘도랑 안에서 십리’ 라고 안하냐. 집안 일이 그렇지. 외출이라도 하면 모든 사람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쳐가면서 꼭 내 얼굴을 돌아보고 갔다. 횡단보도에선 절반 밖에 못 건넜는데 신호가 바뀌어버려 고꾸라질 듯 급히 목발을 움직여야 했다. 손바닥이 빨갛게 부풀어올랐고 심하게 욱신거렸다.
비슷한 종류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낯선 사람이 가까워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심리적 절차를 단숨에 뛰어넘게 되나보다. 닮은꼴의 상처를 확인하는 순간 서로를 이해하고 친밀해지며 호의를 품는 연약한 심성들을 나는 만나게 되었다. 여러 장소에서 마주친 많은 사람들이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자신도 생의 어느 순간에 목발을 짚고 다닌 적이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안다고. 더 나아가 몇 살 때, 왜 다쳤는지, 사고를 유발한 자신의 어리석음, 사고 전에 느꼈던 불길한 예감까지도. 처음 보는 내게 자신의 직업을 알려주었고 사고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삶의 자세를 얘기하기도 했다.
바지를 걷어 굳이 상흔을 보여주는 이도 있었다. 내가 목발을 짚고 있지 않았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얘기들이었다. 골절을 경험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을 처음 알았다.
깁스를 풀던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애 한번쯤은 목발을 짚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꼭 겨드랑이에 끼우는 목발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한순간에 열어줄 수 있는 올망졸망한 마음의 고통을 겪어본 자에게만 다른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영혼의 목발이 보이지 않을까.
몸도 영혼처럼 기억이 있는지 끊긴 실핏줄과 인대와 임파선을 그리워하며 여전히 퉁퉁 부어있긴 하지만, 유난히 짧았던 봄날들은 목발 사이로 흘러 가버렸지만, 당분간은 한 사이즈 큰 운동화만 신고 다녀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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